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102화 (102/347)

제32화. 초록빛 전쟁 (2)

이강진을 비롯해 소란을 접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안준렬도 마찬가지였다.

"야, 조일근! 무슨 일이야!"

"문만이가 예초기 돌리다가 다친 모양인가 봅니다!"

눈가 밑이 찢어져 있었다.

예초기를 돌리다가 튕긴 돌이 소문만의 왼쪽 눈가 밑에 튕긴 것처럼 보였다.

찢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안준렬은 당황하지 않고 이들에게 지시했다.

"일단 지혈부터 하고. 우호야! 넌 가서 의무병 불러와라. 문만 이는 일단 앉아 있고. 다른 애들도 가만히 있지 말고 일단 움직 여! 예초기부터 치우고!"

"예, 알겠습니다!"

괜히 초록 견장을 차고 있는 게 아니다.

분대장으로서 병사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하달하는 안준렬. 그 덕분에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어가고 있었다.

군의관은 소문만의 현재 상태를 보고하기 위해 1중대 중대장을 찾았다.

그러나 행정반에 있는 간부는 행보관밖에 없었다.

"중대장님 어디 계십니까?"

"오늘 연대에 일이 있다고 해서 그쪽에 가 있습니다. 문만이 다쳤다는 소식은 제가 전화로 알려드렸습니다. 문만이는 어떻 게 되었습니까?"

중대장이 없으니 일단 행보관에게 현재 상황을 보고하기로 했다.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눈 밑 피부가 살짝 찢어졌을 뿐, 후 유증은 없을 거 같습니다. 대신에 흉터가 조금 남을 수도 있습니다."

행보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에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 은가.

병사들을 빡세게 굴리기로 소문이 자자한 행보관이지만, 자 신이 담당하고 있는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다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 참으로 다행이 었다.

30분이 지난 뒤에 소문만이 생활관으로 복귀했다.

행보관은 소문만을 찾았다.

"문만아. 걸을 수 있겠냐."

"일병 소문만. 예. 다리가 다친 건 아니 니 걷는 데에는 큰 지 장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하고 잠깐 부대 밖으로 나가자. 민간 병원에 가보게."

군대 의료 체계는 굉장히 허술하다. 군의관은 조금만 쉬면 괜 찮아질 거라고 말했지만, 행보관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오진 때문에 전역한 이후에도 고생하는 병사들이 숱하게 많 다. 행보관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것들을 모를 리가 없다.

결국 행보관은 소문만을 데리고 민간 병원에 방문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부대를 나선 뒤.

1중대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작업을 도중에 끝내고 다시 막사로 돌아온 1분대원들도 마찬 가지였다.

기운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문만 일병님,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고필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다.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뭐, 행보관님이 민간 병원에 바래다주고 오신다고 했으니까, 그때 되면 정확히 어떤 상황인 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고필중 상병님도 예전에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도 행보관님이 민간 병원 데려가주셨습니까?"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고필중.

그는 축구하다가 발에 금이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냥 좀 아프다가 나중에는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 각했었거든. 근데 통증에 계속 가는 거야. 걷는 것조차 힘들 정 도가 되었을 때, 결국 견디다 못해 행보관님한테 말했지.

마침 행보관님이 당직사관이셨거든. 행보관님이 내 이야기 듣고 의 무실 말고 민간 병원 같이 가보자고 해서 바로 적절하게 치료받을 수 있었어. 행보관님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어휴, 상상조차 하기 싫네."

애매하다 싶으면 그냥 민간 병원에 데려가는 게 낫다. 이것이 행보관의 철칙이었다.

이강진은 행보관의 이런 면모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행보관에게 주기적으로 괜찮은 주식 정보들을 일부러 흘려주고 있 는 것이었다.

'행보관님 없었으면 우리 부대에서 불구자 몇 명은 나왔을지 도 모르지.'

이제 이 다음이 문제다.

중대에서 여름 한정으로 가장 귀한 인력인 예초병이 부상을 당했다.

아무리 행보관이라도 조일근 상병 한 명에게 모든 짐을 다 떠 넘기진 않을 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일단 이강진은 관찰자로서 현 상황의 흐름을 지켜보기로 했민간 병원까지 찾아간 결과.

다행히도 큰 부상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분간 안정은 취해야 한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 그래서 행보관은 오전 집합 때, 병사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문만이가 다시 복귀할 때까지 일할 예초병을 뽑기로 했다."

"……!"

병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작업병 중에서 가장 힘든 난이도가 바로 예초병이다.

무조건 한 명은 해야 한다. 이것은 즉, 러시안 룰렛이다.

행보관은 격발 대상을 찾았다.

"하고 싶은 사람, 손을 들도록."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도 없었다.

원래부터 예초병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숫자도 적었다. 그 런 와중에 소문만이 부상까지 당해버 렸으니. 누가 하고 싶다고 나서겠나.

게다가 중간에 예초기 몇 번 돌려봤자 4박 5일 휴가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할 만한 이유가 없다.

행보관도 이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초강수를 들고 왔다.

"문만이가 복귀할 때까지 3주간 예초병 지원하는 병사가 있 다면, 3박 4일 포상휴가를 지급하겠다."

