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좋은 사람 (1)
새로 이사온 집으로 향한 이강진.
때마침 어머니가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렴, 강진아."
"다녀왔습니다. 집 깔끔하고 좋은데요?"
"민수 씨 친구 분이 인테리어 쪽에서 일하시 던 분이라고 하더 라. 그분한테 맡기니까 하자 없이 아주 잘 해주셨어. 청소 업체 도 내가 어떻게든 알아보려고 했는데, 거기도 민수 씨 다른 친 구 분 있다고 그쪽에 맡겨달라고 했지."
"민수 아저씨, 의외로 인맥이 좋으시네요."
성격이 좋다보니 괜찮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황민수의 근처 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중 두 명이 이강진, 그리고 그의 어머니일 것이다.
'아니지. 나는 빼야 하나.'
이강진은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할 자신이 없었다.
"저는 2층 사용하면 되나요?"
"그러렴. 그 증 하나 다 사용해도 된단다. 나는 1층하고 바깥 에 화단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집 내부에 1층과 2층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계단이 존재한다. 나이가 좀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2층을 사용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젊은 이강진이 왔다 갔다 해야 하지 않겠나.
2층은 이강진이 사용하던 컴퓨터와 함께 옷들이 각각 다른 방 에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를 드레스 룸으로 사용하라는 뜻이군."
그렇다면 남은 방은 이강진의 작업실로 사용하면 된다.
낡은 노트북과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는 것만 으로도 썰렁함이 밀려왔다.
"일단 데스크톱으로 새로 맞추고. 책상도 거기에 맞게 큰 걸 로 주문하는 게 좋겠지? 듀얼 모니터 쓸 거니까."
주식하는 사람들은 프로그램 창을 여러 개 띄워놓고 그것을 실시간으로 계속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멀티태스킹을 하기 위해서라도 듀얼 모니터는 이강진에겐 필수였다.
2개도 많이 줄인 거다. 예전에는 모니터 4개까지 연결한 적도 있었다.
"이 날씨에 모니터 4개 사용하면 에어컨 계속 풀로 틀어놔야 겠지."
이제 여름이다. 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강진이었기에 적당히 합의를 보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는 책장이다.
주식에 관련된 서적들을 꽂아놓을 책장이 필요하다.
"의자도 새로 바꿔야겠고. 침대도 사야하고."
사야 할 게 너무 많다.
수첩에 구매할 물건들 리스트를 쭉 작성한 이강진은 쓴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얌전히 쇼핑만 해야겠네."
* * *
휴가 이틀째.
아침에 바라 식당으로 간 이강진은 밥을 먹으면서 황민수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이강진이 먼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머니 혼자 이사하게끔 놔뒀으면 저런 퀄리티가 안 나왔을 텐데. 아저씨 덕분에 우리 어머니가 이사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 어요."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인데. 하하!"
"민수 아저씨는 이사 안 가세요?"
황민수가 살고 있는 곳은 가게와 꽤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집이 좋은 편도 아니다. 금방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은 연립 주택에서 살고 있다.
식당을 운영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재산 거의 대부분을 끌 어다 모았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집 한 채 얻지 못하고 아직 도 월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사야 가긴 해야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강진 덕분에 황민수 또한 주식으로 거액을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강진에 비하면 푼돈이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둬들였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가게 매줄보다 높은데, 이 정도면 말 다한 셈이다.
"원하시면 제가 중개사 한 명 추천해드릴까요? 이번에 이사한 곳 추천해준 공인중개사 한 명 있는데, 잘해주더라고요."
"음…… 그럴까?"
"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이사비용이야 이미 MVW로 마련 하셨을 거 아니에요?"
MVW 이야기가 나오자, 황민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 그래도 트리니티 스타 덕분에 요즘 내가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하하하! 설마 했는데 네 말대로 그렇게 빵! 하고 떠버릴 줄 누가 알았겠냐!"
역주행에 성공해 이제는 대한민국 대표 걸그룹이 되어버린 트 리니티 스타.
그녀들의 성공으로 인해 MVW 주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쭉 치솟아 오르는 중이었다.
너무 많이 올라버린 탓에 뒤늦게 발을 담그기에는 많이 늦었 다. 그러나 초기에 MVW 엔터테인먼트 주를 매수한 사람들은 입장이 달랐다.
이강진, 황민수 같은 사람들 말이다.
"하여튼 이 복덩어리 녀석!"
황민수는 한 팔로 이강진을 와락 껴안았다.
그가 보기에는 이강진이 얼마나 복스러워 보일까.
때마침 바라 식당을 자주 애용하는 단골손님들이 얼굴을 비 췄다.
"황 사장, 그 얘는 누구여?"
"설마 우리 몰래 숨겨놓은 아들인감?"
"아따, 아들 잘 키웠네! 얼굴도 잘 생겼고. 듬직하구먼!"
황민수는 이들의 물음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 아들 아니여! 강진이라고 해서……."
자초지좋을 설명하는 황민수.
이강진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황민수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이 계속 바라봤다.
바라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 이강진은 대형 마트에 들려서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왔다.
컴퓨터라든지 모니터, 책장 같은 것들은 인터넷으로 따로 주 문했다.
"내가 휴가 나와 있는 동안에는 다 못 오겠지."
어차피 어머니가 받아주기로 했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추가로 이것저것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에 이강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예, 이강진입니다."
-강진 씨, 저예요.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지윤. 그녀의 전화였다.
