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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85화 (185/195)

185화

가죽 패드에 ‘애쉬’를 적은 후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고작 수십 분 전에도 느꼈지만, 루는 마치 죽은 듯이 잔다. 기척 없이 잘게 숨을 내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미래의 그가 떠올랐다.

‘내가 루의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도 비슷한 광경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이번이 처음인 건가.

나는 몸을 일으켜 루의 옆자리에 조심히 누웠다. 찬란한 금발 아래 금실로 수놓은 듯한 긴 속눈썹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눈썹 끝을 건드리자 내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억센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디안도 이 정도로 길었던 것 같은데. 추운 나라에서 태어나면 다 이런 건가?

“음흉하게 몰래몰래 만지니까 기분 좋아?”

구름이 걷히듯, 깊게 파인 눈매가 위아래로 열리며 황동처럼 선명한 금안이 뜨였다.

손끝에 짓눌린 속눈썹이 마치 새의 깃털 같아 멍하니 응시하는데, 순순히 한쪽 눈꺼풀을 닫아주기에 눈두덩이를 가만가만 문지르며 대답했다.

“응.”

무던한 반응이 불만족스러웠는지, 루는 두눈을 더 얇게 좁혔다.

“애쉬 맞는데.”

“맞아, 애쉬야. 사실 그 이름으로 날 부르는 사람은 너랑 디안밖에 없어. 옛날에 버린 이름이거든.”

무언가를 가늠하는 양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루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럼 디안 세레니예에게 전해. 널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굳이? 미안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 이름은 디안과 다름을 구분하는 유일한…….”

“구분이고 뭐고, 내 눈에는 네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니 알 바 아니야. 그게 공평해. 내 이름은 너만 부르는데, 네 이름을 그딴 애새끼와 나눠 가질 수는 없지.”

“네가 더 애 같거든?”

“뭐…… 절반은 옳아. 이래 보여도 고작 스물둘이니까. 반군에서 나보다 어린놈은 1만도 안 돼. 그러는 넌 몇 살인데?”

언제나 느끼지만, 루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아주 놀라운 재주를 지녔다.

괜히 뒤숭숭해지는 기분에 손을 거두려 했지만 곧바로 붙들렸다. 원하는 답을 듣기 전까지 절대 안 놓을 기세라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린 날 꼬신 건 너야…….”

“알았으니까 몇 살이냐고.”

“…….”

“마흔?”

“…….”

“설마 쉰?”

“……서른 조금 넘어.”

“흐음.”

그 침음성은 뭔데?

어쩐지 떨떠름하지만, 짧은 반응에 일일이 심란해할 여유는 없다. 내가 지닌 모든 심란함은 이미 루의 생존 문제에 쏟아붓는 중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작은 노크와 함께, 문 너머에서 한 남성이 “총사령관님, 회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지금 참석하시면 됩니다.”라고 알렸다. 북대륙의 명성 높은 마법사가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는 그 회의였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내 손목을 지분거리기 바쁜 루를 침대 밖으로 밀어냈다.

“안 나가? 회의에 참석해야 하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네 생명과 직결된 회의인데.”

루는 무언가 심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날 쏘아 봤다.

“말 안 해도 알아.”

똑똑.

“총사령관님.”

말과 달리 꿈쩍도 안 하는 루를 재차 밀어냈다.

“어서 가라니까?”

“갈 테니 너도 따라 와.”

“……그래도 돼?”

“안 되는 건 없어.”

그건 꽤 마음에 드는 자신감이네.

당연한 말이지만, 루의 제안은 곧장 받아들였다.

회의는 1층 다이닝 룸에서 진행됐다. 춥고 황량한 다이닝 룸 내, 커다란 원탁을 둘러싼 14인의 마법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이닝룸 입구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이 원탁회의의 유일한 청중이 되었다. 다행히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원탁 한가운데 전시하듯 놓인 푸른색 진주.

저 혼탁하고 신비한 빛을 발하는 푸른색의 진주로부터, 루에게서 느낀 음산한 기운이 풍긴다.

‘저게 칼레파의 심장인가.’

세레니예의 임무가 칼레파의 아바타를 제련하는 일이었던 만큼, 칼레파의 심장 역시 세레니예 가문이 보호하고 있었던 했다.

심장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모든 마법사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원탁은 조용했다. 그러나 서로를 탐색하듯 조용하고 겸연쩍은 분위기도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면서 쉼 없는 토론으로 이어졌다.

“칼레파는 반신이라 불린 자오. 신이 내린 저주를 어찌 한낱 인간인 우리의 손으로 부술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우리가 모인 겁니다. 반신이라 한들 이미 심장 결정석만 남기고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분명 방책이 있을 겁니다.”

“제 배 불리기 바쁜 귀족도, 군대에 눈이 먼 왕족도 아닌 반군 총사령관의 목숨이 달린 일이잖소! 사활을 걸어서 반드시 성공해내야 하오. 조국에 그리 고대하던 자유가 찾아왔는데, 총사령관에게 변고가 생기면 반군도 크게 흔들릴 것이오!”

