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1화. 좋은 사람 (2) - 4권 완결 >
제31화. 좋은 사람 (2)
결국 이강진은 한지윤을 바라식당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녀의 뜻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한지윤은 4차원적인 모습을 보이곤 할 때가 있었다. 이 것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차를 넓은 곳에 주차시킨 후에 골목길을 누비고 누볐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한 바라식당.
다 낡은 간판이 오늘따라 이강진에겐 부끄러움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한지윤은 달랐다.
"이 런 곳이 원래 맛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강진도 동의한다.
한 번 바라식당에 발을 들인 사람들 중 80퍼센트 이상은 단골 루트를 타게 된다.
맛은 확실히 있다. 다만, 홍보가 너무 안 되어 있다.
게다가 가게가 너무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 자체가 어 렵다.
숨겨진 맛집인데 아는 사람만 아는 맛집이 되어버렸다. 이강진은 늘 그게 아쉬웠다.
"자, 들어가죠."
"네."
이강진이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주방에서 황민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강진의 어머니는 오늘 비번일이었기에 황민수 혼자서 가게를 지키는 중이었다.
주방에서 나온 황민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가, 강진이, 너……! 어, 언제 그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만든 거 냐?!"
"여자 친구 아니에요, 아저씨."
한지윤이 여자 친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직까진 사 귀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강진은 마지못해 부정할 수밖 에 없었다.
"여자 친구가 아니라면 무슨 사인디?"
"그건……."
이강진이 말끝을 흐리는 사이에.
그녀가 스스로 안경을 벗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한지윤이라고 해요."
"한지윤? 가만…… 어디서 본 얼굴인데?"
눈을 가늘게 뜨던 황민수는 그제야 한지윤의 정체를 알아차 렸다.
"장혜미 아니여?"
"네, 맞아요. 호호."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이는 한지윤.
드라마 속 장혜미와는 사뭇 다른 리액션이었다.
꽃잎의 기억에 나오는 장혜미의 성격은 명랑, 쾌활 그 자체다. 친구들 사이에선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는 그런 캐릭터로 나온다.
하지만 한지윤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굉장히 여성스 럽고 얌전하다. 그리고 조용하다.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게 있으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곤 하지.'
이강진이 본 한지윤은 그렇다.
그 점은 장혜미와 닮았다.
뒤늦게 한지윤을 알아본 황민수는 패닉 상태였다.
"하하…… 우리 가게에 연예인이 오다니! 세상에, 이게 꿈인가, 생신가?!"
"현실이에요, 아저씨. 오늘 귀한 손님 오셨으니까 점심밥, 맛 있게 좀 부탁드릴게요."
"우리 가게는 항상 맛있지! 기다려 보더. 기가 막히게 만들어드 릴 테니까. 아가씨, 여기 앉으세요. 여기가 가장 시원하고 좋아 요."
서로를 마주보면서 자리에 앉은 이강진과 한지윤.
처음에는 그녀를 바라식당으로 데려오는 걸 망설였던 이강진 이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아저씨가 저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데려올 걸 그랬 네.'
사실 황민수보다 이강진의 어머니가 더 좋아할 것 같았다.
꽃잎의 기억은 어머니가 최근에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였다. 거기에 출연하는 한지윤과 직접 만난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일 까.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날 때였다.
가게 문이 또 다시 열렸다.
손님인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어머나!"
이강진의 어머니였다.
장을 보고 온 모양인지 양 손에는 채소들이 가득 들려 있었 다.
놀란 건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비번일 아니었어요?"
"그렇긴 한데. 집에 가만히 있기도 심심하고 그래서 그냥 나 왔지. 근데 이 아가씨는 누구니?"
한지윤은 눈치가 빨랐다. 이강진의 어머니임을 바로 알아차 린 모양인지 자리에 일어서서 먼저 살갑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
"안녕하세요. 한지윤이라고 해요, 어머님."
"한지윤? 설마 꽃잎의 기억에 나오는 그 여배우 아닌가요?"
그녀는 곧장 맞다고 대답했다.
황민수와 마찬가지로 이강진의 어머니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게에 연예인이 왔다는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내 아들이 연예인이랑 알고 지낸다니…… 오래 살다보니 참 별일이다 있네."
아들 덕분에 놀라운 일들을 참 많이 겪었으나, 오늘이 단연 최 고였다.
* * *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한지윤은 황민수와 이강진의 어머니에게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두 사람은 한지윤의 애교 있는 모습에 살살 녹는 모습을 보였다.
예쁜데다가 어른들한테 거리감 없이 먼저 다가가기까지 하니 얼마나 귀여울까.
원래 점심 식사는 딱 1 시 반까지만 진행하고 난 후에 다음 장 소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보니 바라식당에서 4시까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겨우 바라식당을 빠져나온 이강진은 한지윤과 디저트 카페에 가서 둘만의 시간을 따로 가졌다.
"죄송합니다, 지윤 씨. 저희 어머니하고 민수 아저씨가 너무 귀찮게 했죠?"
"어머, 아니에요. 오히려 재미있었어요. 두 분 다 좋으신 분들 같아요."
실제로도 좋은 사람들이다. 어디 가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 런 두 사람이라고 이강진은 자부한다.
"강진 씨가 왜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 알 거 같아요."
그를 바라보는 한지윤의 시선은 왠지 모르게 따스한 온기마 저 느껴졌다.
