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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94화 (194/195)

194화

루는 활짝 열린 창문 앞에 기대듯 서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16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특별히 어둡지 않은 배경 앞에서 음산하게 웃는 모습이 마귀와 처음 대치했던 시절을 상기시킬 만큼 쫄깃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마른침을 삼키자, 습관적인 호선을 긋는 입술과는 정반대의 딱딱하게 굳어있던 눈매가 더 얇게 좁혀졌다.

상대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양 느긋하게 턱을 들었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안해!”

이어서 살짝 후회했다. 너무 우렁찬 외침이라 진정성이 덜해 보였기 때문이다.

작게 헛기침한 나는 최대한 얌전하고 공손한 자세로 루 옆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곤 말했다.

“당신에게 사죄하고 싶은 일들이 있어. 들어줄래?”

루의 한쪽 눈썹이 파도치듯 까딱였다. 한번 해 보라는 뜻이었다.

“영혼이 부딪히면 기억도 함께 잃는다는 정보는…… 일부러 감춘 게 맞아. 하지만 다른 의도는 없었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게 될 사이니까 잠깐 잃어도 괜찮을 거라 여긴 것에 불과해. 배려심이 부족했던 거 인정할게. 미안.”

기실 황성으로 오는 길 내내 고민했었다.

루가 깨어나고서부터 한없이 미적거린 나의 행동을 지적한다면, 나는 어떻게 내 태도를 변호해야 할까?

그러나 반대 상황을 가정하니, 도무지 변호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살려놨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곤 인사 한 번 없는 냉대였지 않은가? 루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고, 서운하고, 불안했을지 생각하자 심장이 쓰라렸다.

고뇌하고 고뇌해도, 방법은 결국 하나였다.

내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것.

“네가 깨어난 후 곧장 찾아가지 못한 데는…… 여러 복잡한 이유가 있기는 해. 나 스스로도 정리하기 힘든 감정들이 혼란스레 뒤섞여서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간단히 말해서 면목이 없었어. 너는 결국 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으니까.”

“…….”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한심하게 느껴졌어. 자랑은 아니나, 사실 이 넓은 제국에서도 나만큼 강한 검사는 손에 꼽아.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자만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 내 자만과 실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영영 이별할 뻔했다는 게……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견디기 힘들더라.”

말을 이으면서, 짙고 무거운 감정이 점차 목구멍 위로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진심이 변명으로 변질되는 기분이었지만, 한번 뱉은 이야기의 끝은 봐야겠다 싶어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을 끝마치고 너에게 가려 했어. 네게 도움만 받기보다, 이제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우리는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테니, 시간이 조금 걸려도 괜찮을 거라 여겼어. 그런데 방식이 조금 잘못됐던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 한 마디만 해줬더라면 네가 내게 실망할 일도 없었겠지.”

그 말을 하면서, 나 또한 새로이 깨달았다.

“……사실 그 기다려 달라는 말조차 하기 두려웠었나 봐.”

내가 이렇게나 루에게 흔들리는구나.

이 흔들림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흔들림 없는 냉정한 시선으로 눈을 맞추던 루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뗐다.

“그래서?”

그쯤 되자 도저히 루와 맞닿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예고도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루를 껴안고는 그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웅얼 사과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이번에도 당신이 먼저 오게 해서. 다음에는 죽어도 내가 먼저 루를 찾을 거야…….”

얼마의 침묵이 흘렀던가.

긴 한숨이 들려오기 무섭게, 커다란 온기가 날 끌어안았다. 갈비뼈 안으로 쑤셔 넣을 기세인 거세고 또 우악스러운 포옹이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품 안에 빈틈없이 날 채워 넣은 루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은 없어, 데이지. 너와 나는 이제 죽어도 떨어지지 못할 테니까.”

우리는 입을 맞췄다.

조금도 상냥하지 않은 입맞춤이었으나, 그조차 좋았다.

