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이등별님 오셨다 (3)
잘못을 했으면 쓴 소리를 듣는 게 맞다.
아니, 쓴 소리 정도면 많이 봐준 거다. 원래는 바로 갈굼이 튀 어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기운상 앞에서는 그런 법칙이 무효했다.
언제 투스타가 이 부대에 강림할지 모르니까.
그러나 이강진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이등병이 다른 선임들보다 먼저 행동 하고 빠릿빠릿해야 한다는 건 기본 상식이잖아. 근데 그걸 몰 라? 그리고 나오기 전에 보니까 모포도 대충 접어놨더라? 신발 정리도 전혀 안 되어 있고. 어제 분명 뒷정리 잘하고 다니라고 말해줬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졸음에 취해 있던 기운상이었으나. 이강진의 말에 잠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내일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기운상의 목소리.
그럴수록 1분대원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백우호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강진이, 너 미쳤어기 운상이한테 왜 그래!"
"왜 그러나니. 혼날 만한 짓을 했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주의 를 준 거잖아. 너, 기억 안 나냐? 우리 대기기간 때, 네가 모포 안 접어놓고 나와서 황지웅 일병 님하고 서일주 이 병님한테 갈굼 엄 청 받았던 거. 그때랑 똑같잖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이것도 전마등 병장님이 최대한 많이 봐주라고 해서 딱 여기 까지만 말한 거야. 그거 아니었으면 점호 끝나고 바로 나 따라 오라고 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백우호는 투스타의 아들한테 도저히 목소리를 높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운상을 대할 때 조심하긴 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잘못한 게 있으면 주의를 주는 게 맞다. 전마등뿐만 아니라 다른 선임급 병사들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하고 싶진 않았다.
그만큼 기운상은 무서운 존재였다.
누가 먼저 회초리를 들까.
아니, 과연 들 수나 있을까?
초미의 관심사였던 이 문제는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해결 되었다.
투스타의 아들에게 회초리를 먼저 든 자.
그의 이름은 이강진이다.
오전 9시.
슬슬 당직 근무 교대 시간이다.
어제 통신반장에게 붙잡혀 새벽 내내 말상대가 되어줘야 했던 마인정 상병은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다음 당직 근무 교대자인 안준렬에게 완장을 넘겼다.
"고생했다, 인정아. 통신반장님 상대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도 마라. 진짜 고생했어. 내 스스로가 기특할 정도야. 아무 튼 난 빨리 샤워하고 자야겠다."
"그래라. 아, 보일러병이 뜨거운 물 안 나온다고 해서 너희 분 대 후임들이 샤워실에 온수 따로 받아놨다고 전해달라고 하더 라. 샤워할 때 그거 쓰면 된대."
"알았어. 땡큐!"
따스한 온수 샤워로 쌓인 피로를 녹이고 모포를 뒤집어쓴 채 꿈나라로 향한다. 이 얼마나 행복한 계획이란 말인가.
그 생각만으로도 마인정은 벌써 구름 위를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 위에 액상 샴푸를 뿌린 뒤에 팬티 차림으로 빠르게 샤워 실을 향해 돌진했다.
문을 여는 순간.
마인정은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엥?"
대야에 담겨져 있는 물이 사라진 것이다.
"뭐야. 왜 없어?"
혹시나 했지만 샤워기에는 찬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온수 샤워가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 마인정의 화는 머리끝까 지 치밀어 올랐다.
"어떤 미친 녀석이 당직 근무자 사용하라고 받아놓은 온수를 멋대로 써버린 거야!"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대야에 온수가 받아져 있으면 그 물은 샤워 용도로만 써야 한다. 이것이 1중대의 내부 규칙 중 하나다.
이 시간에 샤워를 할 사람은 전날 근무를 섰던 당직 근무자밖 에 없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가 일부러 물을 버렸다거나, 아니면 다른 용도로 사용 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범인은 다시 현장을 찾아오는 법. 샤워실을 나가는 순간.
범인으로 추정되는…… 아니, 확실한 자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 냈다.
"충성!"
손에 바가지를 들고 있는 남자.
기운상이었다.
"너…… 바가지로 지금 뭐하고 있냐?"
"아, 화장실 변기가 막혀서 물 퍼서 내리고 있는 중입니다. 근 데 마침 샤워실에 물이 받아져 있어서 그거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걸 왜……."
마인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이는 투스타의 아들이다. 여기서 괜히 기운상을 갈궜 다간, 앞으로 남은 자신의 군생활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직 마인정은 상병이다. 곧 병장도 달아야 하고, 말년휴가도 나가야 한다.
군생활이 많이 남았는데, 여기서 스스로 지옥길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아니다. 됐다. 변기 막힌 건 잘 뚫렸고?"
"예. 아주 잘 내려갑니다."
"그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마인정이었다.
이등병은 원래 실수할 수밖에 없는 계급이다.
왜냐하면 잘 모르니까.
이미 자대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선임급들 입장에 선 이제 막 자대 전입을 한 신병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상당히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1중대 내에서 지켜야 하는 수칙 같은 것들을 잘 이행하지 않 는 경우들이 다반사다.
이럴 때에는 맞선임이 주의를 줘야 한다. 이렁게 하면 안 된 다는 것들을 알려줘야 실수가 줄어든다.
하지만 기운상은 입장이 많이 달랐다.
실수를 해도 선임들이 하하호호 웃으면서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전부가 다 그러했다.
