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45화
제15화. 첫 외곽 근무 (1)
전화기 너머로 황민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진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 어머니는 충분히 잘 극복해나가고 있으니까 너는 네 군생활에만 집중하면 된다. 힘든 일 있으면 이 아저씨한테 언제든 말해주고.
"괜찮아요, 아저씨. 그리고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졌으니까요."
-응? 그, 그래?
"네. 아, 어머니 면회 오신다고 하던데. 아저씨도 같이 오시나요?"
이강진의 어머니는 차가 없다. 산골 깊은 곳까지 혼자 오려면 힘들 터. 그래서 한 번 떠보듯 물었다.
-아니. 나는 식당 지켜야 해서. 아마 난 못 갈 거 같다.
"아쉽네요. 제가 나중에 휴가 가면 아저씨 찾아뵐게요. 시간 내주세요."
-오냐. 안 그래도 나도 너한테 묻고 싶은 거 있고.
"음? 뭔데요? 혹시 저희 어머니에 관련된 건가요?"
-그, 그런 게 아니고.
당황하는 황민수의 반응. 황민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강진은 이 반응이 아주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헛기침을 하면서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황민수였다.
-어흠! 요즘 너 보니까 주식 좀 볼 줄 아는 거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나도 너한테 주식 한 번 배워볼까 하는데.
"아저씨도 주식하시잖아요?"
-그렇지. 근데 너만큼 잘하는 건 아니니까. 네가 저번에 정보 흘려준 종목들만 골라서 샀는데, 엄청 올랐더라. 상한가 찍고 난리도 아니었어. 어느 정도였냐면, 네 덕분에 저번 달만 하더라도 주식으로 번 돈이 식당 한 달 매출보다 더 컸어.
"오, 그래요? 축하드려요!"
-다 네 덕분이지. 허허!
황민수는 이강진의 말을 잘 믿어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강진이 흘리는 정보를 믿고 거기에 따라 움직였다. 그랬더니 웬걸. 그 앞에 보물 상자가 놓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나중에 너 휴가 나오면 내가 거하게 쏠 테니까 꼭 연락해라. 알겠지?
"물론이죠. 그럼 그때 뵐게요."
-오냐!
이강진은 그의 어머니가 많이 걱정됐지만, 그래도 인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황민수라든지 그의 어머니를 챙겨주는 여러 좋은 사람들이 곁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라면 이런 힘든 시기도 슬기롭게 극복해내리라. 여태껏 잘 견뎌오지 않았나.
‘나도 힘내야겠어.’
이럴 때일수록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의연해져야 한다.
* * *
전화 통화를 마친 후에 이강진은 황지웅과 함께 휴게실 들리게 되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명은 라인혁.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백우호였다.
특히 백우호의 목소리가 유독 컸다.
"아싸! 오날두! 역시 너밖에 없다! 크큭!"
반면 라인혁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전반전이 거의 끝나가는 시간대에 현재 스코어는 4대 0.
백우호가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이런 미친 녀석.’
속으로 이강진은 백우호에게 진한 욕지거리를 날렸다.
한편 라인혁은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이, 이상하다. 내가 이렇게 발릴 리가 없는데······ 패드가 말썽인가? 왜 그러지?"
"라인혁 상병님. 패드가 이상한 게 아니라 실력차······ 읍!"
갑자기 등장한 이강진이 백우호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뭐야. 강진이, 너도 왔냐? 지웅이도 있네."
"일병 황지웅! 신병 전화 통화 시켜주려고 잠깐 나왔습니다."
"흠, 그래?"
그때 이강진이 백우호 대신 말을 이었다.
"이병 이강진! 라인혁 상병님 패드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우호랑 한 번 바꿔서 해보시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우호야, 패드 바꿔보자."
백우호는 이강진을 매섭게 노려봤다.
목소리를 죽인 채로 그에게 항의했다.