나로 인해 격렬한 감정에 휘말리는 이 사람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언제 어디서나 여유롭고 유유자적하던 루가, 내 앞에서만큼은 더는 그러지 못한다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드문드문 떨어지는 입술을 진득하게 따라붙던 루의 호흡도, 어느 순간부터 마주 웃음을 흘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떨어져 나갔다. 축축해진 내 입술을 엄지로 길게 쓸어내린 루가 황홀한 금안을 번뜩이며 날 책망했다.

“넌 좀 더 낭만적일 필요가 있어.”

“하지만 너무 좋은 걸 어떡해? 네가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다는 게 나한테는 너무 꿈 같단 말이야…….”

“흠.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 정도는 충격 요법의 효율성이 증명된 거지.”

“충격 요법?”

“그것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어. 무려 160년 동안 잊었던 기억의 내용이 몹시도 충격적이라, 내 추의 균형이 다시금 반대편으로 기울어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소리야.”

아.

루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 흐릿한 시선으로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뭐, 결과만 따지자면 내 입장에선 손해 볼 것 없는 과정이었어. 추가 너무 급격하게 기운 부작용인지, 아니면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다섯 번째 벽을 넘은 건지 몰라도…… 더는 저울의 존재를 인식하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거든.”

나는 아직 완전한 신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아 균형의 의미를 정확히 모른다.

한데 만약 루의 추측대로 다섯 번째 벽이 실로 존재한다면…….

‘더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근데 여기서 더 마음껏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사랑하는 거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려니 싶었다.

무엇보다.

“그럼 더는 칼레파로 떠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아마도.”

환히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자, 심장이 녹아들 정도로 다정한 미소를 지은 루가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는 내 목덜미에 고개를 박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한탄했다.

“……빌어먹을. 넌 나를 너무 한심하게 만들어. 이번에는 제대로 한 소리 하려 왔는데……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못 하겠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너무 오래 걸렸어.”

“응.”

“그렇게 간단히 수긍할 게 아니야. 너무 오래 걸렸다고, 데이지.”

나는 루의 뒷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를 위로했다.

“비참한 과거를 버리고 싶어서 나 스스로가 잊어버린 거라 여겼는데.”

“…….”

“모두 이 얄궂은 운명을 위해서였다니. ……이건 이것 나름대로 흥분되는데?”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내 턱을 꽈악 깨물며 떨어졌다. 흥분? 어떤 흥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질책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는데, 루가 날 놓지 않는 통에 그의 머리를 꽈악 끌어안은 채 이리저리 흔들려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더라?’

아.

“자, 잠깐, 루! 황제는? 분명 네가 황제를 인질로 두고 있다고 했는데?”

장난을 멈춘 루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다 죽어가는 반시체를 괴롭혀봤자 입만 쓰지. 그에게는 원하는 것만 얻고 재웠어. 계속 옆에 두면 기절할 기색이라.”

자비로운…… 배려인가?

“그런데 황성까지는 왜 찾아온 거야?”

루는 고작 나 한 명 끌어내자고 황성을 떠들썩하게 만들 인물……이었지만 ‘하필’ 황성이었다면 점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다른 연유가 있을 법했다.

“네게 약속한 게 떠올라서.”

루는 날 안아 든 채 방 안쪽 테이블로 이동했다.

고목의 물결무늬가 고풍스레 새겨진 테이블에는 빳빳한 종이 한 장과 오래된 만년필이 놓여 있었는데, 언뜻 보이는 단어가 눈에 몹시 익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영원을 약속해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야지.”

나는 루의 품에서 내려와, 종이를 집어 올렸다.

“성혼 동의서?”

순간 신경질이 확 올라왔다.

역시 황제다. 행복한 사람 기분 잡치게 하는 기술이 훌륭해.

‘이건 황제가 준비한 네 번째 성혼명인가?’

그렇다면 루는 이 성혼명의 취소를 요구하러 온 거구나! 기쁜 기색으로 네 번째 상대의 이름을 확인했다.

『웨더우즈 가문의 가주, 데이지 웨더우즈와 로드 칼레파 루의 성혼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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