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42화
제15화. 바깥 공기 (1)
행보관이나 소대장의 경우에는 신병이 들어와도 장기자랑 같은 건 안 시켰었다. 부대 분위기가 나쁘다느니 뭐니 하는 그런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성향 차이였다.
하나 통신반장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당직을 맡을 때 신병이 있다면, 자기소개를 겸해서 장기자랑까지 꼭 시켜보는 스타일이었다.
피곤한 타입이다.
한숨을 삼키는 이강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건 통신반장도 여전했다.
황지웅 일병이 두 신병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
"귀찮겠지만, 아무쪼록 준비 잘 부탁한다."
"이병 이강진. 예, 알겠습니다."
"이병 백우호!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음? 우호는 자신감이 넘치는데?"
보통 장기자랑을 시키면 자신감이 없어지게 마련이다. 하나 백우호는 반대였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가 이래봬도 래퍼 지망생입니다."
"어쩐지. 그래서 장기자랑 준비하라고 해도 그렇게 자신만만이었구먼."
"저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확! 발라버리고 오겠습니다!"
도대체 뭘 발라버리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자신감이 넘치는 백우호의 모습에 선임의 마음은 든든해졌다.
그렇다면 엘리트라 불리는 이강진은?
"강진이는 어때. 할 만한 거 있어?"
"예.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역시 준비되어 있는 신병, 이강진다웠다.
이강진의 말을 유독 신경 쓰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백우호였다.
"뭔데? 너, 장기자랑이라고 할 만한 게 있냐?"
"왜 없어. 당연히 있지."
"신병교육대에서 장기자랑 시켜도 가만히 있었잖아."
"그때는 나한텐 상점이 별로 필요 없었으니까 안 나섰던 거고."
지금은 달랐다.
할 때는 하는 남자.
그가 바로 이강진이다.
* * *
세족식 이후에 가지는 두 번째 통합 저녁 점호.
통신반장 권주명 중사가 등장하자, 일동 차렷 자세가 되었다.
"오늘 저녁 점호는 미리 예고한대로 우리 귀여운 신병들 장기자랑 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그럼 신병들, 일어섯!"
"이병 이강진!"
"이병 백우호!"
"이병 김철!"
나란히 일어서는 1월 군번들.
권주명 중사는 헛기침을 하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장기자랑이 사실은 많이 부끄러운 거긴 해.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은 창피하고 쑥스러운 거니까. 그래도 우리 신병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다. 한 번만 쪽팔리면 된다. 선임들에게 ‘제가 이병 XXX입니다!’라고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둬야 앞으로 너희가 편해질 거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말은 참 그럴싸하다.
그러나 이강진은 장기자랑 시키는 걸 좋게만 볼 순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간부가 하라는데, 싫다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기왕 하게 된 거,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권주명 중사가 말한 것처럼 그냥 한 번 잠깐 미치면 된다.
"그래. 누가 먼저 해볼까?"
"이병 백우호!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백우호가 손을 번쩍 들자, 선임 병사들이 ‘오~ 역시 1분대!’ 하고 감탄을 했다. 덩달아 전마등 병장의 어깨가 올라갔다.
적극적인 신병일수록 호감도를 얻기 쉽다.
백우호는 장기자랑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숟가락 하나만 주시겠습니까?"
"어렵지 않지. 근데 뭐하려고?"
"마이크 대신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사회에서 랩 좀 하다가 왔습니다."
말 그대로 백우호의 장기인 ‘랩’을 선보이려고 했다.
랩이라는 말에 선임들은 다시 열광했다. 보통은 노래를 부르곤 하는데, 랩은 또 신선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드랍 더 비트!"
백우호는 한 손엔 숟가락을,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면서 자체적으로 리듬을 만들어냈다.
선임 병사들도 백우호의 박자에 따라 손뼉을 치면서 호응을 해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랩.
백우호는 자신이 창작한 랩이 아닌 한때 유행했던 대중가요를 선곡했다. 호응을 이끌어내려면 창작 랩보다는 모두가 잘 아는 대중적인 노래를 이용하는 게 좋다. 그래서 일부러 잘 알려진 노래로 선곡을 한 것이다.
빠른 리듬 속에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랩.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백우호의 랩은 선임들의 귀를 자극했다.
촤악! 양 손을 수평으로 넓게 펼치면서 화려한 동작으로 마무리까지!
완벽한 무대였다.
짝짝짝!
병사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이욜! 제법인데?"
"1분대에 인재가 하나 들어왔네!"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이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바로 김철이었다.
"이병 김철! 춤추겠습니다!"
"무슨 춤 출 건데?"
"유비걸스의 텔미텔미입니다!"
08년도에 전국을 강타했던 바로 그 노래!
텔미텔미를 모르는 군인은 없었다. 곡이 정해지자마자 노래방 기계처럼 바로 노래가 튀어나왔다.
"텔미! 텔미! 테테테테테텔미!"
김철은 어설프게나마 춤을 췄다. 행정분과 선임 중 한 명이 필살기랍시고 급하게 알려준 티가 났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다.
다음, 드디어 이강진의 차례가 도래했다.
이강진이 준비한 건 의외로 본격적이었다.
"마술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술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병사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맺히기 시작했다.
장기자랑 중에서 마술을 보여줬던 신병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우호의 랩보다 더 보기 힘든 장기자랑이 튀어나왔다.
20대에 이강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마술사의 보조 역할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 마술사로 활동하던 남자가 이강진에게 여자 꼬실 때 사용하면 잘 먹힐 마술 다섯 가지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이강진은 이것을 응용해보기로 했다.
