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화. 이등별님 오셨다 (4) >
제23화 이등별님 오셨다 (4)
황지웅과 함께 공중전화 박스가 있는 곳으로 향한 기운상. 간만에 어머니와 누나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전화박스가 비자마자 황지웅은 기운상에게 손짓했다.
"들어가서 통화 해."
"황지웅 일병님부터 먼저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 아니야! 난 괜찮아."
이등별님부터 먼저 하라고 순서를 양보하려고 했다.
때마침 옆 전화박스에 자리가 생겼다.
"나는 저기서 통화하고 있을게!"
후다닥. 먼저 전화박스로 들어가 버리는 황지웅이었다.
카드를 꺼낸 뒤에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 황지웅은 바로 러브러브 모드로 전환되었다.
몰랐던 황지웅의 새로운 일면을 보게 된 기운상은 쓴 웃음을 삼키 면서 공중전화박스 안으로 향했다.
주머 니 속에서 전화카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이강진이 PX 가서 사준 전화카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운상은 수신자 부담 서비스를 이 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강진이 아직 기운상에게 전화카드 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PX에 간 김에 그에게 새로운 전화카드를 사주게 되었다.
이강진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유일한 선임이기도 했지만, 동 시에 기운상에게 신경을 가장 많이 쓰는 선임이기도 했다.
전화카드를 슬라이드 형식으로 긁은 후에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운상이니?
모르는 번호임에도 불구하고 기운상의 누나는 단번에 그임을 알아차렸다.
"어, 나야. 그동안 집 안에 별 일 없지?"
-녈 일이 왜 없어. 너 없는 사이에 엄마하고 아빠하고 엄청 싸 웠는데.
"싸웠다고? 왜?"
한숨을 푹 내쉰 기운상의 누나는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면회 때문에.
기운상은 어제 가족들과의 통화에서 이번 주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에 날을 잡아서 그의 어머니와 누나가 같이 이곳에 면회 를 오겠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다.
오늘 누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날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 다.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를 알아야 전마등에게 면회 사실을 알 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면회 가지고 싸울 일이 있어?"
-너, 아빠한테 연락도 하지 말라고 큰소리 치고 입대했잖아.
"그야…… 그렇지."
-그래서 아빠도 너한테 일부러 그동안 연락 안 했던 거야. 근 데 엄마는 생각이 좀 다른 거 같더라. 그래도 부자지간인데, 평 생 얼굴 안 보고 살 거나고 어제 저녁에 엄청 폭발하셨어. 엄마 성격, 너도 알지?
"알다마다."
기운상의 어머니가 받는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아 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운상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오해가 쌓이고 쌓이다보니 결국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빠도 면회 때 같이 갈 거 같아.
역시나.
기운상은 왠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줄 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넌 괜찮지?
"어쩔 수 없지. 엄마가 그렇게 화를 낼 정도인데."
-그래. 잘 생각했어. 이번 주 토요일에 아빠차타고 같이 가기 로 했으니까 부대에 그렇게 전해둬. 알았지?
"응, 알았어."
-그럼 토요일에 보너.
통화를 마치자마자 기운상은 뒤늦게 알아차린 게 있었다.
"아버지가 오신다고 한다면…… 분명 부대가 뒤집어질 텐데."
기운상이 굳이 말 안 해도 이미 뒤집어진지 오래다.
투스타가 이곳, 1075 대대를 방문한다!
이 사실을 접한 전마등은 결산 회의를 마치자마자 1생활관으 로 복귀해서 이런 소감을 남겼다.
"애들아, 우리, 좆됐다!"
임팩트 있는 그의 외침.
걸그룹 무대를 보면서 낄낄대고 있던 1분대원들은 전마등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전마등 병장님?"
"당직사관님이 뭐 이상한 거라도 시켰습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당직사관님, 소대장님 아닙니까?"
"소대장님이라면 이상한 거 시키고도 남을 분이지."
대청소만 아니면 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이건 대청소를 뛰어 넘는 사건이다.
"운상이 어디 있냐?"
백우호가 그의 말에 바로 대답했다.
"황지웅 일병하고 같이 전화 통화하러 갔습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네."
기운상이 이 자리에 없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운상이네 아버님께서 이번 주 토요일에 우리 부대를 방문한 다고 한다."
……."
1분대원들은 마치 메두사에 의해 돌덩이로 변해버린 것처럼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이 굳어져버 렸다.
30초간의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이게 지독한 악몽이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고필중이 아주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전마등 병장님, 저희 늘리려고 일부 러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미쳤냐? 니들 놀려먹어봤자 무슨 재미가 있다고. 오늘 결산 회의 날 아닌데 회의했던 거, 기억하지? 운상이 아버님 오신다 는 것 때문에 행보관님이 급하게 회의 소집한 거였다고 하시더 라."
"……."
"……."
악몽도 이런 악몽이 또 없다.
"아마 운상이가 전화 끝나고 생활관으로 복귀하면 말해줄 거 다. 토요일날 운상이 가족분들 다 이곳에 오실 거라고.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투스타 아버 님도 오신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때마침 이강진이 외곽근무에서 복귀했다.
그는 생활관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감지해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공기가 무겁다.
혹시 사건이라도 터졌나?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사건이 안 터지면, 그건 군생활이 아니다. 자잘한 거라도 무 조건 사건이 터지는 게 바로 군생활이다.
백우호가 울상을 지었다.
"강진아. 우리, 좆됐어."
"왜. 이유라도 말해줘야 할 거 아니냐."
