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40화
제14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2)
오전 집합이 끝나자마자 최승헌 병장은 바로 막사로 향했다.
그전에 소대장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승헌아."
"병장 최승헌."
"우리는 탄약고 보수 작업 있으니까 애들 준비시키고 바로 사열대로 나와야 한다."
"예. 공구 챙겨서 따로 집합하겠습니다."
"오냐."
소대장이 사라지자마자 최승헌은 같이 탄약고 보수 작업 인원으로 분류된 후임병을 불렀다.
"길준아."
"상병 도길준."
"니가 애들 작업복으로 환복시키고, 도구 챙기게 해서 사열대 앞으로 집합시켜라. 난 적당히 짱박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소대장님이······."
"길준아."
최승헌 병장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노골적으로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내가 이 짬밥에 삽, 곡괭이 들어야겠냐? 꼭 그 모습 보고 싶어?"
"아닙니다. 그럼 제가 애들 인솔하고 가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런 건 눈치껏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나는 그냥 조만간 집에 갈 사람 취급하면 되는 거야.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대신에 추진할 때 내 것도 챙겨서 따로 보내고. 나, 냉동 좋아하는 거 알지? 그럼 열심히 해라."
최승헌 병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길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도 안하면서 추진한 것은 추진한 것대로 챙겨먹으려는 속셈인가."
고생한 사람 따로 있고, 맛있는 거 먹는 사람 따로 있다.
최승헌 병장에 대한 평가는 부대 내에서 굉장히 좋지 않은 편이었다.
병장 되면서부터 후임들에게 멋대로 돈을 빌리고, 그 돈을 갚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도 김명찬은 후임들의 돈을 멋대로 갈취하진 않았다. 지킬 건 지켰다. 하지만 최승헌의 행보는 막장 그 자체였다.
정길주도 최승헌에게 3개월 전에 빌려준 5만 원을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군인에게 5만 원이 얼마나 피 같은 돈인가.
"모기가 따로 없네."
남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모기.
최승헌은 그런 남자였다.
* * *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최승헌 병장.
원래는 3생활관으로 가서 짱박힐 생각이었다.
하나 1생활관을 지나치려고 할 때.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가만. 신병들이 여기로 들어가던 거 같던데.’
1분대 신병이 두 명, 행정분과 신병이 한 명.
이렇게 포진되어 있었다.
‘어디. 재미 좀 보다가 갈까?’
최승헌 병장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무리 최승헌이라 하더라도 이등병을 직접적으로 괴롭힐 수는 없다. 심지어 이제 막 자대 배치를 받은 대기기간 신병을 괴롭히는 건 ‘나, 영창 보내주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 최승헌의 목표는 신병들이 아니었다.
신병들을 이용해서 1분대를 괴롭힌다.
꼬투리 잡을 만한 것들을 최대한 잡은 후에 나중에 1분대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야, 신병 교육 똑바로 안 시키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 전역할 때까지 1분대 새끼들은 지옥을 맛보게 해줄 테다!’
각오를 다신 최승헌은 1생활관 문을 거칠게 열었다.
갑작스런 최승헌의 등장.
백우호와 김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이강진은 달랐다.
"충성."
이강진이 대표로 일어나 그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언제, 어디서든 상급자를 보면 거수경례를 해야 한다. 이것은 기본 상식이다.
‘오호. 깜짝 놀래키면 당황할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1차 공격은 이강진의 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 꼬투리 잡기 작전이 끝난 건 아니었다.
"반갑다, 신병들. 내가 누군지 아나?"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최승헌은 전투복 상단에 있는 자신의 주기표를 가렸다.
신병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교육이 바로 선임들의 관등성명 외우기다.
며칠 안에 다 외울 수는 없을 터. 그걸 알면서도 최승헌은 일부러 신병들에게 자신의 관등성명을 물었다.
왜냐?
1분대를 괴롭히기 위한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그러나 최승헌이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다.
"이병 이강진. 소총소대 3분대 소속 최승헌 병장님이십니다."
"······!"
순간 최승헌은 헛숨을 삼켰다.
이강진. 그가 정답을 말했기 때문이다.
신병들과 최승헌은 특별히 대면을 한 적이 없었다. 마주칠 일도 없었고, 엮일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최승헌의 이름과 소속 분대까지 알고 있으니, 할 말이 없어지는 게 당연했다.
최승헌은 쓴웃음을 흘리면서 주기표를 가렸던 손을 내려놓았다.
"똑똑한 병아리가 있네. 뭐, 좋아."
어쩌면 최승헌이 손으로 주기표를 가리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슬쩍 보고서 외웠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그럼 우리 3분대 분대장이 누굴까?"
최승헌은 함정을 두 개를 팠다.
첫 번째. 앞서 물었던 것처럼 관등성명 테스트.
그리고 두 번째.
압존법을 제대로 사용하는가, 마는가.
하지만 이강진을 너무 얕봤다.
"이병 이강진. 박이율 병장입니다."
압존법에 익숙하지 않다면, 혹은 병장들의 군번을 알고 있지 않다면 박이율 병장‘님’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강진은 그렇지 않았다.
박이율 병장이 최승헌보다 후임이라는 걸 이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봐라?’
최승헌의 테스트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최승헌이 원하는 패턴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 녀석, 그 짧은 시간에 선임들 관등성명에다가 몇 월 군번인지도 다 외운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고작 2일차에 이걸 다 외우는 신병은 여태껏 없었다.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전마등 병장조차 선임들 이름, 계급, 군번을 다 외우는데 5일이 걸렸다. 그 기록을 벌써 뛰어넘은 것이다.
