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드라마 속의 그녀 (2)
종교행사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여성, 한지윤.
그랬던 그녀가…….
"고, 공중파 드라마에 나온다고?!"
전마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일주도 마찬가지 였다. 종교행 사에서 계속 불교를 택했던 서일주조차 한지윤이 누군지 안다. 그 정도로 그녀는 1075 대대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아니, 목사님 따님이 왜 드라마에 출연합니까?"
"낸들 아냐."
서일주와 전마등은 당연히 내막을 모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사람은 병사들 중에선 단 한 명 뿌이강진밖에 없다.
"근데 강진이, 너는 지윤 씨가 드라마 나온다는 거, 어떻게 알 았냐? 네가 말하는 거 보니까,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어투 같이 들렸는데."
"저번에 지윤 씨가 드라마 오디션을 봐서 합격했었다고 저한 테 슬쩍 말해줬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해서 여태껏 비밀로 했었습니다."
"헐, 그래?"
이번에는 서일주가 물었다.
"지윤 씨가 왜 너한테만 알려준 거냐? 우리한테도 알려주면 좋잖아."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이강진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얼버무렸다.
"저번에 지윤 씨의 레포트 연구를 도와주다가 우연히 알게 되 었습니다."
"흠…… 그러냐."
예전부터 이강진과 한지윤의 관계를 의심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의심이 확신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군인 주제에 지윤 씨 같은 여자와 정말로 사귀게 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 못하고 있겠지.'
물론 이강진도 과한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전역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전역하고 나면 이강진은 한지윤에게 당당히 자신의 마음을 표 현할 것이다.
돈, 그리고 사랑.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쟁취한다! 이것이 이강진의 목적이다.
한지윤이 드라마에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기 시 작했다.
휴게실에서 FIFA 대결을 펼치던 라인혁과 백우호, 구경하던 고필증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중대원들이 티비 앞에 모여들었다.
"헐, 진짜네?"
"지윤 씨를 설마 티비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근데 지윤 씨, 화면빨 잘 받는 거 같지 않습니까?"
"실물이 헐씬 더 예쁘지, 무슨 소리냐."
그 부분은 이강진도 동의한다.
한지윤은 실물이 예쁘다. 카메라가 한지윤의 미모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점이 다행이었다. 한지윤이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보다 미모로 더 주목받게 된다면, 오히려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주연은 어디까지나 남주인공 과 여주인공, 이렇게 둘이다. 어쩌면 드라마 제작진도 그걸 염 두하고 일부러 한지윤의 존재감을 조금 희석시킨 것일지도 모 른다.
화장실로 향하던 통신반장이 때마침 1 생활관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티비 앞에 모여서 수군거리는 병사들의 모습에 절로 관심이 향했다.
보통 이들이 저렇게 모여 있을 때에는 하나밖에 없다.
"걸그룹이라도 나왔냐? 트리니티 스타? 요즘 역주행 중이라 더라. 노래 좋던데."
"충성. 새로 방영 중인 드라마 보고 있었습니다."
"응? 드라마?"
통신반장이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걸그룹 무대라면 같이 보려고 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뭔 드라마길래 다들 혈안이 되어서 보고 있냐."
"통신반장님, 모르셨습니까?"
전마등이 티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지금 지윤 씨, 티비에 나오고 있습니다."
"엥? 정말?"
간부들도 한지윤의 존재를 알고 있다.
몇몇은 한지윤에게 사귀자고 고백했다가 차인 적도 있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간부들 사이에서도 인기 절정인 한지윤. 그 녀의 티비 출연 소식에 통신반장은 대략 정신이 멍했다.
마침 한지윤이 출연하는 파트가 나오고 있었다.
통신반장은 처음엔 전마등이 거짓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왜 지윤 씨가 드라마에 나오는데?"
"그게 말입니다……."
전마등은 이강진에게 들었던 내막을 통신반장에게도 공유했 다. 그제야 한지윤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과정을 알게 된 통 신반장.
이유를 알았다고 해도 신기한 건 변함이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인사를 주고받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연예인이 된 것이다. 그것 도 소리 소문 없이. 안 신기한 게 이상하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어플을 실행한 통신반장은 혀를 내둘렀
"이야. 지윤 씨, 인기 좋네. 검색어에 이름도 올랐어."
"정말입니까?!"
병사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잔뜩 흥분했다.
인기 검색어 9위에 한지윤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당당하게 랭 크되어 있었다.
연기를 잘하는데다가 미모까지 뛰어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 스럽게 대중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이강진은 한지윤이 미래의 톱스타가 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성장세가 이렇게까지 기세등등할 줄은 예상 못했다.
'역시 지윤 씨는 대단해.'
회귀하기 이전이었더라면 이강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부 쩍 가까워졌다.
'그러고 보니 다음 휴가 때 언제 만날지도 정해야 하는데.'
휴가를 언제 나갈지. 거의 이것과 동급이라고 할 정도로 행복 한 고민이다.
드라마 촬영 때문에 한동안 한지윤은 종교행사에 참여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강진은 꾸준히 기독교 종교행사에 참가했다.
사실 다른 종교에 참가해도 크게 문제는 없다. 한지윤도 '강 진 씨가 가고 싶은 곳 있으면 가셔도 좋아요.'라고 말을 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목사의 딸이긴 하지만, 한지윤은 그렇게까지 열렬한 기 독교 신자가 아니다. 거의 무교 성향에 가까웠다. 그래서 딱히 기독교에만 계속 나와야 한다는 편견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뭐랄까.
