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48화
제16화. 보내는 이, 떠나는 이 (2)
이강진은 김명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회귀하기 이전에도 이강진이 대기기간이 막 풀리는 시점에서 김명찬이 전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군대라 하더라도 2주는 상대방을 알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다.
그래서일까.
‘이 꼬장의 신이 설마 뮤지컬 쪽에 몸을 담고 있을 줄은 몰랐네.’
이강진은 뮤지컬에 대해서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김명찬이 후에 뮤지컬 배우로서 크게 성공할지, 아니면 하다가 중간에 관두게 될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의 꿈에 재를 뿌리고 싶진 않았다.
"고맙다. 내가 크게 성공하면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줄게. 사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해줄 테니까 부담 없이 말하고."
"방금 하신 말, 기억해두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래. 하하하!"
이강진도 꿈이 있다. 만약 누군가에게 자신의 꿈이 비난받는다고 한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김명찬 덕분에 분리수거 사건도 무사히 종결지을 수 있었다.
2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한솥밥을 먹었던 식구로서 이강진은 김명찬이 잘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법이다.
‘정말로 대성(大成)할 수도 있으니까.’
미래의 스타가 될 사람과 미리 연을 다져놔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다.
* * *
김명찬 병장의 전역까지 앞으로 D-1.
이제부터 김명찬 병장이 하는 모든 것들이 군대에서······ 아니, 군인으로서 하는 마지막 것들이 된다.
마지막 아침 점호. 마지막 짬, 마지막 오전 집합 등등.
작업 인력을 분배하기 위해 행보관이 사열대로 나섰다.
"김명찬."
"병장 김명찬!"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기운차 있었다.
이제 이 관등성명 외칠 날도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너 따로 작업 분배 안 시킬 테니까 생활관에 들어가서 짐 정리해라. 그리고 애들한테도 인사 한 번씩 하고."
"······?"
김명찬은 귀를 의심했다.
전역하기 전날까지 그는 행보관의 노예로서 작업에 끌려 다닐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의 행보관은 악마가 아닌 천사였다.
김명찬의 맹한 반응 때문일까. 행보관이 되물었다.
"왜. 작업 가고 싶냐?"
"병장 김명찬! 아닙니다!"
"허허, 녀석. 그래. 들어가서 쉬어라."
"감사합니다!"
김명찬은 행보관 덕분에 열외 되었다.
다른 병력들에게 이것저것 작업을 분배시키고 나서야 오전 집합이 끝났다.
그때, 전마등 병장이 빠르게 사열대 계단을 올랐다.
"행보관님."
피곤함에 가득한 눈으로 전마등을 응시하는 행보관.
전마등이 그를 부른 이유가 있었다.
"내일 김명찬 병장 전역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대 식당에서 조촐하게 전역 파티 진행할까 하는데······ 허락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 뭐 대수라고. 알았다. 당직사관한테는 내가 말해두마. 가만 있어보자. 오늘 당직이 누구지?"
"소대장님입니다."
"알았다. 소대장님한테 미리 말해놓을 테니까 준비해라. 명찬이 녀석, 말년 휴가도 못 가고 전역하는 거니까 챙겨줄 수 있는 건 다 챙겨주고. 돈 부족하면 말해. 내가 카드 빌려줄 테니까."
전마등은 작게 웃었다.
"하하, 아닙니다. 분대원들끼리 모은 돈 있습니다. 그걸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아, 그리고 명찬이 녀석, 너무 많이 먹이진 마라."
"잘 못 들었습니다?"
많이 먹이지 말라는 말에 전마등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전역자들한테 이 행보관이 해주는 거 있잖아. 벌써 잊었냐."
"아, ‘그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알겠습니다. 적당히 먹이도록 하겠습니다."
1중대에만 있는 고유의 전역 행사 같은 게 있다.
행보관이 말한 게 바로 그거였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났다.
행정반으로 향하는 행보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전마등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병사들 챙겨주시는 건 행보관님밖에 없구나.’