탄약반장에게 잠시 빌린 손수건과 5백 원짜리 동전.
"자, 이제부터 5백 원을 손수건으로 감싸겠습니다."
수건으로 5백 원을 감싼 뒤. 이강진은 몇몇 선임들에게 5백 원이 제대로 있는지 만져보라고 시켰다.
그런 뒤.
"하나둘셋을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둘셋!"
이강진은 신호에 따라 손수건을 촤락! 펼쳤다. 그러자······.
"엇?!"
"뭐야, 동전 어디 갔어?"
동전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 이강진이 가장 앞에 있는 김명찬 병장에게 다가갔다.
"김명찬 병장님. 전투복 상의 왼쪽 주머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주실 수 있습니까?"
"내 옷 주머니? 잠깐만······ 헉!"
사라진 줄 알았던 5백 원이 김명찬 병장의 상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강진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앞선 장기자랑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퍼포먼스가 너무 좋았다.
이쯤 했으면 통신반장도 만족했으리라.
통신반장은 신병들을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
"이번 신병들은 뭔가 느낌이 좋은데? 행정분과하고 1분대, 애들 고생했으니까 앞으로 잘 챙겨줘라."
"예, 알겠습니다!"
통신반장에게 점수를 톡톡히 따둔 신병들.
오늘 하루도 이렇게 해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 * *
신병훈련소와 자대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이 되어도 신병훈련소는 훈련병들에게 자잘하게 뭔가를 계속 시킨다. 수양록 작성이라든지 청소, 장구류 정비 등을 지시하면서 다른 생각을 못하게끔 계속해서 굴린다.
하지만 자대는 그런 거 없다.
당직사관이 지랄 맞은 성격의 사람이 아닌 이상, 확실한 휴식을 보장한다.
특히 토요일이 진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요일은 종교행사가 있지만, 토요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쉬면 된다.
이 쉬는 날을 이용해서 이강진과 백우호는 서일주 이병과 함께 부대 주변 시설 탐사에 나섰다.
"여기가 휴게실. 잘 기억해둬."
"예, 알겠습니다."
휴게실에는 병사들이 즐길 수 있는 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코인 노래방.
두 번째. 비디오 게임기.
세 번째. 판타지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
서일주는 두 사람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줬다.
"오직 개인정비 시간에만 이것들을 이용해야 해. 그리고 너희는 대기기간이니까 혼자서 이런 것들을 이용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되고."
도중에 백우호가 물었다.
"질문 있습니다."
"뭔데?"
"비디오 게임도 동전 넣고 하는 겁니까?"
서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천 원에 30분. 게임 타이틀은 여기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거 하면 돼. 우리 부대는 주로 ‘FIFA 12’를 많이 하곤 해. 축구 게임은 잘 하나?"
"어느 정도 합니다."
"그래? 라인혁 상병님이 좋아하시겠네."
그밖에 헬스장도 있었지만, 사실 말이 헬스장이지 그냥 천막 안에 아령 몇 개 넣어놓은 게 전부였다.
이로서 부대시설은 간단하게 돌아봤다.
나머지는 병사들에게 힐링 타임을 제공해주는 그곳.
PX가 남아 있다.
서일주는 신병들을 데리고 행정반으로 향했다.
"충성! 이병 서일주, 신병들 데리고 PX 다녀오겠습니다."
당직사관을 맡은 소대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조심해서 내려가고. 말판 옮겨두는 거, 잊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석판이 있다. 막사를 벗어날 때에는 항상 이 자석판을 해당 시설로 옮겨둬야 한다.
이건 외곽근무를 나갈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병사들의 현재 위치를 행정반에서 늘 파악하고 있어야 갑작스런 상황이 발생해도 금세 대응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오분대기조, 줄여서 오대기에 속한 병사들은 늘 막사 주변에 있는 편이 좋다. 당직사령 중에서 간혹 오분대기조 상황을 걸어서 일부러 이들을 시험해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 주만 하더라도 오대기는 1분대였다. 이번에는 2분대의 차례다.
그들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병사들과 다르게 항상 전투복을 입고 있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오대기를 달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PX로 향하는 길.
병사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이중에서 특히 백우호의 발걸음이 가장 가벼웠다. 자대 PX는 처음 가보기 때문이었다.
이강진은 수도 없이 많이 가 봤다. 그래서인지 별로 감흥이 없었다.
"여기가 대대 PX야."
1075대대 PX는 신병교육대 PX에 비해 약 1.5배가량 컸다.
게다가 물품도 많았다.
신병교육대에서 보지 못했던 다양한 과자, 냉동식품들이 이강진과 백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백우호의 표정이 굳었다.
"야, 강진아.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초코파이만 몇 상자 사서 억지로 먹이는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았냐? 다 먹을 때까지 생활관으로 안 돌려보낸다고 하던데······."
"그런 부조리는 이제 없어. 그리고 서일주 이병님이 그럴 사람도 아니고. 너도 봐서 알잖아?"
"음, 하긴. 그렇지."
예전 군대라면 모르겠지만, 이강진이 아는 1075대대는 그런 부조리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때마침 서일주가 어깨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이 맞선임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줄 테니 마음껏 골라보거라!"
이 말에 백우호는 아까의 불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양인지 금세 목소리 톤을 높였다.
"역시 서일주 이병님! 최고입니다!"
먹을 거 사주는 사람이 갑(甲)이다.
이 말은 군대에서도 통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