하지만 이강진은 그 말을 부정했다.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군대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강진 씨가 어떻게 비춰지는지 솔직히 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강진 씨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거의 초면에 불과한 저를 많이 도와 주셨잖아요."
그 도움 덕분에 한지윤은 배우계에서 유망주로 평가받는 지 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실력이지만, 처음부터 이강진이 방향성을 제시 해주지 않았더라면 한지윤의 배우 데뷔는 한참 뒤가 되었을 것 이다.
이강진 덕분에 한지윤은 배우로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벌게 되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강진은 은인이다.
이강진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청주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강진 씨에게 받은 은혜, 꼭 갚을 수 있도록 할게요."
그녀의 말에 이강진은 그저 작게 웃었다.
굳이 안 갚아도 된다.
이렇게 둘이서 같이 얼굴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
큰 보답이다.
* * *
한지윤과의 달콤했던 첫 데이트도 어느 새 끝났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어머니로부터 끊 임없는 추궁을 받아야만 했다.
"정말로 사귀는 사이 아니니?"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이일 뿐이에요."
"잘 어울리 던데……."
"엄마는 벌써부터 며느리가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좋지."
이강진의 어머니는 잘못된 부부 생활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 에 이강진만큼은 평온한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한지윤이라면 무조건 오케이다. 이강진의 어머니는 오늘, 그 녀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앞서갔다.
"저하고 지윤 씨는 그런 관계 아니 니까 동네 아주머 니들한테 이상한 소문 내지 마세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이강진은 작은 한 숨을 내쉬었다.
* * *
휴가 복귀일이 다가왔다.
복귀일이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복잡한 기분.
'휴가를 자주 나온다는 건 좋은데, 이 기분을 남들보다는 몇 배를 느껴야 한다는 게 단점이네.'
그래도 휴가를 많이 나오는 게 좋다. 그건 굳이 따져볼 필요 도 없다.
부대 근처에 있는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이강진은 바로 부대 에 전화를 했다.
"충성. 일병 이강진입니다."
-어, 강진이냐.
행정병 정일문 상병이었다.
"저, 곧 부대 복귀하려고 합니다만."
-그래?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너한테 사오라고 할 게 있었 는데.
"그게 뭡니까?"
-스파링, 이번 달 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이번 달에 휴가나갔던 사람이 거의 없더라. 강진이, 너 제외 하고 끽 해봐야 2명밖에 없었어. 그 둘한테도 사오라고 부탁했었는데 갈 때마다 품절이었대. 강진아, 이제 네가 마지막 희망 이다!
졸지에 또 다시 마지막 희망이 되어버린 이강진이었다.
'이거 비슷한 일이 저번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어쩔 수가 없다. 부대에서 스파링 잡지는 정말 귀중한 자원(?) 이다. 안 사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알았다고 대답했다.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
저번에 스파링을 어디서 파는지 봐뒀기에 이번에는 해매지 않 고 바로 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병사 한 명이 이강진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왜 저럴까 싶어서 자세히 쳐다본 결과.
'저 사람, 설마……?'
이상하게 낯이 익은 얼굴이다.
틀림없다. 이전에 단 한 권 남았던 스파링 잡지를 두고 경쟁을 펼쳤던 그 병사였다.
병사는 이강진을 보자마자 스파링 잡지 코너로 냅다 달렸다.
하필이면 이번에도 딱 한 권 남아 있었다.
'질 수 없지!'
이강진의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
다행스럽게도 서점 내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일직선으로 쭉 달려 나가는 이강진.
'달리기에는 자신 있다!'
축구로 단련된 순간 가속을 발동시켰다.
덥석!
재빨리 스파링을 낚아챘다!
'됐어!'
이강진이 또 해냈다!
2전 2승. 이강진의 완벽한 승리다.
병사는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복수심을 활활 불태웠다.
불쌍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부터 살고 봐야지.'
한지윤은 이강진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런 거 보면 내가 꼭 좋은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좋은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 멀은 듯했다.
* * *
위병소를 통과하기 전에 조장실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한다.
간부가 직접 이강진의 몸을 검사했다.
"본부중대에서 몰래 휴대폰 사용하다가 대대장님한테 걸린 적 이 있었거든. 그래서 철저하게 검사하는 거니까 혹시 반입금지 물품 몰래 가져온 거 있으면 미리 이실직고해라.그러면 너희 중 대장님한테까진 말 안 하고 조용히 넘길 테니까."
이건 거짓말이다.
분명 중대장한테 말할 것이다.
이강진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이전에 간부의 말을 믿고 MP3 몰래 가져오려고 했다고 사실 대로 말했던 병사가 있었다. 결과는? 중대장에게 그대로 보고가 들어가게 되어서 휴가 복귀하자마자 바로 군기교육대로 향했다.
간부를 믿으면 바보다.
'애초에 반입금지 물품 가져오지도 않았으니까.'
찔릴 게 없다.
무사히 통과한 뒤에 이강진은 당당하게 1중대 막사로 향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기계음.
소위 떡볶이라 불리는 구형 생활복을 입은 두 남자가 기다란 무언가를 들고 풀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예초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소리뿐만 아니라 진한 풀냄새가 이강진의 코끝을 괴롭혔다.
그 순간 이강진은 깨달았다.
'그 빌어먹을 시기가 또 왔군.'
제초의 계절이 도래했다.
이제는 풀과의 전쟁이다!
< 제31화. 좋은 사람 (2) - 4권 완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