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황성 행이 결정됐다.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지만, ‘파란 머리 북대륙 신’이라는 괴인의 정체가 열 번을 생각하고 백 번을 고민해도 루로 추측되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내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아무리 봐도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다.
비행장으로 떠나기 전.
나는 겨울옷을 단단히 여미며 하녀장에게 서신을 한 장 전달했다.
“여기, 나타샤가 전해주래.”
굳게 닫힌 침실 안에서 내 외출 준비를 돕던 하녀장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서신을 쳐다봤다.
“이런 걸 주는 대로 받아오시면 어떡해요? 제가 정말 이곳에 있다고 인정하는…….”
“나타샤는 이미 확신하고 찾아온 거야. 더는 숨길 수 없어. 당신도 알잖아, 하녀장.”
그들은 처음부터 하녀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내버려 두다가 이제서야 손을 뻗어온 건 단순히 ‘이나스타샤 황녀’라는 존재가 필요해졌기 때문이겠지.
어린 황태자의 새로운 보호자가 필요해진 건지, 아니면 복잡한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런 쪽은 하녀장 본인이 더 잘 알 테다.
“고민해 봐. 나는 언제나 우리 고용인들의 선택을 존중하니까.”
마지못해 서신을 받아든 그녀가 아차, 하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러고 보니 그 괴인은 또 무슨 말인가요? 설마 또 마귀가 나타난 건가요?”
“아니, 루야. 뭔가 불만이 생긴 것 같아.”
나한테.
‘……음.’
예상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이 이상 할 말이 없다. 하녀장도 루라는 이름에 맥이 빠졌는지, 더는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진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주인님을 계속 지켜볼 거예요.”
“그래 봤자 다 알 텐데.”
“뭐, 그런 비밀스러운 호위가 보좌관의 역할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죠. 아직 주인님의 얼굴을 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진은 유산의 시동어를 외치게 된 사태에 대해 아직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아무리 괜찮다고 위로해도, 며칠 동안 모습을 감추는 걸 봐선 저 나름대로 큰 충격이었나 보다.
“하녀장은 황성에 안 따라갈 거야? 서신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 줄게.”
가죽 장갑과 손수건을 챙겨주던 하녀장이 작게 웃었다.
“오랜 인연들의 해후를 방해할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해후는 무슨. 못 들었어? 황성 점거됐다니까?
나타샤는 이제 막 저택에서 나온 날 다급히 마차에 실었다.
—데이지. 괴인이라는 자가 정말 널 살렸다는 그 은인이 맞는 건가?
“응.”
—너의 은인이라면 나의 은인이기도 하다만. 대체 무슨 연유로 황성을 점거한 건지는 궁금하군.
“황실에 직접적인 원한은 없을 거야. 대화로 풀 수 있어.”
아마도.
팔짱 낀 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날 살피던 라파엘로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데이지 웨더우즈. 설마 네가 말하는 그 은인이라는 게…….”
“로궤의 칼레파.”
정확히는 로드 칼레파이지만, 외부인들은 둘 사이의 차이를 모를 테니 적당히 퉁쳤다.
—뭐라? 칼레파? 북대륙의 반신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더니, 정말 반신 본인이 왔을 줄이야. 이거 참 황당한 일이구나.
적잖이 놀란 반응을 보이는 나타샤와 달리, 라파엘로는 무언가 깊은 고심에 빠진 듯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뭔가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 그자의 정체가 로궤의 칼레파였던 건가. 이제 어느 정도 납득이 가.”
—혼자 눈치채지 말고 설명을 덧붙여라, 라파엘로.
“됐어. 넌 몰라도 된다.”
—황녀의 명이다, 라파엘로. 당장 설명해라.
“누더기 인형이 말이 많군.”
—황녀의 부탁이다, 데이지. 라파엘로를 한 대 쳐라!
우리는 정거장에 정차되어 있던 황실 소속 개인 비행선을 타고 라갈로 향했다(진의 존재를 진작 알아챈 라파엘로가 그녀를 비행선에 함께 태워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괴인이 황성을 점거했다는, 그간의 성혼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충격적인 사태에도 제도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또 그 같은 분위기는 황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일단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네.”
—라갈은 제국의 수도다. 라갈이 불안해지면 제국이 불안해져. 황성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쓰고 있지.
