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루의 죽음.
그 예기치 못한 난관은, 이제껏 뒷전으로 미뤄 두었던 의문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째서 160년 전의 아스트로사로 왔는가?
이 자문은 손끝에 박힌 가시와도 같아서 시시때때로 신경 쓰였다.
디안의 유산은 정확히 무슨 용도였을까?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용도? 아니면 그 영혼을 통해 과거와 이어 주는 용도?
디안을 살리기 위해 이곳에 불려 온 걸까? 혹은 루를 살리기 위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지는 의문의 끝은 언제나 하나로 귀결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와 친구들, 그리고 삶이 기다리는 나의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한데, 어째서 다시 이 사막에 불려 왔는가?
“디안.”
메마른 모래바람 사이로 내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너는 대체 내게 뭘 하고 싶은 거야?”
심장께에서 하얀 줄이 솟아났다. 동그랗게 말리기 시작한 줄은 곧 하나의 거대한 구를 만들어 냈다. 나의 영혼이었다.
느껴진다.
내 안에 머문 디안의 영혼이,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려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의 편린들이 속속들이 틀어박혔다.
‘……이건.’
새하얀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더 이상 사막 위에 서 있지 않았다.
어둠이 자리한 검은 성.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인지한 감각은 코를 찌르는 역겨운 피 냄새였다.
전신의 피부를 훑고 증발하는 저릿저릿한 감각. 한낱 심장 결정석으로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본능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흥분과 열기를 고조시키는 이 기운.
-끼아아아아!
퀸 섬을 전부 뒤덮고도 남을 강대한 힘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손으로 검을 더 세게 그러쥐며 외쳤다.
“메피스토!”
온 대륙을 공포로 집어삼킨 마도 전쟁.
그랬다, 나는 그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마지막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검을 들고 나아갔다. 그러나 복수심에 찬 절규가 무색하게도, 우리의 설전은 형편없었다.
10년의 헤맴 끝에 마주한 악마는 박제된 노인이었다.
메피스토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마른 등과 흰머리로 듬성듬성한 머리는 열 가닥으로 길게 뻗은 호스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발끝과 손끝은 검게 썩어 문드러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구멍의 안쪽,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이어진 혈관 정가운데 새하얀 진주가 보였다. 메피스토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기계 장치의 에너지가 진주에 집중됐다.
‘저것만은 부숴야 한다.’
심장 결정석의 존재를 모르던 당시의 나조차, 그 사실만은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끼아아아악!
마귀의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튈 때마다, 머릿속으로 형형한 공명이 울려 퍼졌다.
-죽이고.
쏟아지는 적을 찢고, 또 베어 내며, 나는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베어 버려.
이 기억은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다.
4년 전에 잃어버린, 죽음에 대한 기억.
그동안 이 순간과 관련해 상기할 수 있는 정보는 몹시 단출했다. 메피스토와 나의 영혼이 부딪쳤다는 것. 그 과정에서 내가 한 번 죽었다는 것.
마침내 모든 마귀를 베어 낸 후 메피스토와 대면하게 된 이 광경은, 내 기억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허억, 헉.”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벽에 박힌 채 갓 태어난 아이처럼 색색 숨을 내쉬던 악마가 고개를 들었다. 듣는 이의 불쾌함을 자아내는 쉰 음성이 내 귀에 박혔다.
“젊은이여.”
마귀의 시체를 밟고 오르던 날 무심하게 응시하던 두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랄 것이 피어났다.
“나는 한때…… 노예였다.”
그 감정은 바로 쓸쓸함이었다.
“내가 태어난 배는 노예를 운반하는 바지선이었지. 나의 아버지는 그 바지선의 노를 젓는 노예였고, 어머니는 노예와 눈이 맞은 창부였다. 태어날 적부터 사람이 아닌 물건이었던 나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자랐다.”
인류를 유린하던 악독한 대마법사도 죽음 앞에서는 한낱 나약한 인간이 되는 건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내 삶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열 살 때 주인의 심장을 열두 번 찔러 죽이…….”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툭. 단칼에 베인 머리가 뽑힌 무처럼 바닥을 굴렀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나는 발치에 떨어진 머리를 있는 힘껏 후려 찼다.
“다섯 마디나 지껄이게 만들다니.”
입을 떼자마자 죽여 버릴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나는 목이 없는 시체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한 진주.