만약 신병놀이를 했다가 중대장에게 걸렸더라면, 김명찬은 알짤 없이 영창행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행보관이 중간에 짬처리를 해줬기 때문에 휴가 자르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김명찬도 그걸 알고 있기에 군말 없이 행보관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어디······ PX 좀 털러 가볼까?"
전마등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 * *
곡괭이, 그리고 삽을 들고 정신없이 땅을 까다보니 순식간에 일과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저녁 식사 집합을 위해 사열대로 향하는 1분대 인원들.
전마등이 뒤를 돌아보면서 분대원들을 체크했다.
"다 왔지?"
"예!"
김명찬 병장도 맨 뒤에서 손을 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다들, 오늘 저녁 식사는 적게 먹어라.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김뱀도. 짬밥에 미친 사람처럼 막 먹지 말고. 한두 숟가락만 먹고 나와."
"잉? 왜?"
다른 분대원들과 다르게 김명찬은 전역 회식에 대해서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그냥 동생 말만 믿고 따르면 돼."
"뭐······ 알았다."
어차피 오늘 저녁 메뉴는 김명찬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김명찬에게는 마침 잘 된 셈이었다.
* * *
저녁 7시 반이 되자마자 김명찬을 제외하고 1분대는 다시 대대 식당으로 집합했다.
전역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준비가 다 되었다 싶을 무렵.
전마등이 이강진을 불렀다.
"강진아. 지웅이랑 같이 막사로 올라가서 슬슬 김뱀 불러와라."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황지웅에게 전마등이 한 말을 고스란히 전했다.
둘은 다시 1중대 막사로 향했다.
텅 빈 1생활관에 혼자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던 김명찬은 둘을 발견하자마자 섭섭함을 토로했다.
"야! 이 형 내일 전역하는데, 다들 나만 놔두고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사람 섭섭하게시리!"
"김명찬 병장님. 저희랑 같이 가시지 말입니다."
"응? 어딜?"
"가보시면 압니다. 자자! 강진아, 왼쪽 팔 잡아라. 나는 오른쪽 팔 잡을 테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필히 범죄자를 연행하는 장면인 줄로 알 것이다.
때마침 이들은 복도에서 소대장과 딱 마주쳤다.
김명찬이 소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대장님! 이 녀석들이 감히 하늘같은 말년병장에게 반기를 드는데, 어찌 합니까!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소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얌전히 갔다가 와라."
"소대장님까지 그러시는 겁니까?! 이, 이 녀석들! 놔라! 힘 하나는 더럽게 쎄 가지고!"
결국 대대 식당까지 함께 하게 된 김명찬 병장.
입구에 들어선 순간.
퍼엉! 펑!
갑자기 작은 폭죽 여러 개가 터졌다.
"김뱀, 전역 축하해!"
"축하합니다, 김명찬 병장님!"
라인혁이 휴가 나갔을 때 미리 구해온 생일파티용 폭죽을 터뜨리는 분대원들.
김명찬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식당 내부를 응시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을 중심으로 수많은 냉동식품과 과자, 음료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초코파이 케이크이었다.
그제야 김명찬 병장은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다.
"이 귀여운 녀석들! 그럼 그렇지! 너희가 이 형을 따돌릴 리가 없지! 고맙다, 정말 고마워!"
이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었다.
이강진은 선임들이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김명찬이 군생활을 나쁘게 해온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후임들에게 제대로 밉상을 보였더라면, 이런 파티도 안 챙겨줬을 것이다.
1분대원들끼리 가지는 김명찬 병장 전역 파티.
이강진도 훗날, 후임들에게 이런 환대를 받는 선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 *
마지막 저녁 점호가 시작되었다.
소대장은 각을 잡은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명찬을 바라봤다.
"명찬아."
"병장 김명찬!"
"그동안 군생활 하느라 고생 많았다. 오늘은 편히 쉬고, 내일 무사히 전역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소대장은 알지 못했다.
오늘, 김명찬은 편히 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점호가 끝난 뒤.
라인혁이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얘들아! 지금이다!"