하기야, 사냥 대회에서의 사건도 세간에는 감감무소식이지 않는가? 보안 하나는 로궤 못지않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도 경비는 꽤 삼엄한 터라 라파엘로를 옆에 끼고 등장했음에도 세 번, 네 번의 신분 검사 후 황성 중심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윽고 본성으로 들어서는 입구 앞에 대치하듯 선 세 명의 인원이 보였다.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다. 왼쪽부터 차례로 라그휘르텐 백작, 칼펜위버 후작, 그리고 맨 오른쪽은 가장 먼저 우리를 알아본…….
“웨더우즈 자작!”
“잘 지내셨습니까, 로즈벨 백작님?”
로즈벨 백작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풍채로 성큼성큼 다가온 로즈벨 백작은 내 몸 이곳저곳을 확인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얼마 전에 일어났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건강은 어떤가? 몸은 괜찮고?”
“괜찮습니다. 아주 멀쩡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보름이나 정신을 잃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황성의 일 때문에 서둘러 찾아온 겐가?”
“네. 그런데 생각보다 다들 여유로워 보여서 놀랐습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로즈벨 백작이 내 어깨를 살살 두드리며 대답했다.
“뭐, 우리도 나름 백전노장이지 않겠나? 심각한 사태인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지. 듣자 하니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자’의 신분이 아주 높으신가 보더군. 황제 폐하와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각하께서 우릴 이 앞에 세워두고 얌전히 수다나 떨라 명하실 정도면 말일세.”
우려와 달리 루는 황성에서 나름 잘 대우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우리 모두 가로쉬 경에게 전해 들은 참이야.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자’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지. 나타샤 황녀 전하를 괴롭히던 그 회개 불가 쓰레기의 심장인지 뭔지를 파괴하는 데 돕고, 자네의 목숨을 살려주기까지 한 은인이기도 하다지?”
뭐? 벌써 거기까지 다 전해 들었어?
“흠흠. 그게 끝이 아닙니다, 백작님.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자’가 웨더우즈 자작에게 미친 미친놈이라고도 덧붙이지 않았습니까? 제 딸들에게서 배운 해석법에 따르면 이는 분명 관용적 표현으로, 한 사람의 인생관이 바뀔 만큼 푹 빠졌다는 의미의…….”
“거기까지 하시죠, 칼펜위버 후작님. 이봐, 안데르트 경. 가로쉬 경이 그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자’는 또라이니까 절대로 건들지 말라고도 덧붙이더군. 한눈에 봐도 예사 인물은 아니었어. 대체 뭐 하는 자이지? 뭣 때문에 황성을 소란스럽게 만든 거야?”
“어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닌가, 라그휘르텐 백작? 미친놈은 관용적 표현이래도? 이래서 사랑도 모르는 야만스러운 총각과는 대화가 안 통해.”
—확실히 라그휘르텐은 좀 촌스러워.
“아이쿠, 황녀 전하. 그 인형 안에 계셨던 겁니까? 이 늙은이 심장이 다 떨어질 뻔했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궁정인들과 고용인들 전부를 대피시켜놨는지, 고요한 황성에는 검사와 누더기 인형의 수다 떠는 소리만 왕왕 울려 퍼졌다.
나타샤와 칼펜위버 후작이 ‘촌스러움’의 정의에 대해 깊은 토의를 나눌 동안, 말없이 우리를 쭈욱 살펴본 로즈벨 후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 이렇게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건 진정 오랜만이지 않나? 어쩐지…… 흐음. 그리운 느낌이 드는군.”
그에 시끌벅적하던 대화가 뚝 끊기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드문드문 터지던 나타샤의 웃음도 기다렸다는 듯 마법처럼 사그라졌다.
나는 축 처진 더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나타샤와 비행선에서 나눈 짧은 대화를 상기했다.
“그래서…… 네가 이곳저곳의 칩거해 있던 인재를 모으는 이유가, 황제에게 황태자의 가능성을 증명해보기 위해서라고?”
—그래. 황태자 전하 곁에 믿음직스러운 이들이 모인다면, 오라버니도 더 이상 날 회유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그 황태자 전하가 성장하기까지 네가 황위를 맡으면 될 일 아닌가?”
—그럴 수는 없다, 데이지. 내 죄는 몹시 커. 죄인에게는 펜 로타 제국을 부흥시키고 제국민의 삶을 지킬 자격이 없어. 물론 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남은 평생을 제국에 바칠 테지만…… 그래, 바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 그 이상은 없다.
