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38화
제13화. 노란 견장 (2)
이강진과 백우호는 서일주와 함께 1분대 담당 청소구역인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분리수거장을 처음 본 백우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좆됐구나!’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장소였다.
말이 분리수거장이지, 그냥 쓰레기장이었다.
양이 어마어마했다.
하기야. 100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하루에 배출하는 쓰레기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할 터. 이것들을 고작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 전부 일일이 정리한다고 생각하면······ 그 고충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래서 모든 분과들이 분리수거장을 기피하고 싶어 한다.
물론 이강진이 앞으로 속하게 될 1분대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지난달에 경고 카드를 너무 많이 받아버렸다. 남은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만 했다.
서일주 이병은 이강진과 백우호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아침에 딱 보고 분류 안 된 쓰레기 있으면 그걸 분류하면 돼. 이런 거 말이야."
분명 플라스틱이라고 쓰여 있건만. 커다란 쓰레기 보따리 안에 깡통 캔 몇 개가 들어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하······ 시발.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저번 주부터 자꾸 분리를 안 하고 그냥 던져두네."
착해 보이던 서일주 이병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강진이 서일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분리수거 안 하는 사람이 계속 안 하는 모양인가 봅니다?"
"어. 패턴도 똑같아. 플라스틱 분류함에 깡통 계속 던져놓는 거 말이야. 이게 저번 주부터 계속 되고 있거든. 이거, 우리 엿먹이려고 일부러 하는 거 같아. 범인 찾아내면 바로 경고 카드 몰빵시킬 수 있을 텐데······ 나보다 선임일 거 같아서 그것도 못하고. 어휴!"
"전마등 병장님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두시는 건 어떻습니까?"
서일주가 못한다면, 병장인 전마등이 직접 하면 되지 않은가.
"말이야 했지. 그런데 좀처럼 범인을 못 찾고 계시는 거 같아. 우리가 24시간 분리수거장을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일과 시간, 개인정비 시간 다 내팽개치고 범인 잡겠다고 하루 종일 분리수거장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서일주 이병이 혼잣말을 흘렸다.
"범인만 잡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서일주가 했던 말대로 그 분과에게 경고 카드를 다 몰아줄 수 있다. 대역전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 터.
이강진은 생각에 잠겼다.
‘범인이 누구지?’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이강진이라 하더라도 20여년이 지난 모든 일들을 하나 같이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기억에 유독 남는, 혹은 굵직굵직한 일들만 기억할 뿐.
‘과거로 회귀할 줄 알았더라면 미리 일기장이라도 써둘 걸 그랬네.’
의미 없는 후회가 들었다.
* * *
오전 9시.
사열대 앞으로 집합한 병사들 앞에 행보관이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등장했다.
"다들 모였냐."
"예!"
"어디 보자······ 오늘은 벌목 작업 좀 하자."
벌목 작업이라는 말에 병사들은 무의식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인원을 쭉 훑어보던 행보관이 어느 한 인물을 가리켰다.
"김명찬."
"병장 김명찬!"
"일단 넌 무조건 작업 인원으로 분류할 거니까 미리 앞으로 나와 있어라."
"······."
한숨을 몰래 삼키며 알아서 따로 줄을 서는 김명찬 병장.
그렇게 작업 인원을 분류하던 와중에 행보관은 이강진과 백우호에게 손짓했다.
"신병 셋."
"이병 이강진!"
"이병 백우호!"
"이병 김철!"
"너희 셋은 조금 있다가 중대장님하고 면담 일정 잡혀 있으니까 1생활관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세 명 다."
"예, 알겠습니다!"
아직 이들은 중대장을 만나보지 못했다.
어제 저녁. 급하게 상급 기관으로부터 호출을 받게 된 1중대 중대장, 윤형인.
늦은 시간까지 그곳 간부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본인의 부대로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행보관의 말대로 1생활관에 따로 모이게 된 신병 셋.
백우호는 김철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철아. 행정분과는 청소구역 어디야?"
"우리? 행정반인데."
칭찬카드를 몇 장 받아야 행정반 청소구역을 맡을 수 있을지. 백우호는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전에 이강진이 먼저 그의 말을 가로챘다.
"행정분과는 행정반 청소 고정이야. 칭찬, 경고카드를 몇 장을 받든 상관없어."
"아, 그래?"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또 미래 지식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백우호는 어떻게 그걸 알게 되었는지 묻진 않았다. 거기까지 궁금해 하진 않았던 것이다.
"좋겠다. 우리도 편한 구역 맡고 싶은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백우호.
그는 오늘 분리수거장 청소 구역을 맛보기로 경험해보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긴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분리수거장에 CCTV 같은 건 안 달려 있나?"
이강진이 피식 웃었다.
"군대에서 그런 걸 바라지 마. 그리고 범인이 잡히기는 할 거야."
"진짜?"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겠지.’
이강진은 그게 걱정이었다.
군대에선 계급, 그리고 짬이 최고다.
설령 1분대가 분리수거를 안 하는 범인을 잡았다 하더라도 그 범인이 전마등 병장보다 짬이 높은 병사라면 손을 댈 방법이 없어진다.
김명찬 병장이라면 가능할 테지만······.
‘기대는 하지 말자.’
김명찬 병장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기 전역일이 언제 올지. 그것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다. 분대끼리의 정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을 터.