‘야! 패드 문제는 개뿔! 오히려 라인혁 상병님이 사용하던 패드가 더 좋은 거라고! 이건 실력차이라니까?’
‘미친놈아, 잘 들어. 라인혁 상병님한테 게임 이길 생각하지 말고 그냥 얌전하게 져라. 가급적이면 큰 점수 차이로. 알겠어?’
‘왜! 내가 충분히 이기고도 남는데!’
‘이제 막 자대 전입한 이등병이 상병 이겨먹으면 그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 상관없다면 안 말리마.’
‘······.’
게임에 너무 열중해버린 나머지 백우호는 잠깐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군대는 계급, 짬이 곧 법이다.
아무리 FIFA 프로게이머가 온다고 한들. 선임과 후임의 벽을 극복하진 못하리라.
백우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반전이 되자마자 점수 차이는 급속도로 좁혀졌다.
5대 5. 동점 상황이 되었다.
뒤에서 황지웅과 이강진이 일방적으로 라인혁의 편을 들어줬다.
"역시 라인혁 상병님이십니다! 중대 FIFA 챔피언, 라인혁 상병님! 최고!"
"이 정도면 프로게이머로 데뷔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하하, 그래? 내가 잘하긴 하지! 자, 우호야. 이제부터 대 역전극 써내려갈 테니까 바짝 긴장해라!"
이거야말로 간신 모드!
이 상황 속에서 백우호는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역전극 시나리오를 써내려가는 건 라인혁, 본인이 아니다.
작가 이름은 상병. 즉, 그의 계급이다.
* * *
후반전 추가 시간까지 모두 끝났다.
결과. 8대 5.
이쯤 되니 백우호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군대에서는 넘을 수 없는 계급의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패드를 내려놓은 백우호는 곧바로 맹 연기를 펼쳤다.
"역시 1중대 챔피언이십니다! 감히 제가 어떻게 해볼 단계가 아닌가 봅니다. 크흑······!"
"짜식. 그래도 좋은 승부였다. 내가 제자로 받아줄 테니까 시간 날 때마다 나한테 FIFA 배우러 와라. 내가 성심성의껏 알려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선임의 기분이 좋아야 후임이 편해진다.
흡족한 미소를 짓는 라인혁과 함께 복귀하는 후임 3인방.
뒤에서 이강진이 백우호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고생했다는 뜻이었다.
백우호는 그런 동기를 향해 힘없이 웃었다.
생활관으로 돌아온 뒤.
이강진은 황지웅에게 물었다.
"황지웅 일병님. 저희 어머니가 다음 달에 면회 오고 싶다고 하시던데. 분대장님에게 보고 드려도 됩니까?"
"어. 괜찮아. 분대장님 오시면 말씀 드려."
"예, 알겠습니다."
때마침 화장실에 볼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던 전마등 병장이 등장했다.
이강진은 바로 그를 찾았다.
"전마등 병장님."
"응? 왜, 강진아."
"다음 달에 저희 어머니께서 면회 오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만······."
"아, 그래? 언제쯤?"
"3주차 때 오실 거 같습니다. 날짜는 토요일입니다."
전마등은 분대장 수첩을 꺼내서 이강진이 하는 말을 빠르게 받아 적기 시작했다.
"오케이. 행보관님한테 내일 말씀드릴게. 아들 얼굴 보고 싶어서 오시는 거지?"
"그게······."
순간 이강진은 갈등했다.
그의 어머니가 와서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강진이 꽁꽁 숨겨도 언젠간 간부들도 알게 될 것이다.
간부들과 전마등은 이강진의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말을 안 했다가 나중에 오히려 이거 가지고 ‘왜 보고 안 했냐!’ 하고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실제로 회귀 이전에 이강진은 이것 때문에 뭐라 한 소리를 들은 바가 있었다.
신병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간부들은 이걸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신병 관리 소흘이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잔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물론 사정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군대가 이강진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쓴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입으로 먼저 말을 하는 게 좋겠어.’