나타샤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더 큰 죄악을 짓기 전에 정신 차릴 수 있었던 건 모두 전우들 덕분이다. 실험이 진행되고 단계가 나아갈수록, 죽은 자들에게서 잔소리가 들리더군. 후회할 짓 그만두라느니, 정신 차리고 운동이나 하면서 머리를 맑게 하라느니……. 당시에는 서서히 미쳐가면서 환청까지 들리게 된 줄 알았지만, 그건 환청이 아니었어. 그들 덕분에 이성을 잃지 않고 널 기다릴 수 있었던 거다.
나타샤의 죄책감은 그녀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원동력이 된 듯했다.
나 또한 그녀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타샤는 죄인으로 낙인찍혀 평생 용서받지 못할 자는 아니다. 마땅히 책임을 진 자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 가라앉는 꼴은 죽어도 두고 못 보는 칼펜위버 후작이 장난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 자리에 없는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님이 서운해하시겠습니다.”
“어쩔 수 없네. 과정이나 진실이 어떠하든, 명목상 그분과 우리는 정적이나 다름없으니까.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옳아.”
단호하게 선을 그은 로즈벨 백작이 힐긋, 이쪽을 확인하는 걸 봐선 딱히 내게 들려주고 싶은 사정은 못 되는 듯싶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라그휘르텐 백작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뭐, 큼.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합디다. 어릴 적에 즐겨 보던 동화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악룡을 물리친 후 뿔뿔이 흩어진 용사들이 죽기 전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풀던 장면이었죠.”
“허. 지금 자기 자신을 용사에 비견하는 겐가? 자네는 언제나 자존감이 참 높아.”
“죽기 전 회포라니. 괜히 재수 없어지는 비교로군요. 동화가 맞기는 한지 의문입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거참, 늙은이들이 센스 없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우르르 달려들기는!”
그들과 더 깊은 수다의 수렁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본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텅 빈 통로와 수십 개의 방을 지나치던 어느 순간. 길목 끝에 홀연히 선 검성이 보였다.
내 얼굴을 스윽 살핀 그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벽을 넘었군. 이제는 나도 닿지 못하겠어.”
역시 한눈에 알아채는 건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리자, 검성이 녹색 눈을 얇게 좁혔다.
“성혼명은 잘 받았나? 앞으로 평생의 동반자가 될 사이이니 잘 부탁한다, 웨더우즈 자작.”
나는 그의 넉살 좋은 농담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물었다.
“이 안에 그 괴인이 있는 겁니까?”
“그래. 황제 폐하를 인질로 둔 탓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
“위급 상황일 텐데 퍽 여유로워 보이십니다.”
“자작의 오해네.”
“안데르트는요?”
“안에서 괴인과 대치 중이다. 한번 들어가 보겠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반신 앞에서 재롱떨 자신은 없어서 말이지.”
그래, 들어가야지.
그러기 위해 왔으니까.
“……하아.”
하지만 쉽사리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인가?
두려움? 아니다. 이건 떨림이다. 나는 손에 땀을 쥘 정도로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긴장되느냐고 묻는다면…….
“데이지.”
나의 한숨을 어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창문에 기대어 서 있던 라파엘로가 천천히 등을 떼며 날 불렀다.
그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라파엘로와 함께해온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저건 필시 주저하는 기색이라는 것을.
라파엘로는 내게 하려는 말을 고뇌하고, 또 주저하며 삼키다가, 결국 입에 담았다.
“나는 항상 네 뒤에 있을 거다. 그러니 지쳤을 때는 언제든지 뒤돌아도 돼.”
짧기에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덕분에 열 오르듯 빠르게 퍼지던 긴장이 느슨하게 풀렸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런 우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검성이 답지 않게 동정심 섞인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차였군.”
—차였어, 라파엘로. 꼴 좋구나.
“……입 닥쳐.”
—더미에게는 입이 없다, 라파엘로.
익숙히 오고 가는 목소리.
어째서일까? 불현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애쉬이자, 안데르트이며, 데이지인 내가, 내 삶의 주인이자 주체로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불길에 타오르던 작은 섬에서 여기까지 도달했는데, 이제 와 무엇이 긴장되고 두려울까 싶었다.
이성이 또렷해진다. 손바닥을 적시던 땀이 마르고, 심장에서는 활기찬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루에게 가기 위해 기꺼이 문을 열었다.
그렇게 활짝 연 문은…….
쾅!
내가 방 안으로 발을 딛기 무섭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저 홀로 닫혔다.
“안녕, 데이지.”
파란 머리의 괴인이 내게 인사했다.
“이번에도 결국 내가 널 찾아왔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