다른 종교행사를 택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냥 익숙한 곳 계속 가는 게 좋지.'
낯선 곳에 가면 집중도 안 되고. 오히려 불편하기만 하다.
새롭게 당직사병 로테이션에 추가된 안준렬이 사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원 다 파악했으면 최고선임자가 나와서 병력들 인솔해주 시기 바랍니다."
"오케이."
기독교 쪽은 라인혁이 최고 선임자였다.
병장 정도 되면 종교행사는 자체 열외다. 그러다 보니 상병 계 급이 죄고선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갓!"
왼발, 왼발, 왼발.
부대 내에 위치한 교회로 이동을 개시하는 병력들.
그때였다. 갑자기 백우호가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저 사람, 지윤 씨 아니야?"
"어디, 어디!"
"엇, 정말이잖아?!"
한지윤이 교회에 나왔다!
드라마 때문에 한창 바쁠 그녀가 왜 여기에? 병사들은 일시 적으로 패닉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윤 씨!"
"드라마 잘 봤습니다!"
"연예인 다 되셨던데요? 축하드려요!"
한지윤에게 축하의 말을 전달하는 병력들. 그녀는 환하게 웃 는 표정으로 이들의 축하 말을 일일이 다 받아줬다.
"고마워요. 드라마는 첫 출연이어서 많이 긴장했는데…… 잘 나왔나 모르겠어요."
"엄청 잘 나왔습니다. 최고였어요, 최고!"
"드라마 제목이 '꽃잎의 기억'이었죠? 무조건 챙겨보겠습니
"지윤 씨, 파이 팅! 언제나 응원할게요!"
"호호호, 고마워요."
1075 대대 전체의 응원을 받는 한지윤.
병사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슬금슬금 한지윤의 유명세 가 퍼지기 시작했다.
교회로 향하는 병사들 무리에서 한지윤은 절묘하게 이강진을 포착했다.
"강진 씨!"
그녀가 먼저 이강진을 불렀다.
이강진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 그것을 눈치 챈 건 바로 라인혁이었다.
"강진아."
"이병 이강진."
"담배나 피우고 들어 가자. 나머지는 교회에 들어 가 앉아 있어라."
라인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이강진은 비흡연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담배라니?
병력들을 먼저 교회로 들여보낸 뒤. 라인혁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줬다.
"강진아. 너, 나한테 빚진 거다."
그제야 라인혁이 왜 이강진만 따로 이곳에 남기게끔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지윤과 둘이서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다.
교회 입구에 졸지에 둘만 남게 된 이강진과 한지윤.
이강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드라마 잘 봤습니다. 연기 잘하시더라고요."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처음이라서 엄청 긴장한 나머 지 NG를 몇 번이나 내고 말았거든요. 그것 때문에 거의 울 뻔했 어요."
"처음에는 다 그렇죠."
아무리 연기 천재라 하더라도 처음은 늘 긴장되고 실수하게 마련이다. 한지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험이 계속 반복될수록 그녀는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로 성장하리라.
한지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이강진은 그녀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솔직히 지윤 씨가 종교행사에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드라 마 일정 때문에 많이 바쁘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일정이 없을 때에는 가급적이면 이렇게 나와서 아빠를 도와 드리려고요. 혼자 이것저것 준비하시려면 많이 바쁘실 테니까 요."
"저도 도와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강진도 한지윤 부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한지윤과 관계도 발전시키고. 겸사겸사 해서 장인 어른 되실 분에게 일찌감치 점수도 따두고. 일석이조 아니겠나.
하지만 이강진은 군인이다. 신분이 자유롭지 않기에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아니지.'
아무리 자유도가 낮은 군대라 하더라도 찾다보면 길이 열리 는 법.
'방법이 없진 않아.'
다만, 여태껏 시도해본 적은 없는 방법이었다.
잘만 된다면…….
'지윤 씨와 주말마다 만날 수 있어!'
사랑하는 여자를 최소 1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날 수 있다는데, 그것만으로도 도전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이강진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새겨졌다.
'해보자!'
벌써부터 머릿속이 바빠졌다.
일요일 저녁.
병사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휴일의 마지막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박격포반도 마찬가지였다.
연대장의 기습 순찰 사건 때 이강진과 함께 포상휴가를 받았 던 남자, 추민복 상병.
그는 자신의 분대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헬스 갈 사람!"
"없어. 없으니까 꺼져라."
박격포반의 최고선임, 오인섭이 추민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지 마시고 오인섭 병장님도 저랑 같이 헬스장 가시면 어떻습니까? 전역까지 얼마 안 남으셨는데, 사회로 나가기 전에 몸 만들고 나가시면 여자들이 좋아할 겁니다."
"얌마. 복학생 타이틀을 단 시점부터 이미 틀린 거야. 여자는 개뿔. 난 그냥 놀다가 전역하련다."
한가하게 티비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오인섭.
때마침 누군가가 오인섭을 찾아왔다.
"충성. 이병 이강진입니다. 오인섭 병장님, 1부소대장님이 찾 으십니다."
"그래? 알았어. 잠깐만."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생활관을 나섰다. 누가 봐도 말년병장 이라는 티가 팍팍 났다.
멀어지는 오인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강진의 눈은 어느새 날카로워졌다.
1중대 유일의 기독교 군종병, 오인섭 병장.
그가 이강진의 새로운 먹잇감이다.
< 제26화 드라마 속의 그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