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95화 (완결) (195/195)

195화

“……루?”

네 번째 성혼명의 상대가 세레니예 백작도 아니고, 로드 칼레파 루라고?

황제가 정말 미쳤나?

아니, 아니다. 황제가 제아무리 미쳐도 칼레파의 이름을 이 종이에 박을 수는 없다. 그 말인즉 루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는 의미였다!

“이, 이래도 돼? 잘못 적힌 거 아니지? 로드 칼레파잖아. 칼레파가 결혼해도 되는 거였어?”

어느새 식지 않은 따뜻한 홍차를 준비해 온 루가 내게 찻잔을 내밀며 심드렁히 반문했다.

“안 될 이유라도?”

그건…… 또 그렇다.

펄펄 끓는 홍차를 마시고 진정한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황제 폐하의 허락하에 결혼하는 거야?”

“허락이 아니라 동의. 성혼명이 아니라 성혼 동의서지. 황제는 내게 명을 내지리 못한다는 걸 잊지 마.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제아무리 서로를 향한 신뢰로 충분하다 한들 법적 제도로 묶여놔야 안심…….”

“사인했어.”

나는 냅다 이름을 휘갈긴 후 루에게 성혼 동의서를 내밀었다.

종이에 적힌 ‘데이지 웨더우즈’를 말없이 응시하던 그는, 성혼 동의서를 받아들며 다시금 그 사인을 눈에 담았다.

뭔가 부족한 걸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장도 찍을까?”

“……데이지.”

“응.”

“내가 널 씹어 먹을 수 있게 허락해 줘.”

“미쳤어? 허락할 게 따로 있지!”

루는 성혼 동의서를 내던진 채 내 얼굴을 끌어당겨 입 맞췄다.

“잠깐! 홍차가……!”

키스는 한참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더 길게는 곤란하다. “결혼이 예정된 만큼, 이제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설득으로 루를 진정시킨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찻잔을 주우며 물었다.

“그래서 결혼 날짜는? 생각해둔 일정 있어?”

“내일.”

……어, 정말?

쾅!

그때, 천둥 벼락 못지않은 커다란 소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헝클어진 머리로 급작스레 등장한 베르단드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뜸 이렇게 외쳤다.

“안 됩니다!”

뭐가?

‘설마 결혼이?’

같은 추측에 다다랐는지, 루가 한껏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단드를 위협했다.

“제정신이냐, 베르단드?”

움찔한 베르단드가 다급히 머리를 가다듬으며 차분히 답했다.

“아, 아니. 결혼식이 안 된다는 게 아닙니다. 내일이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내일 결혼식만은 죽어도 안 됩니다! 절대로요!”

너무도 간절한 외침이었던 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 * *

4개월.

베르단드가 공표한 최소한으로 보장되어야 할 예식 준비 기간이었다.

“이 4개월도 지켜주지 못하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차피 신명에 따를 뿐이니 로궤 최초 칼레파 예식이고 뭐고 로드 칼레파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이후 저희 모두는 로궤를 떠나 은둔하겠습니다!”

루는 베르단드의 공표 아니, 시위를 어린아이 투정으로 여기면서도 별다른 말없이 수긍했다.

그에 베르단드는 한없이 기뻐 뵈는 낯으로 떠났는데, 루는 그 모습을 보고 네 번째 벽도 못 넘는 녀석들이 고집만 날로 늘어서 문제라며 혀를 찼다.

사흘 가량이 흐른 후.

하녀장이 나타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그녀는 내 허락을 받고 집사 암살자를 비롯한 군식구 전부를 황성으로 데리고 갔다.

군식구가 하녀장의 전용 고용인으로서 황실과 계약한 기간은 1년. 이는 내가 잠시간 웨더우즈 저택을 비우게 될 기간이기도 했다.

“주인님 말씀이 옳아요. 워낙 자유롭게 살던 이들이라, 황성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도 하네요. 하지만…… 하염없이 주인님만 기다리며 저택을 지키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함께할 사람들이 있으니 덜 외롭겠죠.”

하녀장과 나눈 마지막 인사는, 마치 그녀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진은 하녀장의 황성행이 결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나를 찾아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1년 동안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아니요,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닙니다. 아스트로사에 다녀온 후부터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고 쭈욱 생각해왔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칼레파의 배움을 받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 예? 돈이요? 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몸을 갈아 넣어서라도 벌어서 잘 버텨보겠습니다!”

없는 짐을 싹싹 긁어모아 바리바리 챙긴 진은 다음날 곧장 기차를 타고 먼 길로 떠났다. 1년 후 더 단단해져서 돌아올 자신을 기대해 달라는데…… 큰일 없이 사지 멀쩡하게만 돌아와도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건 아마, 내가 진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어서겠지.

가장 의외의 결정을 내린 건 안데르트였다.

사실, 내게 있어 안데르트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었다. 한데 놈은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였다. 버클리그레이튼으로 돌아가, 공작위 후계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성미에 어울리지 않는 판단이라 생각해 그 이유를 묻자.

“네 알 바냐?”

라는 답만 돌아왔다.

뭐, 그간 작지 않은 사건들을 겪었으니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권력의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고,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는 곳이 최고라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

검성은 카드 뒤집듯 뒤바뀐 안데르트의 태도에 무언가를 눈치챈 기색이었으나, 내게 말해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남자의 마음은 항상 갈대 같은 법이다. 모두가 자작처럼 단순할 거라 여기지는 마. 참고로 방금 말은 칭찬이네.”

