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2화. 무박 3일 (6) >
제22화. 무박 3일 (6)
이강진이 알려준 대로 이도훈은 갈대밭을 중점적으로 살펴보 기로 했다.
"아아. 전포반, 그리고 통신에서 상병 이상 되는 병사들 한 명 씩 선정해서 박스카 앞으로 모여라. 수송에서도 인력 남으면 전 부 다 보내도록 해."
-하나포 수신 양호.
-둘포 수신 양호.
명령을 받은 분과에서 곧장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도훈이 다시 박스카에 도착했을 무렵. 그의 명령대로 선임급 이상 되는 병사들이 집합했다.
총 10명.
이도훈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격지휘통제관이 그에게 물 었다.
"전포대장님. 병력들은 뭐 때문에 집합시키셨습니까?"
"몰래 숨어 있는 대항군 잡으러 가려고 따로 부른 겁니다."
사격 지휘통제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 포병대대가 대항군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으며 유리한 고 지에 올라간 상황이다. 그런데 대항군이 더 있다? 이도훈의 말이 정말이라면…….
"혹시 이 모든 게 저희를 유인하려는 함정입니까?"
"아마도 그런 거 같습니다. 통제관님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무, 물론입 니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만약 이도훈의 말이 정말로 맞다면 큰일이다.
언제, 어느 때에 사격지휘소와 지휘통제실이 털릴지 모르는 일이다.
이도훈은 사격지휘통제관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갈대밭으로 향했다.
진입 직전, 이도훈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까닥, 까닥.
앞으로 전진하라는 수신호였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아껴야 한다. 괜히 말소리를 냈다간, 대항군이 진작 이들의 기척을 눈치 채고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모든 것은 수신호로 통일한다. 이도훈의 첫 수신호 는 이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최대한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 순간, 이도훈의 귓가에 무전기 신호음이 들렸다.
-치익! 치익!
-지금 오대기들, 한 곳으로 모이게끔 다 유인해뒀습니다. 슬 슬 움직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수신 양호."
갈대밭에서 들려오는 무전기 소리.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서 이도훈은 대항군의 냄새를 맡았다.
'그 이등병 말이 맞았군!'
붉은 머리띠를 동여맨 갈대들의 속삭임을 듣고 대항군의 작 전을 알아차린 이강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갈대들 사이에서 속삭임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도훈은 병력들에게 추가 수신호를 보냈다.
조용히 움직이는 병력들. 대항군들은 여전히 이들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부소대장님. 지금 치러 갑니까?"
"잠깐만. 경계가 느슨해지는 틈을 노려야 한다. 그래야 뒤통 수를 제대로 때릴 수 있어."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 거립니다. 이번에 저쪽 부대 탈탈 털 어먹으면, 정말로 포상휴가 주시는 거 맞습니까?"
"준다니까. 내 말을 못 믿냐? 대대장님이 직접 약속하신 거니 까 믿어도 된다."
"부소대장님만 믿겠습니다!"
대항군으로 움직이게 된 병사들은 포상휴가를 따서 좋고, 간부는 상급자에게 점수를 따서 좋고.
목적이 뚜렷하다보니 이들은 어떻게든 이도훈이 속한 부대를 털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항군들은 작전도 좋고, 행동력도 나쁘지 않고. 의도도 괜찮 았다.
하지만 딱 하나 안 좋은 게 있었다.
바로 '운'이다.
설마 소변보러 왔던 타 부대 이등병이 이들의 작전을 듣게 되 었을 거라곤 미처 생각 못했다.
이 한 번의 불운이 곧 패배라는 결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도훈이 수신호를 보내자마자 병력들이 갈대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꼼짝 마!"
"움직이 면 쏜다!"
"무기 내려놓고 투항해라! 어서!"
어느 순간 이도훈이 이끄는 병력들이 대항군들을 전부 포위 해버렸다.
대항군들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붙잡힌 꼴이다.
이도훈은 씨익 웃으면서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전포대장. 지금 갈대밭에 숨어 있던 대항군 3명을 제 압했다는 통보. 수신 양호한지."
