< 제33화. 진지공사 (1) >
제33화. 진지공사 (1)
이강진에게 포상휴가를 양도받은 덕분에 백우호는 좀 더 오 랫동안 그의 어머니의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백우호가 휴가를 떠난 다음 날.
안준렬도 점호를 마치자마자 바로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인혁아. 나 없는 동안 애들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말고 휴가 잘 다녀와."
예전에 받았던 4박 5일 포상휴가를 사용하기로 한 안준렬.
라인혁은 그런 그가 한없이 부러웠다.
"아, 나도 그냥 포상휴가 써버릴까."
휴가를 쓰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다음 주가 진지공사 시즌이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1중대 행보관은 병사들을 빡세게 굴리기로 유명하 다. 그런 그가 진지공사 때, 과연 어떤 작업을 지시할지 감히 상 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휴가를 나가겠다 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고필중이 그 부분을 지적했다.
"라인혁 병장님. 말년휴가 때 붙일 포상휴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포상휴가 하나밖에 없으신데, 그거 써버리 면 말년휴가를 4 박 5일로 나갔다 와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말리진 않 겠습니다."
"그냥 해본 말이야. 쩝."
누구는 휴가가 없어서 죽을 맛인데. 누구는 자대 입대할 때부 터 정기적으로 계속 휴가를 나가곤 했다.
그게 바로 이강진이었다.
하지만 이강진은 이번에 받은 포상휴가를 과감하게 백우호에게 양도했다.
라인혁은 그런 이강진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외곽근무를 나간 이강진의 빈자리를 응시한 라인혁.
"아무리 동기라도 3박 4일짜리 휴가를 양보하는 게 결코 쉽 지 않은 일인데. 하여튼 대단한 녀석이야."
"강진이 말입니까?"
"어. 솔직히 군생활 하면서 휴가 양보한 사람, 강진이 말고 여 태껏 본 적이 없다. 너도 그렇지?"
"라인혁 병장님이 못 보셨다는데, 제가 봤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지."
이강진의 선행은 여러모로 전설이었다.
사실 이강진이 포상휴가를 너무 많이 가져가니 그를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병사들도 있었다.
하나 그들조차 이 번 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포상휴가는 돈과 마찬가지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것. 그것이 포상휴가다.
이강진은 그 유혹을 뿌리치고 동기를 택했다.
포상휴가 양도 건을 통해서 이강진은 자신의 이미지를 한층더 끌어올렸다.
만약 이강진과 같은 상황이 온다면, 과연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필증은 못할 거 같았다.
"저였더라면 그냥 제가 사용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겠지. 그래서 강진이가 대단한 거야."
이강진이 남긴 행적들은 1중대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다.
앞으로 이강진이 어떤 일들을 더 보여줄지.
라인혁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월요일 오전부터 병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금일부로 진지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4박 5일 동안 병사들은 중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고 부대 이곳저곳을 누벼야 한다.
중대, 대대 ATT 같은 훈련과는 다르게 진지공사는 행보관이 메인 지휘관이다.
"전체 주목!"
"주목!"
행보관의 외침에 병사들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복명복창했다.
"오늘부터 진지공사다. 다들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진지공사 시즌도 되었으니, 그동안 미루어뒀던 작업을 하나 할까 한다."
행보관은 막사 옆에 나 있는 커다란 배수로를 가리켰다.
"근래 들어서 비가 너무 많이 왔다. 그것 때문에 배수로가 완 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더군. 이번 기회에 저걸 보수한다."
병사들의 눈에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보통 배수로가 아니다. 1075 대대에서 가장 큰 배수로라고 할 수 있다.
성인 남자 두세 명이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로 엄청난 깊이와 폭을 자랑하는 1중대 배수로.
이것을 보수하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배수로 팀, 그리고 목진지 보수작업 팀. 이렇게 두 팀으로 나 누도록 하겠다."
하나도 힘든데,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하겠다고 선언하는 행보관.
병사들과 다르게 행보관은 진지공사 기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병사들을 굴릴 수 있는…… 아니, 병사들과 함께 부대 관리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작업 분배는 행보관이 직접 맡았다.
이강진은 성태강, 고필중과 함께 목진지 보수작업 팀에 배치 되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확신이 드는 건 있었다.
'둘 다 쉽진 않겠지.'
목진지 보수작업을 위해 편성된 7명의 병사들이 1부소대장과 함께 산행을 개시했다.
이들이 보수해야 할 목진지의 개수는 총 3개.
첫 번째 목진지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자리에 앉아 쉬기로 했다.
바로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산이 워낙 가파르기 때문에 이 곳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꽤 소모되었다.
목진지의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한 부소대장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이 빌어먹을 멧돼지 녀석이 또 여기 와서 행패 부리고 갔나 보네."
멧돼지라는 말에 성태강은 귀를 의심했다.
"이강진 일병님. 방금 부소대장님이 멧돼지라고 하신 거 같은 데…… 설마 여기에 멧돼지가 줄몰하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생활 하면서 멧돼지의 흔적은 지겹도록 볼 거다. 뭐, 직접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회귀하기 이전에 이강진은 멧돼지를 직접 봤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가 병장 때였다.
탄약고 초소 근무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지면이 쿵! 쿵! 하고 울린 적이 있었다.