여기저기서 '헉!' 소리가 났다.

4박 5일은 아니지만, 3박 4일도 꽤 크다. 겨우 하루 차이 아닌 가.

게다가 3주만 하면 된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이미 중대장님과도 다 합의 본 사항이다. 대신, 빡세게 시킬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미리 예고를 하는 행보관.

병사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3박 4일을 위해 초록빛 지옥으로 뛰어드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보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3주만 고생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예초기를 다루는 방법도 따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부상의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일단 선임급들 중에서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병장 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판국에 사방에서 튕기는 풀잎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하지 않겠 나.

도중에 행보관은 지원자 중에서 조건을 걸었다.

"이등병은 지원하지 마라. 상병, 일병. 이중에서만 지원하도 록."

기운상과 성태강은 자연스럽게 면제되었다. 기회를 박탈당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이등병들이었다.

자, 누가 스스로 풀 지옥에 뛰어들 텐가.

행보관은 이 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무도 없냐."

이때까지도 병력들은 침묵했다.

"지원자가 없다면, 내가 무작위로 뽑는다."

정말로 러시안 룰렛이 시작되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일병 이강진.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공통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

신교대에서 군대 척척박사라 불렸던 이강진은 자대에서 새로 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포상휴가 사냥꾼.

먹잇감이 빤히 눈앞에 있는데, 이걸 방관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강진이 지원을 하는 순간, 갑자기 몇몇 병사들이 용기를 냈 다.

백우호까지 포함해서 지원을 나선 병사들의 숫자는 총 다섯.

그래도 이강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명의 지원자가 나오자, 행보관은 당장 조일근을 불렀다.

"일근아. 예초기 한 번씩 쥐어보게 해서 괜찮다 싶은 녀석 있 으면 그 녀석한테 예초기 맡겨라."

"상병 조일근. 예, 알겠습니다."

선택권은 조일근에게 넘어갔다.

이미 소문만 일병 사건으로 인해 밝혀진 것이지만, 예초병은 굉장히 위험한 작업병이다.

예초기를 다루는 데에 소질이 없다면, 바로 걸러야 하는 게 좋 다.

그래야 본인도 안전하고, 같이 일하는 예초병도 안전하고. 서 로가 안전해진다.

조일근은 지원한 다섯 명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따라와라."

공교롭게도 전부 다 일병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막내는 이강진과 백우호였다.

이동하면서 이강진은 백우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왜 지원했냐?"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네가 지원했으니까."

"넌 내가 하면 무조건 하냐?"

"웬만하면 그렇지."

"어휴.…"

이쯤 되면 거의 병적 집착이다.

어차피 이강진은 백우호를 크게 견제하지 않는다.

"너, 예초기 어떻게 다루는지 알곤 있냐?"

"까짓것 그냥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 야?"

이런 말을 하는 것부터가 이미 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일근 상병을 따라 예초병 창고에 도착한 다섯 명의 일병들.

조일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바로 테스트를 진행했다.

"시간 없으니까 곧장 시작할게. 우선 두웅이부터 나와서 해봐."

"예, 알겠습니다."

예초기가 돌아가는 순간, 엄청난 소음이 이들의 귀를 강타했 다.

병사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으로 귀를 막았다.

위이이이이잉!

앞부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진동에 첫 타자로 나선 죄두웅 일병은 몸을 가누지 못 했다.

"어어어기"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조일근은 예초기를 바로 껐다.

"탈락. 다음."

가차 없었다.

매정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크게 다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말이다.

앞서 예초기를 잡았던 일병들과 같이 백우호도 큰 점수를 따 내진 못했다.

탈락 대신 보류라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 해야할 판이었다.

"다음."

이강진이 마지막 차례였다.

예초기를 든 이강진. 그 모습을 보자마자 조일근의 관심이 커 졌다.

앞선 네 명과 다르게 예초기를 다루는 모습이 상당히 능숙했 다.

위이이이이잉!

매섭게 돌아가는 날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겁먹거나 하는 그 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장소를 피해서 에초기를 돌렸다.

예초기가 꺼지자마자 조일근은 이강진에게 물었다.

"예초기를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만 돌리던데. 이유가 뭐 지?"

"날의 회전 방향이 시계 반대 방향이라서 그렇습니다. 작업자 를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작업해야 훨씬 안전합 니다. 그리고 비산물이 주변에 튈 가능성이 있으므로 반경 15m 이내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예초기를 돌려야 합니다. 예초병 본인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지나가거나 근처에 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안전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론까지 완벽했다.

이쯤 되면 오히려 궁금해진다.

"혹시 예초기 돌려본 적 있어?"

"예전에 예초 관련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수목 원에서 일했었는데, 그때 예초기 몇 번 돌려봤던 경험이 있습니다."

말로만 듣던 '경력 있는 신입'의 등장!

생계가 어려워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군생활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까지 확인했는데, 더 이상 무엇을 고민하랴.

조일근은 예초기 테스트가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 었다.

"강진아."

"일병 이강진."

조일근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3주 동안 잘해보자."

"예, 알겠습니다."

그의 손을 마주 잡아줬다.

이로서 새로운 예초병이 탄생했다.

< 제32화. 초록빛 전쟁 (2)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