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52화
제18화. 포상휴가 사냥꾼 (1)
완벽한 위장으로 우선 대대장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 이강진과 전마등.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첫 인상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가 결정된다고 한다. 우선은 위장 크림으로 확실하게 점수를 따놓았으니, 출발이 굉장히 좋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래도 확인할 건 해야 한다.
"거기, 자네."
"병장 전마등!"
대대장에게 지목받은 상대는 전마등이었다.
"현재 발령된 상황에 대해서 말해보게."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이 자주 물어보는 것이었다. 즉, 이건 기출문제다.
"제1부 화스트페이스. 제2부 2013년 3월 29일. 제3부 발령권자 중령 오승진. 제4부 단독군장 착용 및 군장결속 후 식량 치장, 탄환 분배 및 소산진지로 이동. 이상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대대장.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장 짬밥 정도 되면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테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옆에 자네."
"이병 이강진!"
이강진이 지목받는 순간, 중대장과 소대장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강진은 중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막내다. 저번 달에 전입 온 신병이 과연 중령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잘 대답할 수 있을까?
혹여나 말실수라도 하진 않을까?
이런 걱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진지 점령 후, 경계 근무자가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브리핑 해보게."
난이도가 제법 있는 요구였다.
그러나 이강진은 이등병답지 않게 침착했다.
"오자마자 진지 점령을 했다는 보고를 지휘통제실에 알립니다. 그 후에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야간에 혹시 모를 침입자의 접근을 대비해 부비트랩도 추가로 설치를 해둡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뒤에 선임근무자는 전방 12시 방향을 기점으로 5시 방향까지, 후임근무자는 반대 방향으로 시야를 넓혀 총기를 거치시키고 감시 태세에 돌입합니다."
"만약 앞에 거수자가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할 텐가?"
추가 질문이다.
보통은 경계근무 수칙만 물어보고 마는 대대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한 술 더 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창날이 무뎌지긴 했지만 그래도 창은 창이다. 어떻게든 1중대의 빈틈을 노려보려는 대대장의 찌르기 공격.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암구호를 통해서 피아를 식별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이곳 진지에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한다면, 침착하게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합니다. 상대방을 제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선임근무자가 나서서 거수자를 제압합니다. 그때, 후임근무자는 진지를 계속 지키면서 선임근무자를 엄호합니다."
"진지에 나가서 둘이서 거수자를 제압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이것은 대대장의 낚시다.
하지만 이강진은 쉬운 물고기······ 아니, 쉬운 이등병이 아니었다.
대대장이 던진 떡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진지를 비워선 안 됩니다. 그게 경계근무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진지를 계속 점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강진은 이걸 강조하고 싶었다.
대대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요즘 이등병들은 굉장히 똘똘하군! 말도 잘하고 말이야. 하하하!"
대대장의 만족도는 더욱 상승했다.
이강진의 선방이 이루어낸 최고의 결과였다.
* * *
점심시간이 도래했다.
평소대로라면 대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어야 한다. 그러나 훈련 도중에는 식당에 내려가서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 없다.
진지를 떠날 수 없었기에 이강진과 전마등은 라인혁과 서일주가 교대를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2시 반쯤 되었을까.
누군가가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전마등 병장님! 내려가셔서 식사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라인혁의 목소리였다.
산을 올라오느라 진땀을 뺀 라인혁. 전투복 소매로 땀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중대장님이 전마등 병장님하고 강진이 때문에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대대장님 앞에서 말 잘했다고?"
"예. 이대로 무사히 대항군까지 다 잡아내면 중대장님이 저번처럼 분과별로 포상휴가 하나씩 돌릴지도 모를 거 같습니다."
"그 대항군이 문제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게 좋다.
특이사항은 없다는 말을 들려준 후에 전마등은 이강진에게 손짓했다.
"가자, 강진아."
"예, 알겠습니다."
산을 내려가던 도중에 전마등이 그제야 뒤늦게 뭔가를 떠올렸다.
"오늘 점심 메뉴 뭔지 인혁이한테 물어볼 걸 그랬네."
후회가 드는 것도 잠시.
해결사 이강진이 나섰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 무국, 밥, 김치, 멸치조림, 김입니다. 부식으로 코카콜라가 나올 겁니다."
"이야~ 역시 엘리트 이등병! 척하면 척이네!"
"감사합니다."
이강진 덕분에 대대장의 테스트도 무사히 통과했었다.
자대 전입한지 얼마 안 된 신병 데리고 근무를 나가는 게 사실 많이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졌다.
이강진은 여태 전마등이 같이 데리고 다녔던 후임근무자 중에서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강진이 너, 훈련 끝나고 휴가 나가지 않냐?"
"예, 그렇습니다. 일정은 안 잡혀 있지만, 다음 달에 바로 나갈 거 같습니다."
이강진의 목표는 대항군까지 잡아서 10일이 넘는 신병위로휴가를 나가는 것.
훈련소 때 받은 포상휴가까지 붙인다면 결코 꿈은 아니다.
"휴가라······ 좋지, 좋아. 첫 휴가 나가면 뭐 할 건데?"
"주식에 넣어둔 돈 빼고 목돈 챙긴 다음에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휴가 나간 동안에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금액이 통장에 들어올 것이다.
일부 금액은 다시 주식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원 없이 쓰다가 부대로 복귀할 생각이다.
원래 돈이라는 건 쓰라고 있는 법이니까.
