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28화
제10화. 마지막 관문 (2)
군대에서 맞이하는 오침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다.
물론 휴가나 외박, 외출에 비하면 그 아래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과 시간에 대놓고 따뜻한 침상 위에서 잠을 잘 수 있는 특권을 거머쥐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야간 행군을 앞두고 있을 때, 혹은 야간 행군을 끝냈을 때나 받을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다.
오침을 취하는 동안, 이강진은 꿈을 꿨다.
회귀해서 주식으로 대박을 내는 꿈.
그 꿈속에서는 회귀한 시점이 입대 전날이 아니었다.
이제 막 전역한, 아주 행복하고 날아갈 것만 같은 시점에서 회귀 인생의 첫 날을 시작하는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다가 다시 생활관 천장과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참······.
‘그지 같네.’
차라리 그런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행복했던 꿈이 더 더러운 기분만 안겨준 꼴이 되었다.
이강진처럼 다른 훈련병들도 무거운 몸을 이끌면서 간신히 꿈나라를 탈출했다.
오후 5시.
슬슬 완전군장을 꾸려야 한다.
서기준 조교가 들어와 목소리를 높였다.
"완전군장 싸는 법은 각개전투, 야외 숙영하러 갈 때 다 알려줬으니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서기준 조교의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 담겼다.
"가라군장 쌀 생각은 하지도 마라. 군장 검사,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할 테니까."
가라군장이라는 말에 훈련병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완전군장처럼 보이게끔 만든 가짜 군장이라는 뜻이다.
이강진이 말년병장 때, 완전군장 행군이 싫어서 군장 안에 종이 박스를 넣었던 적이 있었다. 박스를 넣으면 무게는 가볍고, 군장은 빵빵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이걸 가라군장이라고 한다.
물론 간부한테 들키면 그날 이후로 군기교육대, 혹은 재수가 없으면 영창이다.
안 들키면 행군 때 제대로 꿀을 빨 수 있지만, 들키면 그만큼 엄청난 리스크가 따른다. 이것이 가라군장이 지닌 양날의 검이다.
한 명씩 군장 검사를 실시하겠다는 서기준 조교의 말은 사실이다.
쉬는 시간마다 조교와 교관이 돌아다니면서 훈련병들의 군장을 검사한다. 심지어 대대장이 직접 검사하기도 했다.
‘예전에 어떤 미친 녀석이 가라군장 만들었다가 들켰지.’
그것도 하필이면 대대장에게 직접 걸렸다.
결과는? 볼 필요도 없이 군기교육대다.
훈련소에서 퇴소할 때까지 그 훈련병은 군기교육대에서 하루에 3시간씩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여태껏 받았던 상점도 다 짤렸다.
이강진은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잃을 게 너무 많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도실에 있는 탄약반장의 신문지를 이용해서 마음껏 가라군장을 만들 수 있었지만, 그건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완전군장을 꾸린 뒤에 훈련병들은 연병장에 집합했다.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완전군장의 엄청난 무게감이 이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잠시 후.
대대장이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주목!"
"주목!"
"42km 야간 행군을 끝으로 훈련소에서 받는 모든 훈련이 끝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행군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대대장이 가장 좋아하는 말.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시전되었다.
"만약 대대장이 바란 것처럼 낙오자 없이 모두가 전원 야간 행군 완주에 성공한다면, 훈련소 퇴소 전까지 현무중대에게 휴식을 보장하도록 하겠다."
이번에만 고생하면 된다!
훈련병들의 눈에 의욕이라는 이름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대장의 훈시가 끝난 후.
1소대부터 천천히 위병소를 나섰다.
현무중대 중대장, 윤일원 대위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현무중대 파이팅!"
"파이티이잉!"
중대장이 직접 나서서 훈련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슬슬 3소대도 출발할 때가 되었다.
최만보 조교가 외쳤다.
"얘들아, 가자!"
"예!"
"파이팅!"
"할 수 있다!!!"
각자만의 외침으로 기합을 넣었다.
지옥 행군의 시작을 알리는 첫 걸음.
무거운 걸음이었지만, 어떻게든 무사히 완주하겠다는 의욕이 가득 담겨 있는 걸음이기도 했다.
* * *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해가 떨어지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19시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훈련병들 사이에서 경광봉을 든 조교들이 외쳤다.
"좌우로 밀착한다, 좌우로 밀착!"
"좌우로 밀착!"
이들 사이로 소형차 한 대가 지나갔다.
지나가는 소형차를 빤히 바라보던 백우호는 넌지시 이런 말을 했다.
"저 뒤에 매달리면, 군대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이강진은 바로 태클을 걸었다.
그건 탈영이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골라선 안 될 최악의 선택지 중 하나다.
탈영이라고 하니, 이강진은 자대 생활을 하면서 들었던 일화를 떠올렸다.
타 부대에서 행군을 하던 도중에 몇몇 병사들이 대열에서 이탈을 해버린 것이다. 정신 안 차리고 멍하니 앞만 보고 따라가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길을 잃은 것이다.
하나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부대는 그들이 탈영했다고 판단을 내리고 헌병대와 함께 탈영병을 찾기 위한 수색 작전에 돌입했다.
결국 다시 부대로 돌아온 병사들은 탈영이 의도한 게 아니었어도 그런 거 상관없이 영창으로 직행했다.
‘여기 훈련소에서는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여나 그런 사건이 벌어지면 낭패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 바로 군대니까 말이다.
* * *
주간 행군 덕분인지 그래도 훈련병들은 초반엔 나름 할 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할 만하다!’라는 생각은 행군이 시작된 지 2시간 만에 사라지게 되었다.
