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57화
제19화. 신병위로휴가 (3)
장 마감까지 이강진은 컴퓨터 앞을 떠날 줄 몰랐다.
기지개를 펴는 순간, 뼈마디마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허리야······."
손으로 등 부분을 스스로 토닥였다.
"남자의 생명은 허리라던데. 큰일이네."
운동이라도 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됐다. 군대에서 지겹도록 운동하고 있는데. 굳이 사회에 나와서까지 군대 스케줄을 따를 필요는 없잖아."
개인정비시간에 할 게 없는 탓에 이강진은 백우호, 그리고 라인혁과 함께 막사 내에 위치한 헬스장에 가끔 가곤 했다.
헬스장이라고 해봤자 바벨과 운동기구 몇 개. 이렇게가 전부다.
민간 사회에 있는 헬스장에서 기본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러닝머신은 군대 헬스장에선 사치다.
러닝이 필요하다? 그러면 연병장을 돌면 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하고 있었다.
체력을 미리 단련해둬야 훗날에 있을 유격, 혹한기 훈련을 무사히 잘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도 좋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신병위로휴가를 나와서까지 바벨을 들 생각은 없었다.
"머리 좀 식혀볼까."
냉장고에 들어 있는 참외를 하나 꺼냈다.
능숙한 솜씨로 참외를 깎아낸 뒤, 먹기 좋게 잘라 그릇에 담아냈다.
입대하고 난 이후에 이강진은 가급적이면 과일을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두려고 한다.
군대에 있으면 과일이나 채소를 잘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강진은 상병이 꺾였을 때, 선임들과 같이 몰래 방울토마토를 심은 적이 있었다.
열릴 때마다 하나씩 따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참외와 커피 한 잔을 들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삭!
참외의 단맛이 입 안에 가득 번졌다.
다시 마우스를 잡으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띠링!
스마트폰 액정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이강진의 손은 마우스 대신 스마트폰을 붙잡게 되었다.
"······!"
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한지윤한테서 답장이 온 것이다.
[답장이 늦어서 죄송해요. 13일날 복귀라고 하셨죠? 그럼 그때 점심 식사 같이 하는 건 어때요? ^_^ 제가 살게요!]
"······."
멍하니 한지윤의 답장을 바라보던 이강진은 무심코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얏!"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꿈이······ 아니잖아?"
한지윤에게 답장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사석에서, 그것도 단 둘이서 한지윤과 만나게 되다니!
회귀한 이후, 이강진은 금전운과 연애운, 둘 다 너무 원만하게 잘 풀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한지윤이 이강진을 향해 보이는 이 표현이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 * *
결국 부대로 복귀하는 그날 점심에 한지윤과 부대 근처 시내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바라 식당을 향해 이동하는 이강진.
가게 매출도 올려줄 겸해서 저녁 식사는 바라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민수에게 할 이야기도 있다.
"엄마. 저 왔어요."
"강진이 왔구나. 밥 먹으려고?"
"네. 아저씨는요?"
"주방에 있어."
이강진은 황민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그가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앞치마를 두른 채 저녁에 몰려올 손님들을 대비하던 황민수가 뒤늦게 이강진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강진이 왔냐."
"아저씨. 바쁘세요? 한 5분이면 될 거 같은데."
"밥 먹게?"
"그것도 그건데, 먼저 괜찮은 정보가 있어서요. 그것부터 공유해드리려고요."
주식 이야기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황민수는 황급히 이강진에게 다가갔다.
"그래, 이번에는 뭔데?"
"MVW라는 곳, 들어보셨어요?"
"처음 듣는데. 뭐하는 회사야?"
"엔터테인먼트에요. 연예 기획사요."
황민수는 연예계 쪽으론 완전히 잼병이었다. 안 그래도 그쪽 분야에 대해 모르는데, 소규모 중에서도 소규모 기획사인 MVW를 알 리가 없었다.
대중들조차 잘 모르는 이곳을 이강진이 괜히 추천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MVW 엔터테인먼트에 ‘트리니티 스타’라는 7인조 걸그룹이 있어요. MVW가 메인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간판이죠."
"트리니티 스타? 잘 모르겠는데."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왜냐하면 1집, 2집이 연달아 쫄딱 망했거든요."
황민수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이강진을 바라봤다.
망한 그룹이 있는 곳을 왜 추천하는데?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나 대중들을 비롯해 연예계 관계자들조차 알지 못하는 특급 정보가 있었다.
"여윳돈 있으면 MVW 거, 미리 매수해두세요. 조만간 엄청 오를 테니까요."
"무슨 근거로?"
"트리니티 스타의 3집이 대박날 거거든요."
3집 타이틀곡, 텔 유(Tell you).
발표 당시에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훗날 팬들의 직캠을 통해서 어느 순간 멤버들의 댄스 파트가 주목받기 시작하고, 급기야 나중에 가서는 타이틀곡 자체가 역주행에 성공해버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원 차트를 전부 석권해버리고 대중가요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트리니티 스타의 성공을 기반으로 MVW는 가요, 배우, 예능 분야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 최고의 연예 기획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앞으로 트리니티 스타가 날아오르면서 MVW 주가가 상승세를 타기까지 딱 5개월 남았다. 그전에 미리 사둬야 한다.
황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 말대로 하마."
어차피 황민수는 이강진의 말대로 주식으로 얻은 여윳돈만 굴리기로 했다. 설령 이강진이 말한 대로 되지 않아서 돈을 다 잃게 된다 하더라도 원금 손실은 없다. 그러니 결정하는데 큰 부담과 스트레스는 없었다.
"나중에 제 말대로 되면, 선물 주시는 거 아시죠?"
"알다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해라. 이 아저씨가 사주마!"
