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초록빛 전쟁 (1)
막사로 돌아온 이강진은 곧장 행정반으로 향했다. 행정반에는 김철 혼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간부님들 안 계셔?"
"엇?! 강진이잖아! 휴가 복귀한 거야? 언제 왔어?"
"방금."
행정반에 간부 한 명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선.
'빡세게 작업하고 있나 보군.'
막사로 올라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멀리서 행보관이 병사들을 닦달하는 외침이 들려왔었다.
여름과 겨울. 군대에선 이렇게 두 번으로 나눠서 커다란 전쟁을 치른다.
주 적이라 할 수 있는 북한군과의 전쟁이 아니다.
풀, 그리고 눈.
자연산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제초와 제설은 군인들을 괴롭히는 대표적인 작업들이다. 완 전한 여름이 되었다는 말은, 곧 제초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김철은 병기계 관련 업무를 진행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행정반에 남아 사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남들 고생할 때, 시 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컴퓨터나 두드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행정병도 행정병만의 고중이 있다.
눈 밑에 짙게 깔린 다크서클이 김철의 고중을 아주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잠은 좀 잤어?"
"말도 마…… 어제도 밤샜는데, 쉬지도 못하고 지금 여기에 앉 아 있는 거야."
차라리 김철도 그냥 일반 병사들처럼 나가서 풀을 뽑고 싶었 다. 그러면 적어도 쉬는 시간은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이강진은 말없이 김철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때마침 이강진이 찾던 간부가 행정반을 찾았다.
1중대 중대장, 윤형인이었다.
"충성!"
"충성. 휴가 복귀했나?"
"예, 그렇습니다."
"복귀 신고는 됐고. 말판하고 총기현황판만 수정하고 가라."
"예, 알겠습니다."
행정반에서 자신의 베레모를 찾아낸 중대장은 다시 허겁지겁 행정반을 나섰다.
중대장이 나가자마자 병사 한 명이 행정반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중대장님 어디 가셨는지 알아?"
수송분과 소속 운전병, 강속우 상병.
1중대 레토나 운전병으로서, 수송분과중 가장 바쁜 사람이기 도 했다.
이강진이 대표로 대답했다.
"방금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고?"
"아래로 내려가신 걸 보니, 사열대 앞으로 가신 거 같습니다."
"땡큐, 고맙다. 아, 맞다. 그리고 강진아."
"일병 이강진."
강속우의 눈빛이 변했다.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거, 사왔지?"
'그것'이 무엇인지 이강진은 굳이 그에게 묻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대답과 동시에 종이백 안에 아주 고이 간직되어 있는 잡지 한 권을 슬쩍 들어올려줬다.
군인들의 희망이라 불리는 스파링 잡지였다.
실물을 확인한 강속우는 이강진에게 엄지를 추켜올렸다.
"역시 강진이밖에 없다! 잘했어! 나중에 내가 PX라도 사주마!"
"감사합니다, 강속우 상병 님."
그는 빠르게 중앙 계단을 내려갔다.
잡지 한 권만 사와도 영웅 대접을 받는 곳은 아마 군대밖에 없을 것이다.
생활관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군장과 의류대를 빠르게 풀었다.
짐을 정리하고 나니 17시가 다 되었다.
그제서야 작업을 나갔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죽겠다, 죽겠어!"
"에어컨 틀어! 빨리!"
"강진이 왔냐?"
잔뜩 땀에 쩔은 라인혁이 뒤늦게 이강진의 존재를 확인했다.
"충성! 일병 이강진, 휴가 복귀했습니다."
같이 작업을 나갔다가 돌아온 기운상과 성태강은 이강진을 보 자마자 거수경례를 했다.
선임이 휴가를 나갔다가 복귀를 하면 이렇게 거수경례를 해 야 한다. 후임의 경우에는 그 반대가 된다.
백우호는 이강진을 부러워 죽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재미있게 잘 늘다가 왔냐. 너 노는 동안 우리는 지긋지긋한 제초 작업 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너도 포상 좀 많이 따두지 그랬냐."
