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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86화 (186/195)

186화

* * *

뭐지?

그건 노란 불빛이 아른거리는 회색빛 천장을 올려다보며 처음 든 생각이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불에 덴 듯 가쁘게 몸을 일으켰다. 북대륙의 찬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적막한 방 한가운데, 유령처럼 앉은 남성이 보였다.

정확히 나를 응시하고 있는 두 눈에는 고뇌 어린 우울과 어둠이 가득했다.

“아홉 시야.”

“……설마 하루가 지난 거야?”

루는 대답 대신 벽 쪽의 낡은 괘종시계를 턱짓했다.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는 9.

성밖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으며, 하늘에는 밤의 장막이 깔려 어둡다. 나는 기억 속에 흐릿한 잔상으로 남은 마지막 광경을 더듬더듬 떠올렸다.

‘시간이 늦어서 갑작스럽게 잠든 건가.’

하지만 이건 마치 잠든 게 아니라 기절한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저녁 일곱 시를 살짝 웃돌았던 기상 시간이 대뜸 큰 간격을 띄고 아홉 시로 밀려났다. 물론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디안의 몸이 빠르고 확실하게 회복되어 간다는 증거였으니까.

불현듯 직감이 왔다. 내가 이 몸을 떠나는 건 이제 시간 문제란 사실을.

루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죽음과 칼레파의 심장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입술을 떼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리고 호흡을 들이켜고 내쉬는 순간. 그 모든 순간과 찰나에 루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던 까닭이다.

마치 내가 나임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한참 만에 루가 먼저 서두를 던졌다.

“아무 말이나 해 봐.”

“…….”

“어서.”

“……그 머리 색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머리 색?”

“내가 아는 너는 지금이랑 머리 색이 조금, 아니 많이 다르거든.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머리 색이라, 태어날 때부터…….”

노골적인 한숨이 들렸다.

잠들어 있던 짐승이 길게 기지개를 켜듯 천천히 몸을 일으킨 루가 내게로 다가왔다. 얼음 송곳니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내 전신을 샅샅이 훑다가, 이내 곧 눈꺼풀을 감았다.

털썩, 소리를 내며 내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가 등 뒤에서 두 팔로 날 꽈악 끌어안았다.

“말을 조금 바꾸지. 내가 모르는 빌어먹을 새끼 이야기 말고, 지금 이야기를 해.”

루의 따뜻한 숨결이 귀와 목덜미 근처로 내려앉았다. 나는 등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너는 너무 제멋대로라서 가끔 대하기 버거워.”

“그래서 싫냐?”

“……사실 그 점이 마음에 들기는 해.”

“어디가. 개차반인 게?”

“응, 개차반인 점.”

“그건 좀 문제가 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묘한 만족스러움이 전해지는 억양이었다. 내 얼굴을 제 쪽으로 비튼 루가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며 중얼거렸다.

“네 얼굴이 갈수록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야.”

“그래? 어떻게 변하는데? 내 눈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어.”

“아마 애쉬로 변하고 있겠지. 대충 그 이름이 어울리는 얼굴이니까.”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하던 루가 지나가는 어투로 속삭였다.

“그냥 이 몸을 네 것으로 만드는 게 어때?”

디안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의 몸을 차지하느니 마느니 소릴 하다니. 악질적인 장난에 표정을 굳히자 루의 눈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애쉬.”

비웃음이 명백한 호선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내 앞에서 그리 대놓고 질색하면…… 정말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싶으니까.”

이후 내내 아무 말 없이 내 턱을 쓸어내리던 루는, 저녁 10시가 되자마자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나를 데려갈 거라 기대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나를 침실에 두고 홀로 나갔다. 그것도 문을 잠근 채로.

“빽?”

멍하니 앉은 나를 보며 애쉬가 자그마한 고개를 기울였다.

“……괜찮아, 애쉬. 오늘 유독 눈보라가 심해서 걱정되나 봐. 잠시라도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앓을 수도 있으니까.”

그날은 어째서인지 화이트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 * *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태양이 뜬 푸른 하늘을 못 본 지 벌써 수십 일이 지나고 있어서일까? 이제는 이 어둠이 익숙하기만 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안개처럼 흐릿한 전날의 기억을 되새기던 어느 시점에 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 시야.”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는 10. 어처구니없이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시침을 보며, 나는 천천히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번에도 꿈에서 루를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후 며칠이 흘렀더라?

나는 단지 루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어찌하면 너의 과거가 죽음을 이겨내고 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 그가 과연 칼레파의 심장을 삼키고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으나 루의 힘은 침묵을 고수했다.

‘내일이 마지막인데.’