검성의 생각은 여전히 알기 어렵다.

분명 그에게서 디안의 유산을 건네받고, 벽을 깨부순 후 나타샤를 살리기까지 했지만…… 아직까지도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이란 존재는 내게 오리무중이었다.

검성은 황제의 검이란 역할에 충실하면서 그 누구보다 독립적인 인물이다.

실제 이리겔 별장 테러 사건의 전말도, 이리겔 황실 보고에서 디안 케트의 유물로 추정되는 물건을 훔쳐내기 위한 연막이었다고 했으니…….

하지만 나타샤는 검성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의 걱정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데이지, 내 욕심을 하나 말하마. 나는 널 이 더러운 진흙탕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황성에서 나고 자란 나는 황위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얼마나 끔찍하고 추잡한 다툼을 부추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우리는 그저 네가 쉬었으면 한다. 이제는…… 그래도 돼. 아니, 부디 그렇게 해다오.”

황제를 끌어 내리려던 결사대의 계획이 아직 유효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라졌던 나타샤 황녀가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제국 내 분리된 세력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여전히 친제나일파의 수장으로서 건재했고 황제는 그런 그를 견제했다.

메피스토의 완전한 죽음은 단지 마귀 군대의 부활을 저지했을 뿐이다. 황제, 라파엘로, 검성, 나타샤 등 극소수만이 연관된 사건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공공의 적을 섬멸했다는 이유로 모든 이들의 뜻과 신념이 통합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던 탓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라파엘로는.

“……항상 네 뒤에 있을 거란 말은 진심이었다. 가볍게 뱉은 치기 따위가 아니야. 다른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그것만 알아주면 돼.”

내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 맞추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일단은, 여기까지.

이제는 나와 루의 이야기를 해볼까?

우리는 북대륙으로 떠난다.

목적지는 화이트가 나고 자랐다는 매발톱 일족의 마을로, 아스트로사 왕국과 한참 먼 오지에 박힌 곳이라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할 계획이었다.

멸종해가는 회색 매를 이용해 전통식 매사냥법을 이어가는 일족은 이제 매발톱 일족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올 생각이다.

그리고 그 예정의 출발지는 바로 이곳, 퀸 섬이다.

휘이이잉.

오랜만에 마주하는 절벽 위의 바람이 거칠다.

나는 14년 전 쌓아둔 돌무덤 앞에 서서, 지나온 시간처럼 겹겹이 포개진 먼지와 자갈들을 털어냈다.

마침내 마음에 찰 만큼 돌무덤을 정리했을 때는 가방을 열어 담요 안에 파묻어 놓은 알의 상태를 확인했다.

좋아, 잘 있네.

알 옆에 고이 껴놨던 나즈를 꺼냈다. ‘애쉬’라 적힌 그 나즈는 낡긴 했어도 1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튼튼했다. 마치 디안처럼.

돌무덤 위에 어떤 식으로 놓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루를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루, 이곳 절벽의 바닷바람이 워낙 거세서 나즈가 떨어질 것 같아. 마법으로 고정해 주면 안 될까?”

휘적휘적 걸어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나즈를 내려다 본 루가 아리따운 미소를 지으며 내 쪽을 돌아봤다.

“날아가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못된 소리 하지 말고.”

“그래, 데이지. 못된 노예이자 잘생긴 남편에 불과한 내가 너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어? 하지만 요구를 들어주기 전에 한 가지 답은 들어야겠군. 나야, 디안 케트야?”

“참나. 왜 처음 질문하는 척해? 벌써 세 번이나 똑같은 걸 물어놓고선.”

“나야, 디안 케트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루가 근래 유치한 질문을 던지게 된 건 젊은 시절의 기억이 돌아와서일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한층 더 풍부해져서일까?

이 질문은 언제나 깊게 파고들수록 부질없는 의문이라는 답에 도달한다.

어느 쪽이 답이든, 결국 그게 루의 본질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으므로.

“천 번, 만 번을 물어도 내 답은 언제나 당신일 거야, 루.”

미안, 디안.

만약 루가 ‘나와 디안 케트 중에 누구의 인성이 더 뛰어나?’라고 물어보면 그때는 반드시 네 이름을 댈게.

대답과 함께 발꿈치를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자, 다정하면서 우악스러운 손길이 뻗어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내가 숨에 차 헐떡거릴 때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주먹으로 있는 힘껏 가슴을 때리고 나서야 아쉽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놓아주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안 그래도 거리낌 없는 루가 더 적극적으로 변한 건 젊은 시절의 기억이 돌아와서일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한층 더 풍부해져서일까? ……역시 부질없는 의문이었다.

우리는 돌무덤에 나즈를 걸었다.

거센 바닷바람이 불거나 날카로운 태풍이 몰아쳐도, 하염없이 나부끼기만 할 뿐 절대 떨어지지 않을 이름표가 나와 루를 응시했다.

애쉬, 퀸 섬에 돌아오다.

사랑하는 나의 루와 함께.

길게 기지개를 켠 후 루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는 익숙한 푸른 머리칼과 금색 눈동자,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쉬지 않고 불어오는 대양의 강풍을 막아서며 내 곁을 지켰다.

우리는 북대륙으로 간다.

아니,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떠난다.

떨어진 별이 빛을 잃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한 영원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계속.

“……음, 좋아. 가볼까?”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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