처음에 이강진은 작은 규모의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본 순간, 지진이 아 님을 깨달았다.
멧돼지가 움직이는 것 때문에 발생한 진동이었다.
'차 크기만 한 놈이었지.'
소형차 정도? 아니, 잘 쳐주면 준중형 사이즈까지도 비벼볼 만할 정도로 커다란 몸집을 가진 녀석이었다.
덕분에 이강진은 후임 근무자와 함께 벌벌 떨면서 초소를 지켰던 기억이 났다.
'끔찍한 기억이었지.'
추억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래서 이강진은 전역하고 나서 멧돼지 대처 요령에 대해 공 부한 적이 있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굳이 군대가 아니더라도 산에 갈 일은 언제든지 생긴다. 대표적으로 등산이 있다. 그럴 때 야생 멧돼지 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미리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물론…….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10분간의 휴식을 마치고 작업이 시작되었다.
"모래포대부터 만들어둬라. 점심시간 전까지는 끝내야 하니 까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예, 알겠습니다."
곡괭이 담당은 이강진의 몫이었다.
그가 땅을 헤집어놓으면, 다른 병사들이 알아서 삽으로 흙을 날랐다.
일병이 왜 일병이라 불리겠는가.
일을 많이 하기에 일병이라 불린다.
때마침 이강진의 계급은 일병이다. 1부소대장과 함께 온 7명 의 병사들 중에서 유일한 일병. 그러다 보니 이강진은 평소보다 더 많은 움직임을 펼쳐야 했다.
'곡괭이질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긴 하는구나.'
그리고 은근히 운동이 된다.
생활 근육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는 소리가 들렸다.
'상병 말쯤에 내 인생 최고의 몸매가 완성되었지.'
작업 시간에 펼치는 노가다와 개인정비 시간에 가지는 헬스 타임 덕분에 이강진은 난생 처음으로 식스팩을 얻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식스팩은 실종되었다.
한 번 집을 나가더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회귀한 김에 몸매 관리 좀 신경 써서 해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한지윤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야 한다.
재력으로는 이미 그럴 낌새가 보이긴 했지만, 외형 관리는 아 직 덜 되었다고 판단했다.
열심히 땅을 헤집을 때였다.
지면에 박힌 곡괭이를 다시 빼는 순간.
"헉!"
"저, 저게 뭐야!!"
병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기다란 무언가가 튀어나온 것이다.
"씨발, 뱀이잖아!!"
"다들 물러서! 떨어지라고!"
물렸다가 괜히 피를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강진도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한편 부소대장이 병사들의 소란을 듣고 현장을 찾았다.
"뭐야. 무슨 일이냐?"
"부, 부소대장님!"
"뱀 나왔습니다, 뱀!"
"뭐어?!"
뱀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부소대장은 경기를 일으켰다.
"어어어어디서 나온 거야! 사 삽으로 좀 치워봐. 아니면 대가리를 찍어버리든가!"
주변이 소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뱀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
이강진은 곡괭이를 내려놓은 후에 기다란 나뭇가지를 찾았다.
"태강아. 거기에 있는 나뭇가지, 나한테 던져줘."
"알겠습니다!"
빠직!
나뭇가지를 부러뜨린 후에 그것을 이강진에게 조심스럽게 건 넸다.
"부소대장님,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겁에 질린 부소대장을 대신해서 이강진이 나서기로 했다.
나뭇가지 끝으로 뱀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에도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군.'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 녀석, 죽었습니다."
"엥?"
"진짜로? 그냥 기절한 거 아니야?"
"그렇진 않은 거 같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일단 멀리 던 져두고 오겠습니다."
뱀의 머리를 제압한 이강진은 그것을 들고 목진지 아래로 향했다.
뒤에서 부소대장이 소심하게 '조, 조심해라, 강진아…….'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1부소대장은 쥐, 뱀 같은 동물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걸 잘 알기에 이강진은 1부소대장이 벌벌 떨어도 딱히 그 의 흉을 보진 않았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천적이라 부를 만큼 싫어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1부소대장의 경우에는 쥐나 뱀이 그런 축에 속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강진은 해당되지 않았다.
"훼이."
뱀을 저 멀리 던져뒀다.
툭 .
지면에 떨어졌어도 뱀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죽었군."
군대에서 하도 이런저런 동식물들을 만나다보니 이제는 적응이 다 됐다.
'태강이한테 서바이벌 프로그램 있으면 나도 출연시켜달라고 해볼까?'
물론 농담이다.
뱀을 대충 던져둔 후에 이강진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아래로 내려왔나.'
갑자기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올라가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농땡이 피우는 거지, 뭐.'
만약 이강진이 말년병장이었더라면, 이대로 사라졌을지도 모 른다.
하지만 일병 신분으로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이미지 관리 잘 해왔는데, 이거 한 방으로 모든 이미지를 날리고 싶진 않았다.
'여기로 내려왔었지.'
목진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거의 근처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 았다.
쉬고 있다면 말소리라도 들려야 할 텐데.
목진지로 돌아온 이강진은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고필중 상병님. 뭐하시는 겁니까?"
"쉿! 쉬잇!"
고필중은 필사적으로 이강진을 조용히 시키려고 했다.
그때.
바스락!
맞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순간.
푸릉!
멧돼지 한 마리가 콧김을 뿜어냈다.
< 제33화. 진지공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