그랬다, 벌써 루가 언질한 나흘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았다. 나흘이 이렇게 빠르게 흐른다고?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뭘 했지? 루가 침실을 나간 후, 애쉬와 시간을 보내면서 디안이 남긴 메모를 확인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왜지?’

초조할 정도로 희미한 기억력에 마른세수하며 고개를 들었을 땐, 코앞에 선 루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럼에도 아주 긴 시간 잠들지 못한 듯 눈 밑이 검었다. 스물둘의 루와는 너무도 조화롭지 않은 낯이라, 억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심장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모래 씹는 기분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왜 그래, 루? 살아난 시체를 본 얼굴이야.”

짧은 정적 끝에 루의 입술 틈에서 쉰 음성이 새어 나왔다.

“네가.”

“……”

“그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면서 말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홀연히 뻗어진 손끝이 내 뺨에 닿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얼굴을 쓸고 호흡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날 끌어안았다.

“몇 시에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해?”

“루.”

“자정이야.”

“괜찮아, 루. 자연스러운 거야.”

“네 시간은 짧아져 가고, 디안 세레니예의 시간은 길어져 가지. 네가 죽어갈 동안 디안 세레니예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져. 마치 널 양분 삼듯이.”

심장이 빠르게 뛴다. 이건 내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 루의 불안이, 그가 느끼는 선연한 공포가 내게로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이토록 혼란해 뵈는 루의 모습은 처음이라 그런 것일까? 나 또한 어느 때보다 극심한 초조함을 느꼈다. 한참 입술을 깨물다가, 한 품에 담지 못할 만큼 넓고 또 어린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루.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이름뿐만이 아니라 모든 걸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지금 당장 헤어지게 되더라도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거야.”

“관심 없어.”

“그보다 언제 마지막으로 잠든 거야? 체력을 비축해야 당장 내일…….”

“씨발, 관심 없다고!”

거친 욕설과 함께 몸을 뗀 그가 내 어깨를 부서뜨릴 기세로 쥐었다. 그늘진 황금색 눈동자가 책망에 사로잡혀 사방으로 요동쳤다.

“나중이, 뭐? 내가 모르는 그 엿 같은 내가 어쨌다고? 이제 더는 알 바 아니야. 난 지금이 중요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아무런 미련 없이 앉은 빌어먹을 네가 훨씬 중요하다고!”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루.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러지 마.”

“…….”

“네가 몰라도 그건 너야. 네가 나를 살렸어. 네가 나를 구했고, 그래서 난 지금의 너와 마주 볼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남처럼 말해서는 안 돼. 나에게 넌 오롯이 하나야.”

“…….”

“그곳에도 네가 있고 이곳에도 네가 있는데.”

“…….”

“우리가 함께하는 이 순간도 내게는, 말 못 할 기묘한 운명처럼 느껴져서…….”

그때 비릿한 웃음이 터졌다.

“아, 운명. 그 새끼에 대해서는 나도 아주 잘 알지.”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힘이 서서히 풀렸다.

거칠게 일그러져 있던 루의 낯도 마찬가지였다. 격한 감정에 속절없이 휘둘리던 직전과 달리, 운명을 입에 담은 루는 조금 더 평온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그래, 애쉬.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운명 덕분이야. 평생 지하광의 노예로 살다가 중독되어 처분될 운명. 대홍수에 휩쓸려 땅의 거름이 될 운명. 마귀 실험의 피실험체가 되어 움직이는 시체가 될 운명. 로궤 개새끼들에게 붙잡혀 칼레파의 그릇이 될 운명…… 전부 짓밟고 부순 후 깨달았을 수 있었지. 아, 운명이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날 올려다보는 루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텅 비어 보였다.

“운명이란, 깨진 순간부터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걸.”

불쑥 올라온 금색 머리칼에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숨이 입술에 닿았다.

루가 내게 입을 맞춘 것일까?

의문의 답을 찾기도 전에, 목덜미에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진정 그러했다.

어둡고, 어둡다.

고요하고, 또 고요하다.

마치 지옥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루?”

내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하며, 그 외에는 아무런 감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이질감의 근원을 뒤늦게 파악했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왜지?’

모든 감각이 그대로였지만 오로지 시야만 분간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밤보다 어둡고 낮보다 환해 내 머릿속을 엉망으로 뒤집어 놓았다.

난 어디를 헤매고 있는 걸까? 지금 몇 시지? 이곳은 어디야? 디안은? 애쉬는?

루는?

“루?”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누워 있던 바닥을 확인했다. 차갑지는 않지만 익숙하지 않은 딱딱함이 느껴진다. 침실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의문이 불안이 되고, 불안이 공포로 커져 갈 즈음. 커다란 온기가 내 손등에 내려앉았다.

“나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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