‘미친 녀석!’
이를 바득바득 가는 최승헌.
하나 아직 한 발 남았다.
"오늘의 암구호는?"
"이병 이강진! 오늘의 암구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어에 도라지, 답어에 등대! 이상입니다!"
"저녁 식단은?"
"이병 이강진! 삼계탕, 깍두기, 김, 그리고 부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옵니다!"
"오늘 당직사관님은?"
"통신반장님이십니다!"
미친 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완벽해도 너무 완벽했다!
최승헌이 이 기습 테스트를 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완벽한 대답들이계속 이어졌다.
경악하는 건 비단 최승헌뿐만이 아니었다.
동기인 백우호와 김철도 같았다.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언제 이런 것들을 다 외우고 있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
최승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그는 표정 관리를 잘 못한다. 자신이 의도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불편한 감정이 그대로 얼굴 표정에 다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이강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또라이 녀석아. 내가 그런 허접한 꼬투리 잡기에 당하겠냐?’
1분대를 괴롭히기 위해서 일부러 신병들을 이용할 생각이라는 건 이강진도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뚫리지 않는 방패, 이강진이 있는 이상 최승헌의 작전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빈틈은 분명 존재했다.
"다른 녀석들한테도 물어볼까?"
이강진은 완벽하지만, 백우호와 김철은 평범한 신병에 불과했다.
특히 백우호가 많은 공격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분대 소속 신병이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백우호.
그러나 하늘은 이들을 져버리지 않았다.
1생활관의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최승헌 병장님! 어디 가셨나 찾았지 말입니다!"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전마등 병장.
그의 등장 덕분에 최승헌의 질문 공세를 끊을 수 있었다.
‘휴, 다행이군.’
이강진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칼 같은 타이밍에 등장한 전마등과 박이율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한편 두 사람의 등장에 최승헌은 혀를 찼다.
"왜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다 들었습니다. 분리수거 안 하고 무단으로 쓰레기 버린 거, 최승헌 병장님이 한 짓이라고."
최승헌은 어떻게 나올까.
아니라고 부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맞아. 내가 했다. 왜?"
오히려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자세로 나왔다.
이강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또라이 맞네.’
* * *
최승헌이 오히려 인정을 해버리니까 전마등은 어이가 없었다.
"본인이 잘못한 거, 인정하시는 겁니까?"
"아니, 인정은 안 하는데."
또 예상에 빗나간 대답이 나왔다.
"니들이 먼저 우리 3분대한테 시비 털었잖아."
"경고카드 준 거 말입니까? 그건 최승헌 병장님하고 서여운 일병이 야간 근무 시간에 단체로 졸아서 줬던 거 아닙니까?"
그때 당직이었던 전마등 병장은 당직사관이었던 소대장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다량의 경고카드를 주게 되었다.
최승헌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니들 때문에 내가 병장 달고도 분리수거장에서 일이병 녀석들하고 씨발 그 좆같은 쓰레기 치우면서 지냈잖냐!"
강한 분노를 드러내는 최승헌 병장.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최승헌은 씨익 웃었다.
"그래서 니들도 어디 좆되라고 한 거다. 내가 당한 거에 비하면 약과잖아? 설마 그런 걸로 징징대고 그러냐?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엄살이 아니라 정당한 걸 요구하는 겁니다. 분리수거장이 왜 있습니까? 쓰레기 분리수거 하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행보관님께서 분명 병력들 집합시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분리수거 제대로 안 하고 버리는 병사 있으면 경고카드 5장 줄 거라고. 최승헌 병장님이 저지른 횟수만 따진다면, 50장은 받고도 남을 겁니다."
아무리 경고카드를 많이 받아도 보통 한 달에 20~30여 장 정도 받는 것이 평균이다. 최승헌의 행동은 그만큼 도가 많이 지나쳤다.
그러나 최승헌에겐 다 방법이 있었다.
"전마등. 너, 요즘 오냐오냐 하니까 선임이 물로 보이지?"
"······."
최승헌은 전마등보다 선임이다.
군대는 계급과 짬이 전부다. 최승헌이 이것들을 앞세워 밀어붙이면, 전마등이라 하더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진다.
"야, 박이율."
"벼, 병장 박이율."
"니 입으로 말해봐라. 여기서 누가 가장 계급이 높은지. 누가 선임인지."
"······최승헌 병장님이십니다."
동기라도 이건 커버를 쳐줄 수가 없었다.
하극상을 일으킬 순 없기 때문이었다.
이강진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열심히 노력해봤지만, 결국 짬의 벽을 넘진 못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등장했다.
1생활관 문이 재차 열렸다.
"어휴, 행보관님도 너무하시지. 어제 벌목 작업 해놓고 또 하라니."
김명찬 병장이 한숨을 내쉬면서 터벅터벅 걸어왔다.
순간 생활관이 침묵으로 휩싸였다.
털썩.
매트리스 위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김명찬 병장이 최승헌을 응시했다.
"승헌아."
"병장 최승헌."
"목소리가 좀 크더라?"
"······들으셨습니까?"
"어. 듣기 싫어도 알아서 들리더라고. 그래도 다행이야. 니가 병신짓 벌인 것도 다 알게 되었으니까."
중대 왕고는 3분대 소속 최승헌 병장이 아니다.
1분대 소속, 김명찬 병장이다.
"야, 최승헌."
"병장 최승헌!"
김명찬 병장. 이빨 빠진 줄 알았던 말년 호랑이인 줄 알았으나······.
"뒤질래?"
날카로운 발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