"운상이 아버 님 오신단다."
투스타가 온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무덤 덤 했다.
"아, 그래?"
분대원들은 오히려 이강진의 반응이 더 신기했다.
기운상의 아버지가 온다면, 가장 위험한 게 사실 이강진이다. 기운상이 실수를 할 때마다 바로 갈굼 타임을 선사했던 게 바로 이강진 아닌가. 투스타 아버지가 왔을 때 기운상이 한 마디라도 하는 순간, 이강진은 최소 영창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태연하게 이 사태를 받아들였다.
"강진아. 너, 머리 괜찮지?"
"남의 머리 상태는 왜 물어봐 멀쩡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아니, 투스타가 온다는데 리액션이 왜 그래?"
이강진의 대답은 간단했다.
"한 번은 오실 줄 알았으니까."
솔직히 기운상의 아버지가 투스타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병사들은 내심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아, 조만간 우리 부대에 투스타 한 번 강림하겠구나.
자신의 아들이 앞으로 2년 가까이 생활할 부대 아닌가. 특히 나 군대에 현역으로 종사 중인 아버지가 있다면, 당연히 그 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질 것이다.
게다가 영관급도 아닌 장성급 계급을 가지고 있다. 마음만 먹 으면 언제든 타 부대에 방문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아무리 아들과 사이가 안 좋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이라 도 부대에 얼굴을 안 비춘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그냥 예상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강진은 그렇게 인식했 다. 그래서 이런 리액션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숨 나오는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투스타가 온다는데, 대대장이 가만히 있을까?
천만에.
'오늘부터 청소 지옥이겠군.'
안 봐도 뻔하다.
* * *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
많이 잡아봤자 4일 남짓.
그 안에 병사들에게 미션이 주어졌다.
사열대 앞에 집합하게 된 1중대 인원들.
행보관의 목소리가 유달리 날카로웠다.
"다들 주목!"
"주목!"
"오늘은 작업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무조건 청소한다. 물청소, 일광건조는 기본이고, 화장실까지 곰팡이, 먼지 하나 안 나오게 싹 다 청소해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투스타가 온다는데, 청소를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영혼을 담아 먼지 한 톨 안 나오게 청소해야 한다!
인원을 빠르게 분배시킨 행보관이 추가로 말을 전달했다.
"분대장들은 행정반으로 집합해라. 분대장 수첩 가져올 필요 없이 몸만 오면 된다. 간단한 이야기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지금으로선 당장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분대장들을 행보관실로 따로 집합시킨 행보관은 맨 뒤에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문 확실히 닫았냐."
"예, 그렇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목을 가다듬은 행보관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소장님은 우리 대대의 위생 상태라든지 보급품 지급 현황, 경 계근무 상태 파악 등을 위해 오시는 게 아니다.
검열이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을 면회 오시는 거니 까 일단 1차적으로 그걸 항상 염두하고 있어라.
그리고 분대원 들한테 똑바로 전해둬. 이런 걸로 괜히 운상이 탓하지 말라고. 그저 아버지께서 군 간부이신 것뿐이야. 아들 얼굴 보러 아버지 가 오고 싶다는데. 이거 가지고 운상이를 탓할 수는 없잖아. 안 그러냐."
"예, 맞습니다!"
"특히 마등이, 네가 운상이 잘 신경 써줘라. 괜히 자기 때문에 선임들을 청소로 고생시키는 거 아닌가 하고 불안해 할 거야. 그 런 거 절대로 아니라고 잘 다독여줘라."
"예, 알겠습니다!"
행보관의 말이 맞다.
오히려 기운상은 아버지에게 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러나 개 인사정상 가족들이 다 같이 오게 된 걸 가지고 괜히 기운상의 잘못으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이건 그저 면회다. 면히!
이렇게 스스로 최면을 걸 수밖에 없었다.
청소는 금요일까지 계속 되었다.
쓸고, 닦고, 문지르고.
청소를 진행하면서 백우호는 새롭게 깨달은 게 있었다.
"나는 치약이 이렇게 만능인지 몰랐어. 치약 하나로 청소를 다 해결할 수 있다니. 진짜 놀랍다, 놀라워."
이강진은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치약이 놀라운 게 아니라 군대라는 집단이 놀라운 거겠지."
제대로 된 청소 도구 하나 없기에 가지고 있는 보급품, 그리 고 노동력으로 때워야만 했다.
칫솔 하나와 치약 하나를 들고 화장실 전체를 청소할 때가 힘 든 구간의 정점이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다 해결하긴 했다.
이걸 다 해냈다는 것에 병사들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대망의 토요일 아침 해가 밝았다. 예정되어 있는 면회 시간은 오전 10시.
라인혁과 안준렬은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막사로 올라와서 기운상의 A급 전투화 광을 내주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지나가던 날파리가 전투화 끝에 앉았다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 끈하게 손질을 해뒀다.
선임들이 손질해준 A급 전투화와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기운 상.
같은 분대 최고선임인 전마등도 면회실로 내려갈 예정이었기 에 A급 전투복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기운상을 데리고 행정반으로 향한 전마등.
그곳에는 중대장과 행보관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를 고쳐 쓴 중대장이 전마등과 기운상에게 말했다.
"대대장님은 미리 면회실로 내려가셨다. 우리만 가면 될 거다."
"예, 알겠습니다."
이들은 잠시 후.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가자!"
"예!"
1075 대대의 운명을 결정지을 면회가 시작되었다.
< 제23화. 이등별님 오셨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