그러다보니 기운상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못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잘못된 게 있다면 바로바로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같은 분과 선임들은 기운상이 원하는 것들을 속 시원하게 이 야기해주지 못했다.
하나 이강진은 달랐다.
"기운상. 너, 근무 교대자들이 사용하라던 온수, 변기물 내리 는데 사용했다며? 그게 진짜냐?"
"이병 기운상! 예, 그렇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이강진.
"그 온수는 샤워나 세면세족할 때에만 사용하는 거야. 변기물 내리고 싶으면 화장실에 있는 물을 받아서 사용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아직 노란 견장을 차고 있는 신병이 무 엇을 알까.
안 그래도 잘 모르는데, 선임들이 기운상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같은 동기인 조성면보다
"이제 알려줬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그리고 마인정 상병님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꼭 말하고. 내가 같이 가주마."
"감사합니다, 이강진 이병님!"
이강진은 기운상을 데리고 직접 마인정을 찾았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기운상을 보면서 마인정은 식은땀을 흘렸
"그, 그럴 수도 있지. 강진아, 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운상이 데리고 가라. 부담스러워 죽겠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인정 상병 님. 다음부터는 그런 일 없도록 제가 확실하게 교육시키겠습니다."
"그래. 고생해라."
마인정 상병을 비롯해 다른 선임급 병사들은 이강진을 굉장 히 신기하게 바라봤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이들은 바로 입을 열었다.
"강진이, 저 녀석은 대체 무슨 깡으로 투스타의 아들한테 저 러는 겁니까?"
"낸들 아냐?"
"설마…… 강진이 친인척 중에서도 스타 있고 그런 거 아닙니 까?"
"그렇진 않을 텐데."
마인정이 아는 한, 절대로 아니다.
이강진은 대체 무슨 깡으로 저러는 걸까?
보면 볼수록 참 신기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이강진은 기운상을 불렀다.
"운상아. 전투화 닦으러 가자."
"예, 알겠습니다."
다른 선임들은 기운상에게 전투화 닦으러 가자는 말조차 꺼 내지 못했었다.
하나 이강진은 상대가 투스타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거리낌이 없었다. 기운상이든 뭐든 후임이라면 모두에게 평등하게 대했 1분대원들은 이런 이강진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기인 백우호의 걱정이 유독 컸다.
"강진이, 저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오늘도 운상이 암 구호 못 외웠다고 엄청 혼내던데……."
암구호를 못 외운 건 기운상의 잘못이 맞다.
그래도 웬만한 선임들은 투스타의 아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엄 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강진은 다른 선임들과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잘못을 했으면 바로잡아줘야 한다. 설령 그게 투스타의 아들 이라고 해도 이 마인드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오히려 동기, 그리고 선임들이 이강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전마등은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겠다. 하…… 진짜 하다하다 별의 별 일이 다 생기네. 아버 지가 투스타인 신병이 들어오고. 나중에 나 말년 때에는 무슨 일 이 생길지 예상조차 못하겠다."
"전역하시기 전에 지구 멸망하는 거 아닙니까?"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설령 지구가 진짜로 멸망한다 하더라도 군복 입고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탈영해서라도 사복 입 고 죽을 거야."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이었다.
기운상이 자대에 전입한지 이제 2주가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 다.
대대장이 1중대 중대장을 따로 호출했다.
"운상이는 잘 지 내고 있겠지?"
"예! 특별히 불편해 하거나 그렇진 않아 보입니다."
"잘 감시해둬. 그리고 내무부조리 이런 것도 확실하게 체크해 두고. 우리 부대에 내무부조리가 있다는 소리가 육군 본부에 들어가면…… 어휴, 상상하고 싶지도 않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까 잠깐 생각해보려던 대대장조차 도 중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무조건 군복을 벗게 될 것이다.
어디 대대장뿐이랴. 중대장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
두 장교가 기운상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를 진행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대대장에게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잠깐 전화 좀 받겠네."
"예."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 추, 충성!"
딱 봐도 상급자로부터 온 전화임을 알 수 있었다.
낮은 자세로 전화를 받던 대대장.
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갔다.
"이, 이번 주 토요일 말씀이십니까?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고개를 떨궜던 대대장은 천천히, 공허한 눈빛으로 중대장을 바라봤다.
"……큰일이야."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순간.
중대장은 대대장의 대답을 듣고 나서 뒤늦게 후회했다. 차라리 무슨 일인지 묻지 말걸.
분대장 결산 회의 시간.
행보관은 각 분과 분대장들을 쭉 바라보면서 물었다.
"전마등 어디 갔냐."
말 꺼내기가 무섭게 전마등이 뒤늦게 행보관실을 찾았다.
"죄송합니다. 화장실에 있다 보니 방송을 못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너 찾으려고 했다. 중요한 말이 있거든."
이번 결산 회의 시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이것은 1분대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신병 면회 일정 잡혔다."
"신병이라면…… 설마 운상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진이나 우호를 신병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잖아."
면회는 좋다.
문제는 누가 오느냐다.
"혹시 운상이 어머니하고 누나, 이렇게 두 명이 오는 겁니까?"
기운상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건 전마등도 알고 있다.
그걸 기운상의 아버지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만 제외하고 남은 가족들만 면회를 오는 것일 줄 알았다. 아니, 제발 그래야 한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전부 오신다고 하더라. 아버지까지 포함해서 다."
투스타가 이곳에 온다!
그것은 흡사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었다.
< 제23화. 이등별님 오셨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