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이윽고 부드러운 감촉이 내 뺨과 귀 아래에 닿아왔다. 입맞춤이 분명한 그 감촉에 귀 끝으로 열이 올랐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잠깐. 심장, 심장은? 벌써 나흘이……!”
“진정해. 난 벌레처럼 나약하지 않아. 저주의 유예가 지났어도 며칠은 더 견딜 수 있어.”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이끌었다. 손바닥 너머로 그의 심장박동이 분명할 울림이 전달됐다.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처럼 느리게.
사그라질 것처럼 약하게.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분명 다행인 건 맞는데…….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나는 왜 기절한 거지?
디안의 눈은?
칼레파의 심장은?
“괜찮아, 불편한 건 곧 끝날 거야.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네 영혼을 이 육체에 붙잡아 둘 방법을 찾고 있거든.”
“……뭐?”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인간 말종만도 못한 생체 실험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다니. 마법사들의 역겨운 욕망이 쓸모 있을 때도 있군.”
모든 상황이 복잡하고 또 난해하다.
나는 혼란의 파도에 휩쓸린 젖은 종이배가 된 기분으로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저주는?”
“원탁회의는 내 저주 때문에 결성된 게 아니야. 네 영혼을 붙잡기 위해 모인 거지. 물론 너의 훌륭한 조언대로 칼레파의 심장은 내가 삼키겠지만.”
“……어째서?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네가 내 모든 계획을 망쳤으니까.”
계획?
“나는 아무것에도 미련이 없었어. 노예는 그래야 하거든. 칼레파의 저주를 받은 순간부터 내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그 운명이 퍽 기꺼웠지. 왜 기꺼웠을까? 사실 아직도 잘 몰라. 난 아주 오래전부터 고장 나 있었고, 몇 가지 나사가 빠진 채 굴러가고 있었어. 잘못 굴러가고 있었던 거지. 어쩌면 죽음은 내가 그때 잃어버린 나사였을지도 몰라. 죽음으로써 나는 완성될 수 있었던 거지. 왜냐면…… 글쎄. 나는 아직도 노예니까?”
“…….”
“그래, 분명 그런,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
“네가 나를 살리려고 하잖아.”
“…….”
“네가 모든 계획을 망쳤어. 그러니까 너도 못 돌아가, 애쉬.”
지친 음성이 단호하게 속삭였다.
“나를 살리고 싶다면 평생 내 곁에 머물러.”
나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루의 이야기가 내 귓가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노예가 된 루, 고장이 난 루, 마지막 명령을 바라온 루. 그에게 무어라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황량한 이 추위 속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그의 온기를 인지한 순간. 잡아먹을 기세로 몰아치던 파도 위, 분분하게 떨어지던 분홍빛 꽃잎이 떠올랐다.
나를 이곳까지 이끌어준 루의 꽃잎이.
“……루, 당신에게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
“…….”
“네가 죽음에 환희를 느낀 건 노예라서가 아니야. 당신은 그냥 조금 지친 거야.”
잠시간 말이 없던 루는 노골적으로 이죽거렸다.
“마치 죽어본 투로군.”
“……그래.”
그에 나는 메인 목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뒷말을 이었다.
“네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걸어 봤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네게 설교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어.”
루는 아무런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팔을 타고 흘러 올라가 단단한 턱 끝을 어루만졌다. 나는 딱딱하게 마른 그의 얼굴을 훑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알아들어? 칼레파가 네게 죽음을 명령한 게 아니라는 의미야. 그는 당신을 시기한 것에 불과해.”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지키지 못한 반신은 인간으로 추락한다. 그러니 루가 받은 저주는 노예가 응당 받아야 할 죽음의 명이 아니었다.
칼레파가 신이 아닌 인간으로 추락하게 된,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역겨운 증거라면 모를까.
“내가 너의 살아갈 구실이 되었다는 점은. 솔직히 말해서 기뻐. 하지만 루, 네가 내 말은 보란 듯이 무시하며, 내 영혼을 속박하려 드는 건…… 그다지 기쁘지 않네.”
루는 인간이다.
인간인 루는 젊고 왕성하며,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지닌 거칠고 진취적인 우두머리였다.
하지만 완숙한 어른이 된 그를 먼저 알아서일까? 괴물이니, 반군의 총사령관이니, 제아무리 대단한 별칭으로 불려도 지금의 루는 내 눈에 그저 어린 떼쟁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네가 그러하듯, 나 또한 얼마든지 널 폭력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루. 어째서 널 걱정하는 내 진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야?”
주위가 보인다.
아니, 눈으로는 보이지는 않아도 감각으로 느껴진다. 두 개의 벽을 넘으면서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등 뒤에 제3의 인기척이 하나.
호흡과 자세가 검사의 견고함과는 한참 멀다. 그렇다고 해서 루가 아무런 힘 없는 민간인을 이 방 안에 뒀을 리는 없었다. 그 말인즉 마법사란 뜻이었다.
“왜 받아들이지 않아?”
조용히 몸을 숙여, 루의 품에 안겼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서 있던 등이 아주 천천히 내게로 기울어졌다. 나는 루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상대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냈다.
“……너는, 지금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르겠어?”
스릉. 울음과 함께 일어서, 검 끝을 등 뒤로 돌렸다. 이윽고 검날 너머로 얇고 여린 마법사의 목이 ‘느껴졌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면 믿게 만들어 주지.”
“읏.”
“루와 나 사이에 맹세의 마법을 걸어, 마법사. 그의 심장이 멈추면 내 영혼도 영원히 사라지도록.”
상대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크게 울렁였다.