"그럼 차 사주실래요?"
"차, 차······?!"
헛숨을 삼키는 황민수의 반응에 이강진은 작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짜식······ 이 아저씨 놀래키긴!"
그러나 5개월 뒤.
황민수는 정말로 이강진에게 차를 사줘도 될 만큼의 수익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강진은 그걸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농담조로 흘려버렸다.
할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때, 문득 다른 궁금증이 들었다.
"아저씨, 혹시······."
"응? 또 뭔데?"
"······아니에요."
혹시 연애에 대해 잘 아시냐고 물어보려다가 도중에 관뒀다.
황민수가 만약 연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여태껏 숫총각으로 살아오진 않았을 테니까.
* * *
남은 휴가 동안 이강진은 어머니와 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가서 새 옷도 사드리고. 구두와 핸드백도 사드리고.
그동안 못했던 효도를 한꺼번에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10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군대에서 신병위로휴가를 보고 괜히 4.5초 휴가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말은 4박 5일이지만, 체감상은 4.5초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10일이어도 10.11초에 불과했다.
여전히 초 단위였다.
다시 군복을 입게 된 이강진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한지윤과의 약속도 있고 해서 이강진은 이른 시간에 시외버스에 탑승해야 했다.
"다녀올게요, 엄마."
"조심해서 잘 다녀오고. 다음에 민수 아저씨하고 같이 면회 갈 테니까 그때 또 보자. 알았지?"
"네. 엄마도 그때까지 건강히 잘 계세요. 그리고 저, 휴가 자주 나올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이강진은 벌써부터 다음 휴가를 노리고 있었다.
목표는 일병이 되기 전에 휴가를 한 번 더 나가는 것이다.
어느 구간에서 포상휴가를 따낼 수 있는지 이미 이강진의 머릿속에 데이터로 다 입력이 되어 있었다.
집 밖을 나선 이강진은 이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강진과 같은 날짜에 부대 복귀를 하는 이등병이 때마침 복도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습기 찬 버스 창문 위에 검지로 ‘집에 보내줘’라는 글자를 써내려가는 이등병.
창가에 맺힌 물방울이 마치 이등병의 눈물을 대변하듯 아래로 주룩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짠해 보이던지. 이강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같은 신세잖아, 시발.’
이 사실이 이강진을 더욱 슬프게······ 아니, 화나게 만들었다.
* * *
휴가를 나왔을 때 동기들과 소주를 마시고 헤어졌던 바로 그 시내로 돌아왔다.
‘근처에 슬슬 보여야 할 텐데.’
한지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가 있었다.
츠케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식집이었다. 이강진도 회귀하기 전에 휴가를 나와서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츠케동 앞에서 12시 반에 보기로 했다. 그러나 5분이 지나도 한지윤은 나타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없기에 그녀에게 연락을 할 방법도 없었다.
거의 10분이 다 되어가는 순간.
"강진 씨!"
빠른 걸음으로 뛰어오는 한지윤의 모습이 먼발치에서 보였다.
늦은 걸 아는 모양인지 한지윤은 정신없이 이강진이 있는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지윤의 긴 머리카락이 공중에 너풀거렸다.
‘뛰어오는 것도 CF의 한 장면 같네.’
괜히 톱 여배우가 될 여인이 아니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한지윤.
"죄······ 죄송해요, 강진 씨. 많이······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괜찮아요. 일단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숨 돌리시죠."
마침 자리도 넉넉했다.
창가쪽 자리를 잡은 두 남녀.
메뉴를 고른 후에 한지윤은 연달아 물을 3잔 비웠다.
"물을 많이 마시는군요."
"아, 네. 물 많이 마시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피부도 좋아지는 거 같고요."
자신의 얼굴 피부를 만져 보이는 한지윤이었다.
옅은 화장만 했을 뿐인데. 그녀의 미모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돋보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서로의 안부만 가볍게 물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카페로 자리를 이동하고 나서부터였다.
"실은 강진 씨를 보자고 한 이유가 있어요."
역시 이강진이 예상한 대로였다.
"어떤 건가요?"
"대학교에서 과제를 내줬는데, 직업군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해오라고 해서요. 다른 곳에 협조를 요청해도 바쁘다는 대답만 돌아오더라고요. 죄송해요. 이런 건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만족도고 나발이고 군대에 강제로 끌려왔는데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상대는 한지윤이다. 이강진은 거짓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지윤 씨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협조해야죠."
"정말 고마워요, 강진 씨! 나중에 휴가 또 나오시면 제가 보답으로 맛있는 거라도 사드릴게요!"
"하하, 감사합니다."
과제에 참여 한 번 한 것으로 한지윤과의 일일 데이트 권을 얻을 수 있다?
이거야말로 이득이다.
"잠시만요. 노트북 좀 꺼내고요."
한지윤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내려고 하던 순간.
안에 있는 내용물 몇 개가 책상 위로 쏟아졌다.
"어머,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근데 이건 뭔가요?"
‘오디션’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종이들이 다수 펼쳐졌다.
"제 어렸을 적 꿈이 연기자거든요. 그래서 연예 기획사 이곳저곳에서 오디션을 보려고 하는데······ 어느 곳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이런 걸로 지망생들한테 사기 치는 곳이 너무 많다고 해서 조심하라고 들었거든요."
한지윤의 꿈이 연기자라는 건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이강진의 눈에 확 띄는 회사 하나.
MVW 엔터테인먼트.
"지윤 씨한테 추천해드리고 싶은 연예 기획사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네? 정말로요?"
"예. 마침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획사를 하나 알고 있거든요."
한지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설마 주식 정보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이것은 마치 신이 이강진에게 ‘이걸로 짝사랑한테 점수 좀 따 봐.’라고 기회를 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