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기습 순찰 (2) 1075 대대의 대대장, 오승진 중령은 차가운 커피로 뜨거운 속을 달래고 있었다.
언제 연대장이 불시에 순찰을 돌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앞서 두 대대가 털렸다. 이제 곧 1075 대대의 차례가 돌 아온다.
순번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대대장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 다.
마음 같아선 커피가 아니라 소주를 마시고 싶었으나.
'근무 시간에 술 마시면 큰일이지.'
안 그래도 위험한 시기에 본인이 기행을 저지르면 더 큰일이 지 않겠나.
'집에 가서 자기 전에 술이나 한 잔 하고 자야겠어.'
그래야 눈 좀 붙일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저녁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을 무렵.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연대 작전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우준 소령이었다.
"어. 여보세요."
-충성. 소령 이우준입니다.
이우준 소령과 오승진 중령은 5년 전에 같은 부대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 기간을 계기로 두 사람은 부쩍 친해졌다.
각자 타 부대로 전입을 하면서 연락도 자연스럽게 드물어졌 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우준 소령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약간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뜬금없진 않아.'
요즘 연대장이 하급 부대들을 털고 다니는 시기 아닌가. 그것 에 관한 연락일지도 몰랐다.
"그래, 이 소령. 무슨 일이야?"
-간만에 오승진 중령님하고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연락 드렸 습니다.
"술?"
-예,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저녁에 술이 땡기던 찰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오늘은 일이 많아서 야근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몇 시까지 부대에 계십니까? 제가 픽업하러 가겠습니다.
"이 소령이?"
-제가 먼저 제안했으니 제가 가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 하하!
호쾌한 웃음소리가 끝난 뒤.
흘려들을 수 없는 중요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만나서 연대장님 순찰 정보도 조금 흘려드리겠습니 사실 이게 오승진 중령이 바라는 거였다.
"정말인가? 고맙네, 고마워! 역시 이 소령밖에 없어!"
이러면 이우준 소령을 안 만날 수가 없다.
의심 없이 바로 승낙한 오승진 중령.
"오늘은 운이 좋군!"
과연 정말로 운이 좋은 걸까.
대대장은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봤어야 했다.
왜 갑자기 이우준 소령이 이렁게 협조적으로 나오는지에 대 해서.
전화를 끊은 이우준 소령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약속 잡았습니다. 제가 부대로 9시 반쯤에 간다고 했습니다."
"잘했네."
흡족한 미소를 짓는 황영일 대령.
그는 펜을 들고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금일 9시 반, 1075 대대 기습 순찰.
그런 뒤에 작전과장에게 내내 강조했다.
"절대로 1075 대대에게 내가 간다는 말을 흘리지 말게. 만약 그쪽에서 알게 되는 순간…… 자네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소령 이우준!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을 저울질한다고 치면, 상대방과 특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 자신의 목숨 쪽으로 무게추가 더 기울 것이다.
게다가 이우준 소령과 오승진 중령은 과거에 한 차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었을 뿐, 그 이상의 특별한 연은 없었다.
'나부터 살고 봐야지!'
당연한 행동이다.
한편.
이강진은 아침에 눈을 뜬 이후부터 일과 시간을 진행하는 순 간까지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연대장이 갑자기 부대를 방문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 데.'
언제, 어느 시간대에 순찰을 돌았는지. 이게 기억이 잘 안 났 다.
하기야. 20년 전의 일인 데다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도 아닌데, 이걸 여태껏 기억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된다.
'생각해보자! 어떻게 해서든 떠올려야 해!'
어쩌면 이건 포상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연대장이 순찰을 도는 족족 근무자들은 털리기만 할 뿐, 연대 장을 만족시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때 이강진이 나서서 완벽하게 근무를 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잘하면 연대장이 포상 휴가를 내릴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이강진은 최대한 포상휴가를 많이 모아둬야만 했다. 나갈 때마다 돈을 억대로 벌어올 수 있다. 포상휴가에 목을 안 매는 게 이상하다.
곡괭이질을 하면서도 이강진은 날짜와 시간을 떠올리도록 노 력을 해봤다.
그러나.
'잘 안 떠오르네.'
땅에 박혀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꺼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 이었다.
한창 돌과 씨름을 하던 도중이 었다.
박두정 하사가 손뼉을 두세 번 치 면서 병사들의 눈과 귀를 집 중시 켰다.
"자자, 좀 쉬었다가 하자. 목마른 사람들은 가져온 물마시고. 화장실 갔다 올 사람들은 갔다 와라. 15분 뒤에 다시 작업 시작 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마침 휴식이 필요할 때였는데. 잘 됐다.
털썩!
지면에 엉덩이를 붙인 이강진.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젖은 몸을 시원하게 만들었 지만, 머릿속마저 시원하게 만들진 못했다.
아직도 기억력과의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안준렬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진아."
"이병 이강진."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어두워 보이 던데."
고민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얼굴에서 티가 확 나고 있었다.
이강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뭔데? 중요한 거?"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적당히 둘러대기로 결심했다.
"예전에 카페에 자주 다닐 때, 마음에 드는 여자가 한 명 있어 서 휴가 때 혹시 볼 수 있을까 해서 그곳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간대에 그 여성분을 봤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고민 중이 었습니다."
"저런. 그럼 결국은 못 만났겠네."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시간대를 떠올릴 수 있을까.
안준렬은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해줬다.
"시간대를 모른다면, 직원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나?"
"직원…… 말입니까?"
"어. 카페 아르바이트 하시는 분이나 아니면 직원이 있을 거 아니야.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 여성이 단골손님이 라면, 분명 기억하고 있겠지."