“대, 대장.”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한 솜씨인 건 알겠으니, 이만 검을 내려놔.”
마치 멋모르는 아이를 대하듯 부드럽게 타이르는 투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곳의 루는 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른다.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지옥을 10년간 굴러왔단 사실을 말이다.
“나는 네 대장만큼 자비롭지 못해. 죽기 싫으면 당장 행동해.”
검 끝을 더 깊게 찔러 넣자 빨라지는 맥동이 느껴졌다.
“대, 대장…….”
등 뒤에서 루가 내게 속삭였다.
“나를 자극하지 마, 애쉬. 조용히 손을 내려.”
자극? 바라던 바였지만 어떤 면으로는 기가 차는 소리였다.
“글쎄. 누가 먼저 나를 자극했는지 모르겠네. 네가 먼저 내가 그 빌어먹을 첫 번째 벽을 넘도록 만들었잖아?”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순간, 루에게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기운이 내 심장을 옥죄었다.
경지에 오른 무인이 상대를 압박할 때 으레 나타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라파엘로와 검성을 상대해온 내겐 다소 위협적일 뿐, 익숙한 압박이었다.
그러나 디안의 몸은 아니었다.
어리고 허약한 디안의 몸이 루의 힘을 견뎌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
정신력으로 버티려 이를 악물어도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두 다리가 무너졌다. 뇌리가 새하얗게 변하며 극심한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난…….”
나는.
“너 때문에…… 너무 많은 걸 가지게 되었어.”
“……애쉬?”
쓰러지는 내 몸을 루가 다급히 끌어안았다. 뒷목을 받치는 손바닥에서 짙은 당황이 느껴졌다.
“제길. 진정해, 애쉬. 호흡을 가다듬어.”
“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원한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나는 그냥.
살아남았으니 계속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이 화분을 그쪽에게 맡기겠습니다.”
“맡겨?”
“뭐든 좋으니까 화분에 꽃을 피워 보세요. 대신 옮겨 심는 건 금물. 모종이 아닌 씨앗부터 시작할 것.”
그런 꽃을 심으려던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나타샤가 메피스토의 심장에 먹혀 숙주가 되길 바란 적도.
루가 날 두고 저 멀리 사라져 버리길 바란 적도 단 한 번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거지?
“나는 이따위 어둡고 음습한 성에 갇혀서, 처량하게 함께 죽느니 마느니 어수선 피우려고 널 사랑한 게 아니라고!”
홀연한 절규였다.
어둠이 만연한 고요 속에서, 나는 가쁜 숨을 들이켜며 루의 옷을 꽈악 움켜쥐었다. 날 끌어안은 익숙한 온기 덕분인지 금방 호흡이 가라앉았다. 머리가 차가워지기 무섭게 되돌아온 이성이 분분히 날뛰었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릴 한 거지?
수치를 느낄 겨를도 없이, 루가 내 손을 끌어 올려 제 뺨에 올렸다.
“나를 사랑해?”
손가락 끝에 닿은 건 분명, 웃음이 분명한 짙은 호선이었다.
어떤 감정을 억누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극도로 정제된 침착한 목소리가 날 질타했다.
“그건 옳지 않아, 애쉬. 노예는 사랑할 수 없어.”
그게 그런 표정을 지으며 운운할 말인가?
지금 설마 재밌는 거야?
아니면 내 진심을 비웃고 싶은 걸까?
“그 빌어먹을 노예 운운 좀 그만둬, 이 멍청아! 그렇게 계속 얽매이고 싶으면 날 주인으로 모시든가! 알아들었으면 당장 칼레파의 심장을 삼키고, 신이 되어 평생 동안 내 수발이나 들어!”
“좋아, 주인님.”
“…….”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거부할 수 없지”
내 반대쪽 손을 펼친 루가 손바닥 위로 자그마한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손톱보다도 작은 크기였지만, 이 강렬한 기운의 정체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가슴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칼레파의 심장.
“입으로 먹여줘.”
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쉽네, 그 몸은 다른 녀석 소유니까.”
루는 역시 미친 건가? 아는 데도 영혼을 묶니 마니 했다니?
“네 말이 옳아. 이따위 되도 않는 마법사의 힘에 매달리느니, 내가 직접 신이 되어 너의 진짜 육체를 데려오는 편이 낫겠어.”
아직도 그런 바보 같은 소릴 지껄이는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손끝에 그려지는 루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명심해, 애쉬. 돌아온 순간 네가 없으면.”
입술 바로 위에서 그의 느른한 경고가 떨어졌다.
“그때는…… 나도 내가 널 어떻게 해 버릴지 확신할 수 없어.”
펼쳐진 손바닥에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입 맞추듯 조심스럽고 또 길게 내려앉은 그의 체온은 덩그러니 놓인 칼레파의 심장을 삼킨 후 떨어졌다.
“……후.”
심장 결정석은 자아를 지닌다.
메피스토가 마귀의 군대를 일으키고, 디안 케트가 나를 살리고 싶어 했듯, 칼레파의 심장은 루의 그릇을 빼앗으려 한다.
“제기랄.”
보이지 않지만 루의 고통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를 부축하는 내 손과 팔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나는 루를 꽈악 끌어안은 채 쉬지 않고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나는 여기 있어. 넌 이겨낼 거야, 루. 그러기 위한 과정이란 걸 알아…….”
하지만 나는 루가 고통에 발버둥 치다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차마 알리지 못했다.
두 개의 영혼이 부딪히는 순간.
가장 가까운 기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이틀이 지난 후.
내가 디안의 몸으로 눈을 뜰 날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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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