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유격 훈련 (1)
"유격 조교 말씀이십니까?"
"그래."
다시 한 번 이강진이 들은 게 맞음을 확인시켜주는 중대장이 었다.
유격 조교 제안이 들어올 줄은 미처 예상 못했다.
'하긴. 훈련소 조교 제안도 받았었는데. 유격 조교 제안을 못 받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그래도 이 제안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어쩌면 훈련소 조교 제 안보다도 더.
이유가 있었다.
"아직 전 이등병입니다. 유격 조교를 하기에는 좀……."
"원래는 선임급들만 시켰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다른 부대에 서 이런 내용의 마음의 편지가 접수되었더라. 왜 선임급들에게 만 유격 조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냐고. 그게 연대장님 귀에 들어가게 된 거지."
그 다음부턴 굳이 중대장이 말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부 입장에서 병사가 쓴 마음의 편지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러다가 괜히 부대에 사고라도 터진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마음의 편지를 확인했으면, 적어도 병사의 환경 처우를 개선 해주려고 하는 노력 정도는 보여야 한다.
그래서 연대장은 각 부대에게 이런 지침을 내렸다.
후임급들에게도 유격 조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즉, 계급별 할당제다.
"이등병 중에서도 조교를 한 명 苦아야 할 거 같다 보니 이렇게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된 거다. 행보관님을 비롯해서 다른 간부들한테 이등병 중에서 유격 조교 시키면 잘할 거 같은 병사가 누구인지 물어보니까 전부가 다 너를 추천하더구나. 원래는 좀 더 일찍 너한테 이야기해주고 싶었는데, 마침 네가 휴가를 나가 있어서 이제야 이야기를 한 거야."
이강진이 휴가를 나간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이런 건 백우호도 몰랐을 거다.
그리고 부대에서 문제가 터진 것도 아니 니까.
그냥 유격 조교 제안일 뿐이다.
"어떠냐. 해볼 생각 있으면 이 중대장한테 말해라. 단, 시간이 얼마 없으니 가급적이면 여기서 바로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구나."
이강진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유격 조교를 빨리 뽑아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유격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조교로 선줄된 인원들은 다른 병사들보다 1주 빨리 유격장에 입소한다. 그곳에서 조교 교육을 받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최대한 빨리 유격 조교로 파견을 보 낼 병사들을 선줄해서 명단을 작성해야 한다.
유격 조교가 되면 몇 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첫 번째.
대놓고 병사들을 굴릴 수 있다.
조교의 말 한 마디 면 병사들은 진흙 바닥을 온 몸으로 뒹굴어 야 한다. 이등병인데도 불구하고 상병, 병장들을 마음껏 괴롭힐 수 있다는 뜻이다.
며칠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일시적으로나마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바로 휴가다.
이게 가장 크다.
유격 조교를 맡으면, 3박 4일의 휴가를 받을 수 있다. 3박 4일 이면 단독으로 사용해도 좋고, 정기휴가나 아니면 다른 포상휴 가에 붙여서 사용해도 좋다.
장점이 2개나 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점은 사실 이점이라고 볼 수가 없다. 유격장에서 벗어나고 나면, 자신이 괴롭힌 만큼 분명 그에 따른…… 아니, 어쩌 면 그 배 이상 가능 보복이 올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가 짬이 된 상태에서 간다면 모를까.'
이등병인 채 조교를 해봤자 결국 훗날 때문에 선임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휴가 하나만 보고 가는 거다.
'어쩌 면 좋지?'
고민의 시간은 길어졌다.
중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간을 좀 줄까?"
마침 잘 됐다.
"1 시간만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1 시간이라…… 좋지. 오늘은 나도 어디 안 가고 계속 부대에 있을 테니까 생각이 정리되거든 와서 내게 부담 없이 말해라."
"예, 알겠습니다."
이건 고민을 좀 해볼 만한다.
이강진이 중대장에게 잠시 불려간 사이에 축구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결국 꾀병이라는 게 들통 나게 된 고필중은 붕대를 풀고서 병사들과 함께 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를 본 이강진은 웃음을 삼켰다.
'잘 뛰네.'
그동안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거 렸을까.
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발 부상으로 잘하면 유격 한 번 짬처리 시킬 수 있었을 텐데.
완쾌된 시기가 참으로 아쉬웠다.
그래도 중대 ATT, 그리고 무박 3일 훈련 열외 되었으면 충분 히 뽕은 뽑았다.
뒤늦게 이강진의 모습을 확인한 라인혁.
"강진이 왔냐?"
"예. 저는 어느 팀으로 들어가면 됩니까?"
"저기 전마등 병장님 있는 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알겠습니다."
1중대 에이스답게 이강진이 경기에 투입되자마자 스코어는 금세 역전되었다.
전(前) 에이스였던 고필중조차 이강진의 화려한 드리블을 막을 순 없었다.
결정적인 골 찬스가 몇 번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이 기 회를 전마등을 비롯해 선임들에게 고루고루 양보했다.
이강진이 기록한 골은 0골이었지만, 어시스트는 두 자리에 달 했다.
이러니 선임들이 이강진을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경기가 종료된 뒤. 이강진과 함께 뛴 멤버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아싸, 이겼다!"
"역시 강진이밖에 없다니까!"
모두가 와서 이강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나 이강진은 기쁘지 않았다.
공을 차는 내내 이강진은 유격 조교에 대해 생각했다.
'결정을 내릴 수가 없네.'
축구와 다르게 유격 조교 제안은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직접 슈팅을 때릴까?
아니면 다른 병사한테 패스해서 기회를 양보할까?