"니가 너무 비정상적으로 휴가를 많이 따내는 거야. 나도 너 나가는 거 반절만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예병사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은 휴가를 나가는 이강진.
이번에는 휴가 나가는 타이밍을 참 잘 잡았다. 본격적으로 제 초 작업이 시작될 때 나갔으니 말이다.
자리에 앉은 기운상이 자신의 팔을 벅벅 긁었다.
"어제부터 팔이 너무 가렵습니다."
"봐봐."
후임을 챙기는 건 선임의 몫이다.
이강진이 가장 먼저 기운상의 상태를 체크했다.
"풀독 올랐네."
"그런 것도 있습니까?"
"있으니까 이렇지. 의무실이나 갔다 오자. 태강아. 넌 어때?"
성태강은 기운상에 비해 튼튼했다.
"저는 멀쩡합니다. 예전에 풀 속에서 보물 찾는 예능 프로그 램이 있었는데, 몇 시간 동안 풀 속에서 뒹굴어도 풀독이 오르 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하하!"
연예인이라고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성태강은 남들이 해볼 수 없는 경험을 이미 방송이라는 것을 통해서 여러 차례 겪었다.
활동적인 연예인만 가질 수 있는 장점이었다.
반면 기운상은 달랐다.
아버지가 투스타라는 사기적인 가족 관계가 있긴 하지만, 사 회생활 자체는 평범했다.
남들이랑 똑같이 대학교 다니다가 바로 입대를 했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풀을 만져본 적은 아마 머 리털 나고 처음일 것이다.
팔을 걷어 올린 황지웅이 이강진에게 말했다.
"강진아. 운상이는 내가 데려갈게. 안 그래도 나도 풀독 올라 왔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1생활관은 그래도 풀독 환자가 적은 편이었다. 2분대의 경우 에는 후임급 병사들이 전부 다 풀독이 오른 상태였다.
따가움과 가려움이 공존하는 양 팔 때문에 기운상은 죽을 맛 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열린 생활관에서 갑자기 풀 냄새가 확 풍겨왔다.
"컥! 이거, 무슨 냄새야!"
황지웅이 기겁을 했다.
지독한 냄새. 혹시 이들이 뽑은 풀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막 사를 급습한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독한 풀 냄새가 생활관에 풍겼다.
아니, 정확히는 복도에서 풍겨오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점점 진해졌다.
라인혁과 안준렬은 이 냄새의 정체가 뭔지 바로 알아차린 듯 했다.
"아, 그 냄새네."
"녀석들, 잠시 쉬러 왔나 보다."
두 병장과 다르게 황지웅은 아직도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 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녀석들이라니, 그게 누구입니까?"
"지웅아. 상병이나 된 놈이 그걸 못 알아채면 어쩌냐."
라인혁이 손을 들고서 생활관 문 밖을 가리켰다.
"곧 정답이 지나갈 거다. 잘 봐 둬."
모두의 시선이 생활관 밖 복도에 쏠렸다.
잠시 뒤.
빨간색 구형 활동복을 입은 두 남자가 지나갔다.
옷에는 빨간색과 다른 초록색들이 얼룩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걸어가는 두 남자.
라인혁이 직접 정답을 들려줬다.
"예초병들이다."
이들이 풀냄새를 풍기는 범인이었다.
풀과의 전쟁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특급 정예병.
예초병!
중대에는 현재 조일근 상병과 소문만 일병, 이렁게 딱 두 명 밖에 없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예초기가 두 대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지나가자 그제야 풀냄새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이들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쉬러 왔을 뿐. 해가 저물 때까지 이들은 무거운 예 초기를 들고 풀이 자란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야 한다.
이것에 예초병의 운명이다.
1분대원들은 예초병들이 풍기는 포스에 짓눌린 모양인지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안준렬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쌍한 녀석들.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여름만 빡세게 달리 면, 바로 4박 5일 포상휴가 떨어 지잖아."