그 기이한 진주를 잡아채, 메피스토의 몸에서 잡아 뜯어낸 그때.
콰아아앙!
메피스토의 몸이 터지며, 강렬한 태풍이 몰아쳤다.
심장 결정석에 흡수되지 못한 그의 영혼 일부가 나의 영혼과 부딪힌 건,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그다음, 나는 죽었다.
잘게 부서지는 영혼의 틈새를 따뜻한 안개가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디안의 영혼이었다.
* * *
이윽고, 나는 잿더미 속에서 되살아났다.
무려 4년이 걸린 회생이었다.
* * *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사막 위에 서 있었다.
“나를 알고, 받아들이고, 버릴 때 비로소 나의 자아가 완전해진다.”
홀연히 들려온 목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았다. 앞서 쓰러진 ‘네 개의 벽’이 보인다.
이제는 한낱 모래가 된 존재였으나, 그 흔적은 여실했다.
‘삶의 주도권은 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미드윈트리에서 부서진 첫 번째 벽.
‘도무지 이 검을 버릴 수 없다. 버릴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견뎌 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이 검의 공명은 곧 나니까.’
폭포 아래에서 부서진 두 번째 벽.
‘건강하고, 뒷일을 잘 부탁한다.’
‘누군가 비명처럼 내 이름을 내질렀다. 나는 그 부름을 등에 진 채,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길로.’
내 발로 직접 메피스토의 성으로 향할 때 부서진 세 번째 벽.
그리고.
‘나는 죽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디안의 영혼이 보여 준, 잃어버린 4년의 기억.
죽음.
나의 죽음은…… 마지막 네 번째 벽을 깨뜨렸다.
.
.
.
금이 간 영혼에 힘이 깃드는 듯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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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필멸자의 벽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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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
.
.
.
“애쉬.”
.
.
.
드디어!
더는 내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떠한 벽도 보이지 않는다.
허물어진 모래 너머, 천공에 뜬 찬란한 붙박이별들이 보인다. 하늘에는 더 이상 밤도 낮도 존재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아득한 우주가 소리 없이 팽창하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길은 몹시 길었다.
메마른 사막의 언덕 너머에는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늪이, 펄펄 끓는 늪 너머로는 붉게 타오르는 용암의 땅이, 뜨겁게 굳은 현무암 지대 너머에는 짐승이 뛰노는 숲이, 세계수가 잠든 초원 너머에는 구름 위로 솟은 새하얀 설산이 보였다.
‘아.’
불현듯 깨달았다.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임을.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내 안에는 어떠한 근심과 걱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관념은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루어 저 먼 우주를 응시했다.
“멈춰, 애쉬.”
단호한 음성이 내게 요구했다.
그에 나는 자연스레 등을 돌렸다. 푸른 머리의 청년이 내 손목을 붙든 채 서 있었다. 이렇듯, 나의 사막에 허락도 없이 방문할 수 있는 한 명뿐이다.
루의 힘.
그가 날 잡아끌었다.
“더는 그 세계로 넘어가지 마. 허락하지 않아.”
“어째서?”
나는 그의 선택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너는 알잖아. 이건 완전해질 기회야. 이제 나는 날 구속하고 있던 모든 운명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누구 마음대로?”
싱긋 웃는 미소가 서늘하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그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오랜 재회의 인사를 나누듯, 한참 동안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더없이 사랑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착각하지 마, 애쉬. 네가 나 없이 어떻게 완전하겠어?”
자상한 숨결이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듬듯 날 달랬다.
“포기하는 게 편해. 네게는 그 길을 걸을 자격이 없으니까.”
“내게 어떤 자격이 있는지는 내가 정해.”
“훌륭한 대답이야. 노예의 주인이 될 역량이 충분해.”
“너는 날 막을 수 없어.”
하하. 무미건조한 웃음을 흘린 루가 내 얼굴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런 얼간이 같은 소릴 하면 안 되지…… 누가 먼저 날 땅으로 떨어뜨렸는데?”
“…….”
“너잖아. 너 때문에 나는 반쪽짜리 별이 되어 땅에 박힌 꼴이 됐지. 설마 아니라고 할 거야?”
“…….”
“그런데 애쉬. 넌 원래 얼굴이 훨씬 예쁘네.”
신기루 같은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이 내 호흡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