"덮쳐!"
갑자기 김명찬의 머리 위로 모포와 포단이 날아들었다.
그러더니 김명찬을 향해 냅다 발차기를 날렸다.
"악! 이 씨발놈들아! 그만! 옆구리 맞았어! 아악!"
"명찬이 형, 우리가 곱게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이름하야 전역빵이다.
전역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포대기를 해서 그동안 쌓인 응어리(?)를 푸는 행사였다.
적당히 팼다 싶을 때.
병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돌아가 취침 준비를 마쳤다.
한편. 걸레짝이 된 김명찬은 고통어린 신음을 흘리면서 쌍욕을 퍼부었다.
"이 새끼들이······ 아구구, 허리야! 전역하기 전에 나 죽겠다!"
"평소 업보야, 김뱀. 그보다 행정반으로 가 봐. 행보관님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행보관님이? 당직도 아니신데 계시다고?"
"‘그거’ 있잖아."
"아······!"
전마등과 다르게 김명찬은 ‘그거’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아까와 달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행정반에 들어서는 김명찬.
"병장 김명찬!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소대장이 김명찬에게 손짓했다.
행보관실로 들어가 보라는 뜻이었다.
행보관실 문을 연 순간, 달콤한 치킨 냄새가 풍겨왔다.
"왔냐. 여기 앉아라. 한 잔 하자."
부대에 들어올 때 행보관은 치킨 한 마리와 맥주를 사들고 왔다.
전역하는 이가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행보관이 치맥을 사준다.
그것도 부대에서!
원래 부대 내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 그러나 군대라는 게 원래 안 들키면 그만이지 않은가.
행보관은 김명찬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말년휴가 잘라서 미안하다, 명찬아."
"에이. 아닙니다, 행보관님. 전 이 맥주 한 잔으로 다 잊었습니다. 그리고 행보관님이 평소에 저, 커버 엄청 많이 쳐주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짜식.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행보관과 김명찬.
김명찬에게 있어서 오늘 밤은 유독 길게 느껴질 거 같았다.
* * *
"충성! 신고합니다! 병장 김명찬은 2013년 3월 5일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전역 신고를 마친 김명찬.
중대장은 흐뭇한 미소로 김명찬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고생했다, 명찬아. 사회에 나가서도 부대에 있었던 것처럼 열심히 하고. 네가 1075대대 1중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행정반을 나와 막사 밖을 나섰다.
그때, 1중대 병력들이 좌우로 정렬해 김명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줬다.
행보관이 김명찬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된다."
김명찬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다, 얘들아. 솔직히 번지르르하게 말할 생각도 없고. 그리고 이 형이 원래 분위기 잡고 그런 스타일 아니라는 거, 다들 알잖아?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군생활 좆같은 거, 너희도 잘 알 거야. 서로 힘들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조금씩 이해하면서 지내도록 하자. 그러다 보면 언젠간 이 형처럼 전역할 때가 올 거다."
"그리고 휴가 나오면 형한테 연락하고! 술이라도 사주마!"
계단을 내려온 김명찬은 한 명씩 악수를 주고받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이강진의 손을 마주잡았을 때. 김명찬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동생하고 알고 지낸지는 얼마 안 되는데, 뭐랄까. 너랑은 묘하게 오랫동안 얼굴을 본 느낌이 든단 말이지."
회귀 이전의 기간까지 합치면 한 달은 될 거다.
김명찬이 그걸 알아차렸을 리는 없고.
이강진은 농담투로 물었다.
"욕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아무튼 앞으로 좆뺑이 열심히 치고. 1분대의 미래이자 희망으로서 무럭무럭 커가라."
"알았어. 열심히 해볼게."
위병소를 통과할 때까지 이강진과 1분대원의 시선은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았다.
잠시 뒤.
전마등 병장이 입을 열었다.
"막사로 올라가자, 얘들아. 오늘 작업할 게 산더미다."
"예, 알겠습니다!"
떠난 이는 떠난 이고.
남겨진 이들은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