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첫 숨은 뜨거웠다.
저돌적인 루의 온기가 입술을 지분거리고 그 틈을 벌리는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넋이 빠진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속눈썹이 닿을 거리에서 본 루의 눈동자는 우주보다 더 아름다웠다. 내 안에 스며들 기세로 깊고 깊게 입을 맞추던 루의 고개가 점점 더 내게로 내려온다.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내가 쓰러지듯 모래 위에 무너졌지만, 루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멈춰 있던 톱니바퀴가 천천히 몸을 비틀기 시작한 것처럼, 완벽하게 규칙적으로 뛰고 있던 내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서 더 계속할 건가?’
전에 없던 위기감이 들었다. 정말 계속한다고?
신의 길목 앞에서?
전 우주가 보란 듯이?
“미, 미쳤어? 당장 떨어지지 못해!”
어떤 발버둥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루였지만, 당황한 내게 입술이 콱 깨물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뭐가 그렇게 예민해? 내가 내 주인 좀 만지겠다는데.”
그 뚱하고 파렴치한 반응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선사했다. 내가 아는 루는 분명 자신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모른다며, 입도 함부로 못 맞추게 하는 인물이었는데!
“너 누구야?”
나는 혼란에 빠진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나의 내면에서 마주하는 파란 머리의 루는 스물둘의 인간 루가 아닌 칼레파 루다. 한데 당장 마주하고 있는 그는 마치 스물둘의 루 같지 않은가?
떨떠름한 얼굴로 팔짱을 낀 루가 심드렁하니 답했다.
“이제껏 네가 한 소리 중에 제일 멍청한 소리네.”
짧은 투정은 내게 명확한 확신을 심었다.
‘스물둘 맞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감정적일 수가 없을 테지.
그럼에도 나의 혼란은 지당했다. 눈앞의 루는 금발이 아닌 청발이지 않은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고작 이틀 사이에 반신의 격에 올라서 내 영혼으로 침투한 건가? 칼레파의 심장이 푸른색이었던 걸 상기하면, 루의 머리칼이 파랗게 변한 것도 이해가 갔다…….
아니, 이해고 뭐고 지금 당장 나보다 더 열심히 탐색하는 기색인 루가 수상하다. 특히 저 표정!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너 진짜 간 크다.”
“……간?”
“네 간이 큰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배짱 좋을 줄이야, 애쉬.”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귀찮았나?”
어처구니없는 물음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너를 왜 귀찮아해?”
“그러지 않으면 왜 기억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 언질 하지 않았지?”
“그건…….”
루는 시원스레 답하지 못하는 날 싸늘한 눈초리로 내려다봤다.
“너와 관련된 기억들이 차근차근 소멸하는 이 기분…… 정말 빌어먹게 더러운 기분이거든. 뭐, 지금 느끼는 이 감정조차 곧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이 감정도 ‘잊는다’라……. 진작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어쩐지 내심 아쉬워졌다. 그의 미래를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라고 할 줄 알았어?”
짓궂게 웃은 루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듯 잡아챘다. 강인한 힘으로 날 일으킨 그는 끝없이 모래가 펼쳐진 사막으로 날 이끌었다.
“내가 널 잊을 일은 없어, 애쉬. 네 안에 머물러 있는 내 힘 안에, 너와의 모든 순간을 저장해 둘 수 있을 것 같거든.”
“저장이라고?”
잠깐만.
‘설마 디안의 영혼이 내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듯, 루의 힘도 그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건가?’
얼떨결에 루를 따라 걷던 나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사방이 건조한 사막이다.
우주를 향해 뻗어 있던 길은 마치 선 채 꾼 꿈이었다는 양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루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머리통을 잡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
“미래의 나인지 뭔지, 네 입에서 언급될 때마다 더럽게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이것 하나는 마음에 드네. 역시 선구안이 꽤 쓸 만하단 말이야.”
그건 확실히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창의적 발상이기는 했다.