실제로 안준렬에게 예초병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안준렬은 거절했다. 예초병이 힘들기도 할뿐더러, 분 대장을 차야 했기에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포상휴가 준다고 해도 하긴 싫어."
이게 안준렬의 생각이었다.
안준렬뿐만 아니었다. 대부분의 병사들도 같았다.
그만큼 굉장히 힘들다.
백우호가 장난식으로 성태강에게 물었다.
"태강아. 너, 작업병 하나 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예초병 해볼 생각은 없어? 어차피 풀독에도 면역이잖아."
"그래도 예초병은 좀…… 저는 그냥 백우호 일병님이 나중에 이발병 물려주시는 것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노골적인 거 봐라, 짜식. 내가 곱게 물려줄 거 같냐? 이발병 차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 하는 거 봐서 줄 거니까 안심하 지 마라."
"하하하, 알겠습니다."
모든 작업병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이강진과 백우호는 그래도 예초병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그래. 군종병 정도면 죽복받은 작업병이지.'
이강진은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기로 했다.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이강진은 바로 다음 날, 곧바로 제초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코팅된 목장갑과 호미, 그리고 낫.
제초 작업을 위해 산을 오른 이강진은 선임, 후임들과 함께 열심히 초록빛 전쟁에 참전했다.
풀을 잡고 최대한 힘을 가했다.
쑤욱!
다수의 풀들이 뿌리까지 뽑혔다.
"풀 뽑을 때 뿌리까지 확실하게 뽑아야 한다. 뿌리가 남아 있 으면 나중에 다시 자라나거든. 그러면 여기 또 와서 작업해야 하 니까 확실하게 뽑아둬."
"예, 알겠습니다!"
성태강과 기운상은 이강진의 팁을 머릿속에 확실히 기억해두 기로 했다.
풀들을 없애가던 와중에 백우호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하, 씨발! 강진아, 앞 좀 봐봐. 앞."
왜 그러나 싶었다.
허리를 들어 올리자, 뻐근함이 이강진의 몸을 덮쳤다.
장시간 허리를 숙이고 있던 탓에 몰려오는 후유증이었다.
주먹 쥔 손으로 허리를 토닥이던 이강진은 백우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거의 가슴 높이까지 자란 다수의 풀들 때문이었다.
백우호의 불만은 계속 이어졌다.
"이걸 언제 다 뽑냐?"
"불가능한 일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군인들이 할 일이 지. 잔말 말고 애들 데리고 따라오기나 해. 큰 녀석들부터 뽑을 테니까."
"어휴, 내 팔자야.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군대에 끌려온 것부터가 그 시작점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풀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강진은 짧게 혀를 찼다.
'돼지풀이네.'
억세기로 유명한 풀이다.
뿐만 아니라 이 풀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성태강이 마침 이강진의 바로 옆에서 돼지풀을 양 손으로 잡고 뽑으려고 했다.
"태강아!"
갑자기 이강진이 성태강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를 만류했다.
"이, 이 병 성태강!"
"너, 장갑 지금 뭐 끼고 있냐."
"목장갑 끼고 있습니다만……."
"코팅된 장갑 끼고 뽑아라. 돼지풀에 가시 달려 있으니까. 자 칫 잘못하면 손에 가시 박힌다."
"헉!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강진 일병 님."
이것저것 다양한 것들을 알고 있어야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다.
가시가 달린 풀들이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선임이 있다면, 그 리고 그 선임이 길라잡이가 되어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는 것들을 알려준다면, 후임 입장에선 참 편하다.
이강진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이들이 산 위에서 돼지풀과의 전쟁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아래쪽에서 예초기를 돌리던 병사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
"무, 문만아! 괜찮냐!"
조일근 상병이 소문만 일병을 강제로 앉혔다.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든 이강진.
'사고인가?'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그도 아래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 제32화. 초록빛 전쟁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