이강진은 결국 오픈을 하기로 했다.
"이혼 이야기 하시려고 오시는 거 같습니다."
"이혼?"
순간 전마등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사이가 안 좋으시다고 하셨지?"
"예. 이혼 도장만 안 찍었을 뿐, 사실상 이혼 관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머니 쪽에서 먼저 결심을 하신 모양인 거 같습니다."
"그랬군. 너는 괜찮지?"
"저 말씀이십니까? 예,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속 시원합니다. 그런 쓰레기······ 죄송합니다. 그런 사람은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 이제부터 안 보게 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 중입니다."
이강진의 말대로 그의 얼굴에 근심걱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전마등이 보기엔 그랬다.
"알았어. 일단 면회는 특별한 일 없으면 무조건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돼. 대신 면회 날짜 변동되거나 그럴 거 같으면 미리 내게 말해주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충성!"
"충성."
이강진을 보낸 후.
‘이혼이라······ 골치 아프네.’
전마등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평일 아침이 밝았다.
오전 일과를 위해 행보관은 작업 인력을 분배했다.
"명찬아."
"병장 김명찬!"
행보관의 부름에 김명찬은 사색이 되어 이등병처럼 관등성명을 힘 있게 외쳤다.
"너가 전역 언제 하는 거였더라?"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다음 주라······ 한 10일 정도 남았구먼."
"예, 그렇습니다!"
"그래. 10일 남았으면 막사에서 쉬다가 전역하면 편하겠지. 안 그러냐."
"행보관님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갑자기 기대감이 물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행보관이 저번 주에 자기 따라다니면서 온갖 작업에 시달린 자신을 배려해주려는 거 아닐까?
이제 행보관의 노예 타이틀을 떼어내도 괜찮을까?
희망의 불씨가 보이기 시작했으나.
"쉬긴 뭘 쉬어!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먼! 오늘은 철조망 보수 작업하러 갈 테니까 잔말 말고 옆으로 빠져 있어라!"
그럼 그렇지.
애써 눈물을 삼키는 김명찬 병장이었다.
다른 인력들도 모두 분배를 마쳤다.
행정반으로 돌아온 행보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마등이 행보관을 찾았다.
"행보관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그러냐."
"조용히 말씀드려야 할 내용입니다."
"······."
행보관은 전마등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이들이 향한 곳은 바로 행보관실이었다.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이런 이야기는 대게 좋지 않은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기에 행보관은 이렇게 물어본 것이다.
역시 행보관. 그의 감은 정확했다.
"이강진 이병이 다음 달에 면회 신청했습니다."
"면회? 그거야 신청할 수도 있지."
"어머니가 찾아오신다고 하시는데······ 이강진 이병의 부모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행보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얼마 전에 두 분이 이혼 도장 찍었다고 합니다. 그거 이야기해주려고 오신다고 합니다."
"음······ 그래?"
확실히 전마등이 행보관을 따로 찾아올 만한 이야기였다.
"강진이, 관심병사로 올려두는 게 좋지 않습니까?"
이건 관심병사 각이다.
하나 행보관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강진이라면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정말입니까?"
"애초에 강진이는 이혼을 바라고 있던 입장이잖냐. 나하고 면담할 때에도 그랬고. 그 녀석 성격 고려해보면,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할 거다."
행보관의 말 대로였다.
이강진의 표정은 오히려 밝았다. 불과 어제의 일이었기에 전마등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진이는 이것 때문에 자기가 관심병사로 올라가는 걸 더 싫어할 녀석이야. 일단 마등이, 네가 강진이 신경 써서 봐줘라. 딱 그 정도만 하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당직, 내가 맡을 거니까 저녁 때 면담 한 번 해보마. 너무 걱정하진 마라."
"예."
이강진은 약한 남자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군생활을 잘해낼 인재다.
행보관은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