그래서 이강진은 김명찬 병장의 존재를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냥 조용히 있다가 전역하는 것이 김명찬 병장이 후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일지도 모른다.
‘시기가 좀 이르긴 하지만, 행보관에게 미리 작업 좀 쳐둘까?’
이강진과 행보관은 ‘주식’이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
오늘도 행보관은 신문을 보면서 ‘역시 팔아버렸어야 했어, 망할!’이라고 작게 외쳤다.
이강진이 정보 몇 개만 흘려줘도 행보관은 금세 이강진의 편으로 돌아설 터.
‘원래 병사 싸움에 간부를 대동하는 건 반칙이지만······.’
하나 싸움을 먼저 걸어온 상대방에게 매너 같은 걸 차릴 이유는 없다.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이강진은 행보관에게 열심히 작업을 쳐두기만 하면 된다.
머릿속으로 미래의 일까지 미리 계산해두는 동안.
1생활관의 문이 열렸다.
"신병들. 중대장님 오셨으니까 행정반으로 와라."
"예, 알겠습니다."
자대 전입 2일차.
드디어 1중대의 넘버원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 * *
윤형인 대위의 안색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늦은 저녁까지 상급 부대에서 시달리다가 어제 늦은 시간에 복귀한 탓이었다.
원래는 일정이 이렇게 길어질 게 아니었다.
갑자기 1075대대 옆 부대에서 큰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이 탓에 윤형인 대위의 일정은 모두 꼬여버렸다.
이등병이 갑자기 탈영을 해버린 것이다.
금방 붙잡히긴 했지만, 그 여파는 컸다.
이것 때문에 윤형인 대위는 오늘, 후임급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마음의 편지를 받을 계획이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신병들 면담을 진행하려고 하는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대신, 피곤한 관계로 면담은 그냥 세 명 한꺼번에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 선임들은 다 잘 대해주고?"
"예, 그렇습니다!"
김명찬이 신병놀이를 한 일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중대장의 심기를 건드려서 부대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중대장은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괴롭히는 선임 있으면 언제든 중대장에게 말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오늘 저녁에 대대장님하고 따로 면담하는 시간을 가질 거다. 어제 전입 온 열네 명 신병하고 같이 삼겹살 먹을 거라고 하셨으니까 준비해서 대대장실로 가도록 해라."
삼겹살!
신병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채식주의자를 제외하고 고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터.
오랜만에 목에 기름칠 할 생각에 이들은 벌써부터 설렘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대장님 앞에서 말실수 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좋아. 가만, 그러고 보니 너희들, 그거 안 받았나 보군."
‘그거’가 무엇인지 백우호와 김철은 감이 안 잡혔다.
그러나 이강진은 눈치 챘다.
중대장의 시선이 신병들의 어깨 쪽에 잠깐 머무르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당직! 신병들 견장 가져와라."
당직병이 가져온 ‘그것’의 정체는 바로······.
‘노란 견장!’
샛노란 색을 띄고 있는 견장의 모습에 이강진은 절망했다.
‘시발, 분대장 견장 차고 다녔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내가 노란 견장이라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 거지 같은 기분!
중대장이 직접 이들의 어깨에 노란 견장을 달아줬다.
"이 견장은 너희가 아직 대기 기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과도 같은 거니까 떼지 말고 잘 부착하고 있어라. 2주 동안 차고 다니면 된다."
이것 때문에 신병들이 ‘병아리’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한숨을 삼키는 이강진.
병장 만기 제대까지 마친 그에게 노란 견장은 그야말로 최대의 굴욕이었다.
* * *
대대장 면담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제법 많이 남은 상황.
그동안 신병들은 또 다시 1생활관에서 대기를 해야만 했다.
바깥에서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벌목 작업에 열중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병 달고 있는 녀석이 아직도 톱질 하나 제대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냐! 일병이 왜 일병인지 알아? ‘일 존나게 한다’고 해서 일병이잖아!"
"죄송합니다!"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잔소리에 백우호와 김철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강진아. 우리도 가서 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만 쉬고 있으니까 눈치 엄청 보이는데······."
"원래 대기 기간 동안에는 작업 안 시켜. 우리뿐만 아니라 선임들도 그랬고, 앞으로 들어올 후임들도 그럴 테니까 부담 가지지 마."
군생활에 두 번 다시없을 대기 기간이다. 이 동안 이강진은 꿀이나 열심히 빨기로 했다.
남는 시간 동안 할 것도 없으니 백우호와 김철은 선임들 관등성명과 소속 분과를 외우기로 했다. 이강진은 스윽 보고 바로 외웠다. 이미 다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국방부 시계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찰나였다.
"강진아."
백우호가 이강진을 불렀다.
"나, 갑자기 배 아픈데······ 화장실 같이 가자."
"알았어. 철아, 너도 갈래? 혼자 있기 좀 그렇잖아."
"같이 가면 나야 좋지."
백우호는 큰 거, 김철은 작은 거. 이강진은 화장실 입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1사로에 자리를 잡은 백우호.
"어휴! 살 거 같다."
위기(?)를 모면한 백우호의 귓가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화장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
"최승헌 병장님. 추진해온 거, 버리고 오겠습니다."
"야, 그거 버릴 때 분리수거 하지 말고 그대로 버려라. 1분대 애들 고생 좀 시키게. 크큭!"
순간 백우호의 귀가 번뜩였다.
‘찾았다!’
쓰레기 미분리범의 꼬리가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