"아, 주식 한다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괜찮은 정보 있는데, 필요하시다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전마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어. 나는 주식 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우리 아버지가 주식으로 5천만 원 날려먹은 거 보고 ‘절대로 주식에 손대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거든."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주식으로 거액의 돈을 거머쥘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주식에 눈이 먼 순간, 혼자만 망하는 게 아니라 한 가정이 파탄날 수 있다.
그래도 전마등의 아버지는 절제를 잘한 편이었다.
"여자 친구는 없어?"
"예, 없습니다."
여자 친구뿐만 아니라 그냥 친구도 거의 없다.
전마등은 이강진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래. 차라리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여친 없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르지. 애인이 언제 고무신 거꾸로 신을지 모르니까."
비록 여친은 없지만, 그래도 이강진은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주말마다 한지윤을 볼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 *
저녁 7시 반.
병력들은 사열대 앞에 미리 쳐놓은 텐트에 군장을 갖다 놓기 시작했다.
백우호는 바로 눈앞에 있는 막사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아니, 막사가 바로 앞에 있는데, 왜 멀쩡한 막사를 두고 사열대에서 텐트 치고 밖에서 자야 하는 거야?"
이 물음을 이강진은 단 한 마디로 압축해서 대답해줬다.
"훈련이니까."
원래 FM대로 한다면, 다른 진지로 이동해서 낯선 환경에서 야외 숙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대대장은 오늘 1중대가 훈련을 너무 잘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1일차 진지이동을 전부 짬처리 시켰다. 잠도 사열대에서 자게 했다.
비록 막사 내에서 잠은 못 잘지언정, 그래도 막사 화장실은 이용이 가능하다. 냄새 나는 야외 화장실이 아닌 막사 내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었다.
대대장은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했다. 그만큼 1중대가 대대장에게 오늘 훈련을 통해 점수를 많이 따뒀다는 것을 뜻했다.
저녁 9시에 병력들을 집합시킨 행보관.
확성기를 든 행보관은 병력들에게 빠르게 전달사항을 남겼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대충 점호 받고 오전 9시부터 다시 ATT 훈련 재개될 테니까 그때까지 준비 다 끝낼 수 있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은 진지 이동 있으니까 잘 알아두고. 선임들은 이번에 처음 훈련 받는 후임들 신경 잘 써서 가르쳐둬라. 그래야 너희가 편해지니까. 대항군 상황조치 훈련은 오후 14시부터 시작될 거다.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좋아. 막사 화장실 이용 가능하니까 씻을 사람은 가서 씻고 10시까지 전원 취침에 들어가도록 한다. 실시!"
"실시!"
이강진은 우선 화장실에 가서 얼굴과 목, 귓속까지 발라져 있는 끈적끈적한 위장크림부터 씻어 내버리고 싶었다.
대대장에게 점수 딴다는 명목 하에 철저하게 위장크림을 바른 것까지는 좋았으나.
‘찝찝해 죽겠네!’
20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위장크림의 감촉은 거의 판쵸우의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와 동급이었다.
* * *
오전에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 행보관이 말했던 것처럼 9시에 다시 훈련이 거행되었다.
지다가다가 슬쩍 1중대 쪽을 바라본 한 남자가 입 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훈련 잘 받고 있나 보군."
8033 대대 2중대에 속해 있는 한중훈 중사였다.
그도 오늘, 이번 1중대 ATT 훈련에 동참하기로 했다.
타 부대이면서 왜 1중대 훈련에 참가하게 된 걸까?
1중대 ATT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1075 대대장이 직접 그에게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중사. 자네가 대항군 역할 좀 해줘야겠어.’
한중훈 중사는 대항군 역할을 너무 잘 소화한다. 여태껏 그는 대항군을 맡으면서 단 한 차례도 잡혀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 부대를 철저하게 유린하고 놓락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귀신 한 중사’다.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한중훈 중사의 악명은 이제 대대를 넘어서 연대급까지 올라설 정도였다. 연대장이 한중훈 중사를 직접 초빙해서 대항군 역할을 맡긴 적도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을 하는 한중훈 중사.
"1중대를 어떻게 가지고 놀아볼까?"
그의 입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귀신 한 중사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 * *
군용 트럭에 올라선 채 8392 진지로 이동하는 1중대.
이들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승차감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한중훈 중사 때문이었다.
"준렬아. 대항군 소식 들었냐?"
"한중훈 중사님이 대항군 팀 이끌게 되었다는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완전 좆됐지, 씨발. 연대급으로 노는 양반을 우리가 무슨 수로 잡냐?"
"그러게 말입니다. 대대장님이 완전히 작정하신 거 같습니다.."
"어쩐지. 너무 쉽게 포상휴가를 건다 싶었다."
한중훈 중사에게 대항군을 맡겼다는 건, 다시 말해서 병사들에게 포상휴가를 줄 생각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백우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전마등과 안준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중훈 중사님이라는 분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입니까?"
"말도 마라. 저번에 우리 대대가 연대장님한테 엄청 깨졌던 것도 다 한중훈 중사 때문이야. 혼자 남으셨는데, 3시간동안 아주 절묘하게 도망 다니셨지. 오히려 역으로 우리 지휘통제실까지 털렸어."
"세상에······!"
백우호가 없을 때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 한중훈 중사를 과연 누가 잡는단 말인가.
이건 가망이 없는 싸움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유일하게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이가 있었다.
말을 아끼고 있는 이강진이었다.
‘과거에 당했던 치욕을 되갚아주마!’
복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