이도훈과 이강진의 협업으로 인해 대항군 상황조치 훈련은 포 병대대의 압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사히 훈련을 종료한 포병대대.
"이동 준비 서둘러라!"
"가신 들어 올릴 때 허리 쫙 펴고 들어 올려라! 구부정하게 들 면 허리 나간다!"
"깔, 깔, 깔, 깔…… 양호!"
군용 트럭 뒤에 155mm 견인곡사포를 거는 포병들.
병력들이 전부 탑승했음을 확인한 전포대장은 떠나기 직전, 안준렬 조가 있는 목진지를 찾았다.
이들에게…… 특히 이강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
"도와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무사히 훈련 끝마칠 수 있었어."
"이병 이강진. 제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병사와 간부가 비록 서로 적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모든 간부 가다적은 아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도훈처럼 병사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 도 분명 존재한다.
이도훈을 알게 되면서 이강진은 내심 이런 생각도 해봤다.
'우리 부대에 전포대장 같은 간부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가득 들었다.
그래도 이도훈과의 만남은 이강진에게 신선한 경험이 되었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그때까지 다들 건강해라."
"예, 알겠습니다!"
어쩌면 이도훈의 말대로 정말 또 보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 사람의 인생이라는 건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법이니까.
국지도발 3일차.
점심시간이 되고 나서야 무박 3일 훈련이 종료되었다.
사열대에 집합하게 된 병사들.
중대장이 이들 앞에 섰다.
"그동안 근무 서느라 고생 많았다. 무엇보다도 뭐 하나 크게 털린 거 없이 무사히 훈련을 마쳐줘서 중대장은 참으로 기쁘다!"
사고 없이, 그리고 털리는 것 없이 훈련을 끝마치는 것이 죄 상의 시나리오다.
그 시나리오대로 흘러갔으니, 중대장 입장에선 다행스런 일 이었다.
"오늘은 대대장님께서 너희에게 휴식 보장하라고 했으니, 점 심 먹고 나서 잘 사람은 자고, 개인정비 취할 사람은 개인정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실시!"
"실시!"
중대장은 추가로 오늘 당직사관을 맡게 된 통신반장에게 저 녁 점호 때까지 병력들 크게 터치하지 말라는 말도 남겨뒀다.
확실한 자유 시간을 보장받게 된 병력들.
야간조였던 백우호는 점심을 먹고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침대에 뻗었다.
라인헉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강진은 군용 수첩을 꺼내서 달력 부분을 펼쳤다.
'슬슬 휴가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이강진은 일병을 달기 전에 연대장, 대대장에게 받은 휴가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도합 6박 7일. 정기휴가보다도 많은 포상휴가다.
'이번에 나가면 MVW부터 추가 매수해야겠어.'
트리니티 스타가 슬슬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강진이 일병을 달고 한두 달 정도 지날 때쯤이면, 트리니티 스타는 화제의 걸그룹 1위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그전에 신병위로휴가 때 사용하고 남은 돈들을 전부 MVW 엔 터테인먼트 종목에 넣어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할 일이 또 있었다.
'지윤 씨하고 데이트 일정도 잡아둬야지.'
드라마 촬영 일정이 시작되면, 한지윤은 당분간 종교행사에 얼굴을 비줄 수 없게 된다. 그전에 이강진은 한지윤과 원 없이 만나두고 싶었다.
'나가서 이사 갈 집도 알아보고.'
언제까지 곰팡이와 같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적어도 그의 어머니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선물하고 싶었다.
주식에다가 데이트 일정에다가 이사 계획까지.
'이번 휴가 때도 할 거 많네.'
이강진은 언제쯤 휴가를 나가면 딱 좋을지. 우선순위 기간을 1지망, 2지망, 3지망까지 설정해뒀다.
신병위로휴가는 말년휴가보다 파워가 셋기에 무조건 최우선 순위로 나가고 싶은 날에 나갈 수 있었지만, 이다음부터는 아니 그래서 혹시 몰라 3지망으로 노리는 기간까지 설정을 해둔 것 이다.
'철이가 빨리 고참이 되어야 하는데.'