"헉······ 헉······!"
"씨발······ 군장 더럽게 무겁네!"
"하다못해 총이라도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쪽 어깨에 걸쳐 있는 총의 무게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으면 총이고 나발이고 그냥 바닥에 내팽개치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바로 심금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영창이 훈련병들을 찾아올 것이다.
행군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군용품 분실이다.
K-2의 가스조절기, 수통 마개, 탄띠 등.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순간, 그 훈련병에게 어떤 시련이 쏟아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두 번째 휴식을 마치고 다시 행군에 들어서는 훈련병들.
야간 행군이 시작된 지 3시간이 가까워졌다.
"······."
"······."
이제는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포기했다. 잡담을 나눌 여력도 없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걷고 또 걷는다. 자신이 그저 걷기만 하는 기계가 된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야, 야야!"
백우호가 이강진의 군장을 툭툭 건드렸다.
"왜. 졸다가 여자 나오는 꿈이라도 꿨냐?"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현실?"
"뭐?"
뜬금없는 백우호의 말에 이강진은 ‘이 녀석이 행군 때문에 정신이 나갔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우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른쪽 봐봐!"
"······!"
순간 이강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백우호의 말대로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있다!
심지어 복장도 상당했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배가 훤히 드러나는 복장이었다. 레이싱 모델이 입는 그런 복장에 가까웠다.
근처에 조명판과 카메라들도 보였다.
‘잡지 촬영인가?’
어느새 훈련병들은 여자 모델들의 몸매에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심지어 조교들조차 여자 모델들의 사진 촬영회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인들 때문인지 촬영팀은 잠시 작업을 중단했다.
"민지 씨. 이틈에 예린 씨 메이크업 다시 고쳐주세요."
"아, 네!"
메이크업 담당이 예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 모델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예린은 자신을 빤히 보는 군인들을 향해 서비스를 선보였다.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군인 오빠들, 힘내세요! 파이팅!"
귀여운 목소리로 군인들을 응원하는 여성 모델.
갑자기 굽어 있던 훈련병들의 등이 똑바로 펴졌다.
"어흠!"
"현무중대, 파이팅!"
"끝까지 행군 완주하자!"
"가자, 전우들이여! 힘들면 내게 기대거라! 다 받아줄 테니까! 하하하!"
없던 전우애마저 샘솟을 정도였다.
젊은 여자의······ 게다가 상당히 아름다운 여자의 응원 한 번이 이들에게 엄청난 힘을 복돋아줬다.
이강진은 갑자기 의욕이 과다 충전된 훈련병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군인이란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
남자의 본능은 어쩔 수 없다.
* * *
자정이 거의 다 되어가는 시간.
훈련병들은 어느 넓은 공터에 들어섰다.
"앞으로 밀착한다! 밀착!"
"밀착!"
뒤에 있는 훈련병들이 군장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충분히 공간을 확보했다.
이 공터. 이강진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여기서 라면 취식했던가?’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조교들은 앞에 온수기를 하나둘씩 설치하기 시작했다.
저 온수기. 익숙한 온수기였다.
훈련병들에게 덜 익은 쌀국수를 선물했던(?) 바로 그 저주 받은 온수기들이었다.
김철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섞여 들어갔다.
"저거, 뜨거운 물도 제대로 안 나오는 온수기잖아."
"이번에는 덜 익은 라면 먹어야 하냐. 어휴!"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건 뭐······ 라면을 먹은 건지, 물에 불린 과자를 먹는 건지. 오묘한 촉감에 훈련병들은 치를 떨 정도였다.
하나 이번에는 방법이 있었다.
이강진이 비책을 제시했다.
"내가 뜨거운 라면 먹게 해줄 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라."
공략 방법이 있었다.
류승역 조교가 3소대 인원들에게 외쳤다.
"라면 먹을 준비 끝났으면 앞으로 나와서 물 받아가라!"
"예, 알겠습니다!"
3소대 훈련병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을 받기 위해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더니 백우호와 김철도 부리나케 움직이려고 했다.
그 순간, 이강진이 그들의 행동을 만류했다.
"천천히 가."
"왜?"
"빨리 물 받아둬야 빨리 익는 거 아니야?"
"이건 속도 문제가 아니야. 선택의 문제지."
이강진은 백우호, 김철에게 어느 한 온수기를 가리켰다.
"저기서 물 받으면 돼."
다섯 개의 온수기 중 가장 마지막 것이었다.
이강진은 알고 있었다.
저기서 나오는 물이 가장 뜨겁다는 사실을!
회귀 이전에는 이강진이 4번 온수기에, 백우호가 5번 온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백우호의 라면만 제대로 익었던 기억이 났다.
과거에는 꽝을 골랐지만, 이번에는 당첨을 고를 것이다.
이강진의 말을 믿기로 한 백우호와 김철.
세 사람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1, 2, 3번을 지나쳐 5번으로 향했다.
콸콸콸!
물에서 뜨거운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 온천수를 보는 듯했다.
백우호는 팔팔 끓은 물을 보면서 외쳤다.
"뜨겁다, 뜨거워! 오오!"
이 정도면 충분히 익힌 라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강진 덕분에 두 사람은 뜨끈한 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다음이 문제다.
젓가락으로 라면사리를 크게 뜬 이강진.
그제야 문득 이런 걱정이 들었다.
‘이거 먹으면 나중에 분명 졸릴 텐데.’
추위와의 싸움 이후에는 졸음과의 싸움이 훈련병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