다만 눈앞의 루는 한 가지 큰 착각에 빠져 있다.
기억을 되찾을 루는 이제 막 반신이 된 스물둘의 루가 아닌, 칼레파 루가 될 것이다. 160년 전의 아스트로사 왕국으로 돌아갈 루와 달리…… 나는 160년 후의 펜 로타 제국으로 돌아갈 몸이었으니까.
루의 기억도 그때 연결되겠지.
‘……이제 와 별 소용 없는 구분이려나.’
기억이 돌아오면 무엇 하는가?
루는 인세에 허용되지 못할 강력한 힘을 사용했고, 그 대가로 신이 되었다. 비록 나 역시 반신의 경지에 오르기는 했으나, 루를 이 땅에 붙잡을 수 있다는 확신은…….
“머릿속이 복잡한가 봐.”
그의 목소리가 흐릿한 환영처럼 들린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하지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더욱 빠르게 흐릿해져 갔다.
“루?”
사막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루의 신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왜곡된 그는 아른거리는 빛이 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미안한데 늦었어. 제아무리 잔머리 굴려도 넌 이제 나에게서 도망 못 쳐. 말했잖아, 끝까지 쫓아간다고.”
“루!”
희미한 불안이 공포가 되어 날 삼켰다.
만약,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이 순간을 기점으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면?
“안 돼, 루! 제발 돌아와!”
사라지는 루를 잡기 위해 반쯤 허우적대며 손을 뻗었지만, 닿을 리 만무했다. 다정하게 뻗어 온 별빛이 그런 내 손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기대해도 좋아, 데이지. 기억을 되찾는 그 순간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경고와 다름없는 소원을 마지막으로, 나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났다.
* * *
그날 애쉬가 남긴 메모는 짧았다.
『건강한 육체를 위한 특별 단련법.
하루에 걷기 2시간, 뛰기 2시간, 팔굽혀펴기 300개, 턱걸이 200개, 창문 닦기…….
공부도 좋지만, 몸 단련을 게을리하지 말기.
너는 세계 최고의 치료술사가 될 디안이니까.』
호쾌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필체를 여러 번 정독한 디안은, 두 눈을 감고 재차 메모를 되새겼다.
‘……좋아, 다 외웠다.’
수첩을 닫은 후. 길게 기지개를 켜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기상 시각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전 8시. 디안은 하루 일과 중 어느 시간대에 애쉬가 조언한 <특별 훈련법>을 끼워 넣을까 고민하며, 제약실로 향했다.
한차례 긴 눈보라가 지난 후의 오스르투라 성은 세레니예의 여름보다 온화했다.
유령성.
“풉.”
애쉬가 입버릇처럼 언급하던 훌륭한 별칭을 떠올리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군인들의 표정이 어제와 달리 유독 밝아 뵈는 것을 봐선, 반란군에 좋은 소식이 찾아온 듯했다.
“대장의 열이 많이 내렸다나. 이제는 미열 수준이라나 봐. 곧 정신을 차리실 것 같아. 이게 다 네 덕이다, 디안. 역시 넌 최고의 치료사야! 진심으로 고마워.”
“뭘요. 그런 말씀을 해 주시니 제가 더 고맙네요.”
디안은 이 성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각양각색의 나이, 고향, 성별을 가진 이들이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세레니예를 벗어난 그는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이 뭔지 차근차근 배워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유쾌하기만 했던 기분도, 해가 진 이후부터는 점점 사그라져 갔다.
‘지금 시각이…… 밤 11시.’
너무 늦다.
대체 언제쯤 잠드는 걸까?
1분이라도 일찍 잠들어야 애쉬가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을 텐데. 이런저런 걱정에 잠긴 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 날, 디안은 오전 8시에 눈을 떴다.
한데 오늘은 애쉬가 메모를 남기지 않았다.