행정병에 짬이 어느 정도 되는 동기가 있으면 휴가 일정 정하 는 게 간단하고 단순해진다. 그냥 동기한테 가서 이 날짜에 나 가고 싶으니 잘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PX 한 번 사주면 된다. 그 러면 알아서 원하는 날짜에 나가게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김철은 아직 막내다.
김철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이강진이 알아서 작전을 잘 짜 야만 했다.
"전마등 병장님."
이강진은 분대장인 전마등을 먼저 찾았다.
전마등은 티비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어. 왜 그러냐, 막내야."
"저, 이 번 달에 연대장님하고 대대장님한테 받은 포상 휴가 쓸까 합니다만."
"그거 벌써 쓰게? 아껴뒀다가 나중에 정기 휴가에 붙여서 같이 나가든가 하지. 포상휴가 따기가 얼마나 어려운 건데."
군생활을 하면서 포상휴가를 단 한 번도 못 나간 병사도 몇몇 있었다.
포상휴가라는 게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무조건 얻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하늘이 점지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강진은 회귀를 통해 이미 천기누설을 당해버렸다.
언제, 어디서 포상휴가의 기회가 올지 다 알고 있었기에 지금 당장 포상휴가를 사용한다고 해도 걱정이 없었다.
'어차피 또 따낼 테니까!'
오히려 이강진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이 여태껏 받은 포상휴가를 다 못 쓰 고 전역할까봐 오히려 이게 두려웠다.
일찌감치 미리미리 써둬야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을 터. 그래서 이강진은 포상휴가가 있으면, 그리고 그것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바로바로 쓸 계획이었다.
"이번에 중요한 약속이 생길 거 같아서 그냥 쓰려고 합니다."
"무슨 약속. 설마…… 지윤 씨랑이냐?"
"하하하, 아닙니다."
그냥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안 그래도 무박 3일 동안 황지웅에게 한지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계속 추궁 당하지 않았나. 전마등한테까지 그런 추 궁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뭐, 알았다. 언제쯤 나갈 생각하고 있는데?"
"6월 초입 니다. 그쯤이 면 아무 때든 상관없습니다."
"6월 초라…… 나하고 휴가 나가는 일자가 비슷하네."
"전마등 병장님도 그쯤 나가시는 겁니까?"
"어. 분대장 휴가 쓰려고. 말년휴가에 붙여서 그냥 길게 나갔 다 올까 생각했는데, 나도 너처럼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그냥 분 대장 휴가 미리 쓸 생각이야."
분대장도 작업병과 마찬가지로 포상휴가가 떨어진다.
이것 때문에 일부러 분대장을 차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 만 반대로 아무리 휴가가 좋다고 하더 라도 분대장만큼은 o^ 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만큼 분대장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힘들다.
후임들이 뭔가를 잘못했다 하는 순간 바로 자신이 1 순위로 털 리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괴롭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분대장을 차느니 차라리 작업병을 차겠다 고 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휴가 같이 나갈까?"
전마등의 제안.
이것을 받아들일까 말까 고민하던 이강진이었으나, 이내 고 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예. 같이 나가겠습니다."
전마등과 같이 나간다고 해야 6월 초에 휴가를 나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전마등이 알아서 잘 해결해줄 테니 말이다.
분대장 수첩을 꺼내 휴가에 관한 것들을 빠르게 적어 내려간 전마등.
"행보관님, 행정반에 계시지?"
"예. 아까 화장실 갔다 오면서 계신 거 봤습니다."
"오케이. 기왕 말 나온 거, 다른 애들이 선수 치기 전에 미리 잡아두는 게 낫겠다. 같이 갈래?"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곧장 슬리퍼를 신고 전마등의 뒤를 따랐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생활관의 문이 활짝 열렸다.
헐레벌떡 뛰어온 황지웅이 다급하게 말했다.
"비, 빅뉴스입니다! 빅뉴스!"
"뭔데. 행보관님이 일광건조라도 하라고 했냐?"
"그것보다 더 큰 소식입니다!"
황지웅의 입 꼬리가 위로 향했다.
"저희 1분대에 신병이 왔다고 합니다!"
휴가 결정지으려고 가다가 졸지에 후임을 받게 되었다.
< 제22화. 무박 3일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