-내일 제가 청주로 내려가기로 했잖아요. 어디로 가면 되나 요?
"버스 타고 오실 거죠? 그러면 제가 시외버스터미널로 갈게 황민수에게 차를 잠깐 빌렸다. 그것을 타고 한지윤을 직접 데리고 오면 된다.
'원래 부대에선 휴가 나가 있는 동안에 운전하지 말라고 했었 는데.' 하지만 늘 그렇듯 안 들키면 그만이다.
장소와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이강진과 한지윤.
-그럼 내일 뵐게요.
"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부대 근처에선 그녀와 몇 번 만났던 적은 있었으나.
이강진의 고향, 청주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괜히 긴장되네.'
오늘 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 * *
차를 끌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한 이강진.
수많은 사람들이 터미널 근처에 서성이고 있었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지윤만 바로 포착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지 않을 까?
아니, 그렇지 않다.
오히려 쉬운 일이다.
'저기 있군.'
실제로 이강진은 한지윤이 어디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강진만의 찾는 비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한지윤의 존재감은 빛을 뿜어냈 다.
빼어난 미모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다.
도로변에 차를 잠깐 세워둔 이강진은 한지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혹시 한지윤 씨 아니신가요?"
지나가던 사람 중 한 명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한지윤. 이 이름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돌렸다.
"어머, 진짜 한지윤 씨잖아?!"
"정말로!"
"실물이 훨씬 예쁘네."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여기저기서 한지윤에게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한지윤은 적 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강진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그는 한지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를 뚫으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윤 씨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어 서 가죠."
"앗, 네!"
한지윤은 이강진에게 한 손을 잡힌 채 뒤를 졸졸 따랐다.
사람들은 이강진을 매니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아.'
괜히 스캔들 기사가 터지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차에 올라 타고 나서야 한지윤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 었다.
그러고서 이강진에게 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강진 씨. 저 때문에 많이 당황하셨죠?"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윤 씨가 맨 얼굴로 나오실 줄은 몰랐 어요."
한지윤은 이제 더 이상 일반인이 아니다.
톱스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 진 배우까진 올라섰다.
그래서 이강진은 그녀가 마스크라든지 선글라스, 하다못해 안 경 같이 자신의 얼굴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는 액세서리를 착 용하고 나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지윤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 렸다. 아직도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발생했던 일의 여파가 가 시지 않은 듯했다.
"사람들이 저를 많이 못 알아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간과했던 거 같네요."
꽃잎의 기억은 시청률 28퍼센트를 달리는 인기 드라마로 성 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드라마였기에 주, 조연이 아니더라 도 알아보는 사람들은 많은 편이었다.
심지어 한지윤은 첫 출연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어 순위에 올 릴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꽃잎의 기억에 출연하는 배우 중에서 주, 조연급을 제외하면 한지윤이 가장 유명한 배우일 것 이다.
이강진은 한지윤에게 이런 제안을 건넸다.
"선글라스라도 하나 사러 갈까요?"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네, 부탁할게요."
오자마자 결정된 첫 행선지는 안경원이었다.
* * *
안경원에 간 한지윤은 선글라스 대신 안경을 택했다.
안경을 쓰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졌다. 자세히 한지윤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한지윤이 장혜미로 열연 중인 그 한지윤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할 것 같 았다.
"이걸로 할게요."
안경을 고른 한지윤.
안경 값을 계산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계산해주세요."
이강진이 먼저 카드를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강진 씨. 제가 계산할게요."
"괜찮습니다. 제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래도……."
"드라마로 대박 터뜨리고 난 후에 제가 제대로 된 축하 선물 도 못 드린 거 같아서요. 너무 부담 가지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결국 한지윤은 이강진의 선심을 얌전히 받기로 했다.
안경원을 나온 뒤에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두 사람.
이강진의 예상대로 안경을 쓴 한지윤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 도 없었다.
가끔 한지윤을 힐긋 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대부 분 한지윤의 미모 때문에 보는 부류들이었다.
안경이 한지윤의 정체를 숨겨줄 순 있어도, 그녀의 미모까지 감춰주진 못했다.
다행히도 연예인 한지윤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직까진 없어 보였다.
차에 오르자마자 이강진은 한지윤에게 점심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갈까 하는데, 드시고 싶으신 거 있나요?"
스테이크? 초밥? 킹크랩?
어느 메뉴를 선택해도 상관없다.
오늘을 위해 이강진은 청주에 있는 맛집들을 종류별로 다 머릿속에 입력하고 왔다. 이거 먹고 싶다고 하면 이 가게가 바로 입으로 튀어나올 만큼 연습도 많이 해뒀다.
하지만 한지윤이 고른 건 이강진조차 예상 못했던 것이었다.
"강진 씨가 자주 드시는 거 먹으러 가요."
"제가요?"
"네. 평소에는 뭐 드세요?"
짬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부대로 다시 들어가야 할 판이니까.
"집에서 먹는 거 제외하면…… 바라식당이라는 한식 가게에 가 서 먹습니다만."
"그럼 거기 가요!"
앗자 싶은 생각이 든 이강진.
자신도 모르게 바라식당을 말하고 말았다.
'괜히 말했나.'
진짜로 한지윤을 바라식당으로 데리고 가야 하나?
청주에서 펼치는 그녀와의 데이트는 시작부터 난관이다.
< 제31화. 좋은 사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