이런 고민이 깊어지던 찰나였다.
후임들과 대화를 나누는 전마등의 말이 이강진의 귓가로 날 아와 매섭게 꽂혔다.
"유격왕 말고 축구왕 이런 거 있으면 좋을 텐데. 휴가 달려 있 으면 목숨 걸고 할 자신 있는데 말이야."
다른 후임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전마등 병장님, 축구왕 생긴다고 전마등 병장님이 반드시 축구왕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축구왕이 아니라 축구내시나 축구졸개 정도 되 는 거 같습니다."
"뭐 임마? 짜식들이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냐?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이라고!"
으름장을 늘어놓는 전마등.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강진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마등 병장님!"
갑자기 전 마등을 부르는 이강진.
"응? 왜."
"이번 유격 훈련에도 유격왕 뽑습니까?"
"유격왕? 어. 뽑는다고 하더라."
이강진의 귀를 사로잡은 건 축구왕이라는 단어가 아니었다.
유격왕이었다.
'그래, 그게 있었어!'
슈팅인, 패스냐.
이강진이 택한 것은 바로…….
* * *
중대장을 찾은 이강진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겠습니다."
중대장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유격 조교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휴가에 욕심이 많은 이강진이라면 분명 유격 조교를 하겠다 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정 반대의 답변을 내놓았다.
이쯤 되면 이유가 궁금했다.
"왜 거절하는지 모르겠군. 무엇 때문인지? 너한테는 좋은 기 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강진은 중대장의 궁금증을 말끔하게 해결해줬다.
"유격 조교보다 유격왕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유격왕!
유격 훈련을 가장 잘 소화한 병사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칭 호로, 유격왕에 선정되면 엄청난 상이 뒤따른다.
바로 4박 5일 포상휴가다.
생각해보면 참 단순한 계산법이다. 유격 조교로 가서 3박 4일 포상휴가를 따느니, 차라리 유격왕이 되어서 4박 5일 포상휴가 를 받는 게 더 이득이지 않은가.
하루 차이지만, 그 하루 차이로 벌 수 있는 돈의 액수는 어마 어마하다.
주식으로 단타만 해도 수천만 원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이 거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유격 조교 한 번 해보겠 다는 욕심 때문에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중대장은 이강진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격왕 차지하는 게 정말 힘든 일인데. 차라리 조교해서 3박 4일 휴가를 확정적으로 받아가는 게 더 이득 아닌가?"
"저는 자신 있습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면, 1일이라는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이런 모험은 주식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해오던 것이다. 이것이 이강진의 길이자 방식이다.
결국 중대장은 백기를 들기로 했다.
"좋다. 결정은 어차피 본인이 하는 거니까. 알았다. 그럼 다른 병사한테 넘기도록 하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천만에. 그리고 네 말마따나 우리 중대에서 정말로 유격왕이 나온다면 나야 좋지."
최근 1 중대에서 유격왕이 나온 적이 없었다. 1 중대가 유독 유 격 훈련에 약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유격왕의 칭호를 1중대가 다시 가져올 필요가 있다.
"힘내라, 강진아. 이 중대장은 너를 응원하마."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중대장에게 이렇게까지 말을 했으니…….
'유격왕은 무조건 내가 가져와야 한다!'
이것이 이강진의 출사표(出師表)다.
이강진이 거절했던 유격 조교 자리는 3분대에 소속되어 있는 서환묵 이병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1분대에선 안준렬이 유격 조교로 선줄되었다.
유격 조교 훈련을 받기 위해 다른 병사들보다 먼저 유격장으 로 떠날 준비를 하는 안준렬.
그는 라인혁을 따로 불렀다.
"인혁아. 네가 부분대장이니까 나 없는 동안 애들 잘 부탁한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가. 그리고 나하고 우리 1분대 사람들 만나게 되면 살살 좀 굴려주고."
"노력해 볼게."
안준렬이 떠난 이후.
남은 병사들의 체력단련 훈련은 여전히 계속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D-1.
유격 훈련이 시작되기까지 딱 하루 남았다.
일요일 오전에 이강진은 한지윤이 없는 종교행사를 마치고 막 사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아무리 이강진이라도 유격 훈련은 빡셀 수밖에 없다.
그전에 마지막 휴식을 충분히 즐겨두는 것도 유격을 대비하 는 하나의 방법이다.
유격 훈련 일자가 다가올수록 전마등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다.
"말년에 유격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고필중도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발 좀 더 심하게 다칠 걸. 젠장!"
말도 안 되는 후회를 하는 고필중이었다. 그만큼 병사들에게 있어서 유격 훈련이란 이름의 산은 굉장히 험하고 높았다.
유격을 이미 한 번 치룬 선임급들은 그 고통의 세기를 알기에 괴롭고, 유격에 대해 전혀 모르는 후임급들은 미지의 공포로 인 해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거꾸로 걸어도 돌아가는 게 국방부 시계 아닌가.
결국 이들이 싫어하는 유격 훈련의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 점호를 마친 후에 식사를 끝내고 완전군장을 꾸리기 시 작하는 병사들.
오전 10시에 맞춰서 1075 대대 전 병력이 본부 연병장에 집 합했다.
"부대, 차렷!"
1중대장의 외침에 병력들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단상에 오른 대대장이 마이크를 들었다.
"금일부로 유격 훈련이 시작된다. 낙오 없이, 그리고 사고 없이 무사히 유격 훈련에 임할 수 있도록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 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각 중대장들은 부대 이끌고 바로 입소 행군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 실시!"
"실시!"
본부 중대부터 위병소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격이라는 이름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 제25화. 유격 훈련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