물어보면 편하다.
하지만 이강진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미래에 벌어질 일이니까.
'아니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날짜와 시간은 모른다.
그렇다면…….
인물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연대장이 왔을 때 근무를 섰던 인물이 누구인지를 떠올리면 되잖아!'
날짜와 시간이 아닌 사람을 떠올린다.
그것이 기억해내기 더 편할 것 같았다.
연대장이 불시에 순찰을 돌았을 때.
그 당시에 근무를 섰던 인물들은 자신들이 연대장의 순찰을 무사히 방어해냈다고 무용담을 쏟아냈었다.
그렇다고 포상휴가를 받을 정도로 평가를 잘 받은 건 아니었 다. 그냥 그럭저럭. 이것이 연대장의 최종 평가였다.
'기억난다, 기억이 나……!'
그 무용담을 이강진은 일병을 달기 전까지 지겹도록 들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맞선임, 서일주가 당시의 근무자였기 때문이다.
연대장의 기습 순찰에도 당황하지 않고 무사히 방어해낸 자 신이 스스로 대견했던 것인지 이강진과 마주칠 때마다 자랑을 해댔다.
지겹도록 들었던 덕분에 이강진은 그 기억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안준렬 상병님."
"고민이 해결됐어?"
"예. 아주 말끔하게 해결됐습니다."
안준렬 덕분에 이강진은 사건의 실마리를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15분이라는 시간이 모두 지났다.
"자, 다시 작업 시작하자!"
"예!"
작업 도구들을 찾는 병사들.
이강진의 곡괭이질에 힘이 담기기 시작했다.
푹!
깊게 박혀 있던 큰 돌덩이가 이강진의 고민이 해결된 것처럼 시원하게 뽑혀져 나왔다.
'오늘 하루 종일 바쁘겠군!'
슬슬 판을 짜둬야 한다.
점심 식사 시간.
병사 식당에 들어선 이강진은 식판을 든 채 주변을 빠르게 살 폈다.
서일주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기 위함이었다.
'찾았다!'
빠른 걸음으로 서일주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이강진.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음? 어, 너도 맛있게 먹어라."
맛있게 먹을 만한 식단 메뉴는 아니었다. 그래도 굶을 수는 없었기에 억지로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슬슬 말을 걸어볼까.'
잠시 식사를 멈춘 이강진.
작전에 돌입할 타이 밍이다.
"서일주 이병님."
"응? 왜?"
"오늘 야간근무 둘번초이시지 않습니까?"
야간근무 편성표가 이미 행정반에 걸려 있었다.
서일주는 오늘과 내일. 이렇게 두 번 야간근무에 투입될 예정 이다. 그 다음부터는 불침 번에 투입된다.
이 말인즉슨.
'연대장이 오늘, 아니면 내일 온다는 뜻이겠지.'
언제 오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서일주와의 거래다.
"서일주 이병 님, 괜찮으시다면 오늘하고 내일, 저하고 근무 바 꿔주실 수 있으십니까?"
"근무를?"
"예."
근무자들끼리 서로 합의만 보면, 근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 다.
이런 부분에선 1075 대대 1중대는 융통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근무를 바꾸는 걸 너무 자주 해서는 안 된다. 근무 자 명단에 혼선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딱 이틀이면 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일주 이병님."
"네 근무 시간이 몇 시인데."
"오늘은 초번초, 내일은 말번초입니다."
"초번초에 말번초? 그 좋은 시간대를 포기한다고? 선임근무 자는?"
"도승욱 병장님입니다."
"도승욱 병장님이라면…… 나쁘지 않은데?"
후임근무자 괴롭히는 일도 없고. 그냥 말없이 묵묵하게 근무 시간만 보내다가 돌아오는 그런 사람이다.
선임이 자꾸 말 거는 게 귀찮게 느껴지는 후임근무자로선 최 고의 선임근무자다.
반면, 서일주와 같이 근무를 나가는 선임근무자, 추민복 상병 은 굉장히 귀찮은 사람이다.
헬스 트레이너 지망생이어서 그런지 운동에 대한 지식을 뽐 내고 싶어서 난리가 난 선임이었다.
가끔 초소 안에서 맨몸 운동도 시킬 때가 있었다.
서일주는 사실 추민복 상병과 상극이었다.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추민복보다 도승욱이 서일주와 더 잘 어울렸다. 서일 주에게 둘 중 한 명을 택해서 근무 나가라고 한다면, 서일주는 고민도 하지 않고 도승욱을 고를 것이다.
게다가 근무 시간도 좋다.
누가 봐도 서일주가 이득이다.
그래서 더욱 수상했다.
"왜 손해 보는 짓을 자처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뭐가 있나?"
분명히 이런 의심을 살 줄 알았다.
그래서 이강진은 미리 머릿속에 준비해온 대본을 그대로 읊 기로 했다.
"사실 제가 운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추민복 상병님하고 같이 근무 나가서 운동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것 때문에 서일주 이병님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된 겁니다."
"네가 운동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예. 저, 라인혁 상병님하고 우호하고 같이 헬스장 나가는 거, 자주 보셨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설마 그 두 사람과 헬스장에 자주 오고 갔던 게 이럴 때 도움 이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자, 서일주는 더 이상 이강진의 의도를 의 심하지 않게 되었다.
"뭐, 알았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바꿔주마."
"감사합니다! 역시 서일주 이병님은 최고십니다!"
"하하하, 내가 좀 잘나긴 했지."
포상휴가 기회를 주는 건데, 칭찬 정도는 립서비스로 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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