“……음.”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애쉬는 몇 시간 주어지지 않는 하루를 몹시 바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근래처럼 디안의 활동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어진 때는 단시간 내 볼일을 전부 해결해야 할 테니, 배는 바쁠 터였다.
‘게다가 애쉬는 반군의 총사령관과 꽤 가까운 듯했으니까.’
화이트가 언질을 주기를, 애쉬는 총사령관이 쓰러진 직후부터 종일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했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둘은 꽤 쿵짝이 잘 맞는 사이로 보였다.
‘강한 사람은 강한 사람끼리 끌리는 걸까?’
하지만 상대는 한때 첨탑 괴물로 불리던 그 총사령관이지 않은가?
“빽!”
디안은 그 남자가 불편하고 무서웠다.
생에 그 남자만큼이나 불편하면서 꺼림칙한 상대가 없을 것이다.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자잘한 근거를 떠나서 그냥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는 표현이 옳았다. 태생부터 안 맞는단 표현이 절실히 이해되는 상대였다.
“빼액.”
객관적으로 따져도 마찬가지다.
이 반군의 총사령관은 애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정하고, 재밌고, 멋있고,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울 친누나 같은 애쉬와 달리 그 금안의 남자는 재수 없고, 건방지고, 폭력적인 데다, 물론 잘생기기는 했어도…….
“빽애액!”
“……아! 미안해, 애쉬. 지금 꺼내 줄게.”
부랴부랴 새장을 열어 애쉬를 꺼내 주었다.
늦장 부린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노란 부리로 손톱을 콕콕 찌른 애쉬는 새침한 걸음으로 침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발에 매달린 앙증맞은 나즈가 걸음걸음마다 흔들렸다.
다음 날.
디안은 오전 8시에 눈을 떴다.
오늘도 애쉬가 메모를 남기지 않았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수첩에 긴 안부를 남겼다. 문제가 생겼다면 화이트를 통해서라도 꼭 전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아래로 오늘 있었던 일을 짧게 기록해 남겼다.
내일은 애쉬의 답장이 남겨져 있기를 바라며.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의 다음 날도, 애쉬는 메모를 남기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애쉬는 더 이상 메모를 남겨 주지 않는 걸까.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디안의 시야에 새것이나 다름없는 멀끔한 서적이 한 권 들어왔다.
<고급 약초학>.
언젠가, 하는 마음으로 챙겨 오기만 했지 실제로 책을 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안주했던 까닭이다.
『너는 세계 최고의 치료술사가 될 디안이니까.』
문득 마지막 메모의 끝 문장이 떠올랐다. 디안은 홀린 듯 서적을 집었다.
맨 첫 장을 펴서 아주 천천히 정독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빳빳했던 종이에 커다란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며 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욱.”
“빽.”
그때, 경쾌한 걸음걸이가 들리면서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좋은 아침이야, 디안! 잘 잤어? 드디어 오늘 대장이 깨어났…….”
화이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밝았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
평소와 똑같은 나의 작은 매.
평소와 똑같은…… 평소와 전혀 똑같지 않을 앞으로의 하루.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꾸욱 참고 있던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우윽. 우흐윽…….”
“엉?”
당황한 얼굴로 한참 동안 문 앞에 굳어 있던 화이트가 뒤늦게 부랴부랴 뛰어왔다.
“디안? 우, 울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가 우리 디안 울렸어! 누구야! 당장 나와아!”
쩌렁쩌렁한 외침이 온 유령성에 퍼졌다.
곧이어 사방에서 튀어나온 반군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와 디안을 둘러쌌다. 그들은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디안이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된 경위’에 대해 토론하며 저들끼리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따뜻한 온기가 그를 감싼다 한들, 가슴 한편에 크게 뚫린 구멍만은 절대 채워지지 않았다.
아, 이게 상실감이라는 거구나. 조금도 기쁘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애쉬가 떠났다.
변변찮은 인사말도 남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디안은 쉬지 않고 눈물을 쏟아 냈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