“맞아요. 당장 이 심장 결정석의 힘을 이용해 저주를 중화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듯하네요.”

평등을 의미하는 원탁회의에서도 루의 자리는 유일한 상석처럼 느껴졌으며, 그 광경은 몹시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턱을 괸 채 두 눈을 내리뜬 루는 무료해 보였다. 이따금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기는 했으나 기계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메마른 그의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피어나는 때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전부였다. 우리는 종종 눈싸움을 했고 작게 인상을 구기거나 코끝을 씰룩이는 일로 소통 아닌 소통을 나누었다.

그런 와중에도 원탁 마법사들의 관심이 내게 쏠릴 때면 느릿하게 어깨를 돌리며 주위를 돌렸다. 마치 내게로 집중되는 이목을 버티지 못하겠다는 양.

‘이 토의에 가치랄 게 있나?’

적어도 원탁 마법사들 중 심장 결정석의 마법적 활용에 관해 정통한 자는 없어 보였다. 메피스토의 심장과 디안의 심장을 통해서 별 이상스런 사건을 경험해온 나로서는 탁상공론과 다름없게 느껴졌다.

새벽 2시.

마법사들 각자가 새로운 목표와 성취욕을 지닌 채 퇴장한 시각.

“어때.”

단둘을 제외하고는 텅 빈 다이닝 룸에서, 루가 내게 넌지시 물었다.

“너도 이 저주의 해결책이 칼레파의 심장에 달렸다고 생각하나?”

“전문가를 모아놓곤 내게 조언을 구하는 거야?”

“뭔가를 아는 눈치거든.”

의자에 등을 기댄 루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감이 좋아, 애쉬. 내 목이 지금까지 멀쩡히 붙어 있는 건 뛰어난 검술이나 훌륭한 미모 덕이 아니라 직감 때문이야. 특히나 분 단위로 노예가 죽어가는 구렁텅이에서 자라온 탓인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지.”

“마법사들이 믿음직스럽지 않나 보네. 하지만 내 눈에는 꽤 간절해 보였어.”

“지들이 간절해 봤자 너만큼 간절하지는 않지.”

“…….”

“내 눈에는 네가 가장 간절해 보여, 애쉬. 아마 나보다도 더. 그러니 단 한 사람의 말을 믿으라면 네 말을 믿겠지.”

“후회할지도 모르니 그런 식으로 단언하지 마. 나는 그들만큼 마법에 정통하지 못하니까.”

“그 말은 적어도 꽤 가치 있는 해결책을 안다는 뜻이겠군.”

눈을 뜬 루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겠어?”

어찌해야 죽지 않을 수 있냐고?

답은 간단하다. 칼레파와 같은 반신이 되어, 그가 남긴 저주를 몸소 풀어내면 된다.

쉬운 이치였으나 원탁의 마법사 중 누구도 루에게 ‘반신이 되라’는 조언을 남기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 간절하다고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으므로.

반신.

네 번째 벽을 넘은 존재.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내 곁에는 그 벽을 넘은 두 사람이 있다. 그중 한 명은 바로 이 육체의 주인, 디안이기도 했다.

“너희는 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디안을 안다.

디안은 따뜻하고, 포근하며, 자상하다. 그런 그가 제자들의 바람을 알면서도 구태여 네 번째 벽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고 표현했다면, 그건 진실로 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 테다.

그러므로 네 번째 벽은 아주 고통스러운 벽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네 번째 벽은 몹시 후회스러운 벽일지도 몰랐다.

또는…… 네 번째 벽 자체가 인간이 넘어서면 안 되는 벽일지도 모르지.

고로 네 번째 벽은 인간이다.

인간은 신의 힘을 넘보지 못한다. 필멸자가 반신이 되기 위해서는 필멸이라는 운명을 깨부수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후대에 치료술사로 이름을 날릴 반신 디안 케트가 경험한 그것.

“누가, 누가 제발 도와줘……!”

로궤를 이끄는 세 명의 칼레파는 물론, 온 대륙에 악명을 떨친 메피스토조차 끝끝내 넘지 못했던 그것.

그리고, 위대한 로드 칼레파이자 북대륙의 반신이 될 루가 넘어야 할 그것.

“죽음.”

“…….”

“내 추측이 옳다면 넌 살기 위해서 죽어야만 해, 루.”

죽음이라는 필멸자의 운명을 이겨내 신이 되다.

그것이야말로, 루가 칼레파의 저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수였다. 하지만 이는 또한 역설적인 수이기도 했다.

죽음만 이겨낼 수만 있다면, 루의 심장은 멈춰버려도 상관없다는 뜻이지 않은가?

결국 중요한 건 방식이다.

과연 어떻게 죽음을 이겨낼 것인가? 가만히 앉아 칼레파의 저주가 실현되기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네 번째 벽을 넘기길 기도해야 하는 걸까?

루는 내 답의 진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금 내게 신이 되라는 거냐?”

“그래.”

“가장 확실하고 최고로 불가능한 조언이군. 좋아. 한데 만약 내가 죽음에서 돌아오지 못할 시에는?”

“아니, 돌아올 수 있어. 칼레파의 심장을 삼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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