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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84화 (184/195)

184화

쥐고 있던 검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그의 눈을 응시하며, 나는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저주, 그리고 나흘의 유예.

이 눈이 나흘 후 죽을 사람의 것이라고? 농담이라기에는 너무도 지독하다. 더 지독한 사실은, 루가 이따위 농을 즐길 인물도 아니란 점이었다.

“너는 사는 데 아무런 미련도 없어?”

고요하기만 한 침묵 속에서 나는 한 가지 답을 간파했다.

그렇다, 루는 미련이 없다.

이유는 실로 간단하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미 모든 일을 끝마쳤으니까.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는 죽음조차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아니, 죽음이야말로 그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결말일 테지.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이.

‘라파엘로와 나타샤가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그들에게 이런 허탈함을 느끼도록 한 거야?

“……네가 뭔데 이해한다는 얼굴을 해?”

루의 질타는 사나웠다. 입을 꾸욱 다문 채 노려보기만 하자, 마치 내 속을 읽으려는 것처럼 마주 쏘아보던 그가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미련 있어.”

“…….”

“무시하냐? 미련 있다고. 도대체 어쩌다가 네 입에서 내 아이를 가지니 마니 소리가 나오게 됐나 알아야겠어. 고지를 눈앞에 두고 이딴 되도 않는 미련이 다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단한 이유랄 거 없어. 그건 단순히 네가 변태라서야.”

“그러니까 씨발 어쩌다가 그런 변태 소리를 듣게 됐는지 알아야겠다는 거잖아.”

“내 말을 다 믿어?”

“어. 너 거짓말 못 해.”

자신만만한 단언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내심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뒤로 쑤욱 뺀 채 내 반응을 확인한 루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으름장을 놨다.

“혹시나 싶어 경고해 두는데, 어디 가서 누구 속일 생각 하지 마. 나처럼 머리 돌아가는 새끼 상대로는 다 들킬 게 뻔하니까. 넌 너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허술하거든.”

“그걸 이제 말해서 뭐 해? 이미 들킬 사람한테는 다 들켰는데.”

“참나.”

루는 날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지독하게 예쁜 미소를 그려 냈다.

우울한 인상과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천상의 조화를 이루는 그 미소는…… 150년 후의 루가 내게 보일 웃음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아서, 참았던 울분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 노예 농장이란 건 또 뭐고! 왜 너는 계속 고통받고 고생해야 하는 거야? 너 말고 이 군대를 통솔하거나 책임질 수 있는 인재가 그렇게 없어?”

“있겠냐? 백번 양보해서 있다 쳐도 나보다 못났겠지. 난 세기의 천재니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주저앉자, 루는 한참 짝다리 짚은 채 날 내려다보다가 침대 밑에 이리저리 흩어진 머리통을 오른발로 툭, 툭 건드려 한데 모았다.

“노예 농장은…… 말 그대로 농장이지. 지하광에 매장된 정제석을 캐내려면 원석 부산물이 내뿜는 독가스를 매일 수백 그램씩 흡입해야 하거든. 노예가 아니고서야 해낼 수 없는 일이야.”

문을 열어 머리통을 하나씩 굴려 내보낸 그가 자조적인 코웃음을 쳤다.

“노예 농장에 갇혀 살던 가축이, 제 주인이나 다름없던 왕실에게 반기를 들고 종국에는 짓밟아 버리기까지 하다니. 사람 일은 역시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야. 안 그래?”

위대한 로드 칼레파가 되실 분께서 계속 노예를 운운하니 듣는 내 심정이 심히 거북했다.

“그런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니라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야. 너처럼 흉포한 노예를 가두고 부리려 한 대가를 치른 거지.”

“내가 불쌍해?”

“그럼 너는 네가 안 불쌍해?”

“어. 나는 네가 더 불쌍한데.”

피와 흙으로 얼룩진 로프스키 세레니예의 머리에 한쪽 발을 올린 그가 내 얼굴을 스윽 돌아봤다.

“방금 막 확신했거든. 너는 내 눈에 띄면 안 됐어.”

이 무슨 해괴한 엄포인가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잊고 있던 징조를 떠올렸다.

‘저 표정.’

미래의 루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짓는 그 재수 없는 표정이지 않은가? 확실했다. 여기서 반응을 보이면 ‘옳다구나’ 하고 더 집요하게 덤벼들 게 훤했다.

“왜인지 안 물어보냐?”

“…….”

“흐음. 그럼 질문에나 대답해 봐. 너랑 내가 언제 만난 인연인지는 대강 감이 오거든. 문제는 그다음이 헷갈린단 말이지.”

감이 온다니.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라 판단한 때였다.

“우리가 결혼했나?”

나는 코끝을 한껏 씰룩이다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궁금해?”

“상당히.”

둘도 없이 진중한 답에, 나 역시 진중히 대응했다.

“나흘 후에도 네가 살아 있으면 알려 줄게.”

진중하던 표정이 대번 일그러졌다.

“지금 골리냐?”

“아니. ……그냥 루가 나흘 후에도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울적해진 나는 루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걸레 쥐어짜듯 꽈악 움켜쥐며 재차 물었다.

“그럴 거지?”

“이미 다른 녀석들이 백방으로 수소문 중이야. 로궤고 뭐고 북대륙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은 죄다 끌려오고 있으니 신경 쓸 것 없어.”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미래의 루가 지닌 힘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반신의 힘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인지 겪어 왔다는 소리다. 늙고 똑똑한 마법사 몇 명이 모인다고 해서 감히 저지할 마법이 못 됐다.

“……참고로, 내가 이런 울적한 기분에 들 때면 너는 항상 나를 안아 들고 등을 두드려 줬어.”

“하.”

루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다가도 어색하게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어서 난생처음 해 보는 양 서투른 태도로 등을 두드렸다.

“바보야, 안은 게 아니라 안아 들었다고. 아니면 안아 들었다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야?”

길지 않은 정적 후.

내 허리춤을 잡고선 무 뽑듯 쑤욱 들어 올린 루가 한쪽 팔로 내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었다. 발가벗은 꼴로 날 놀릴 때는 주저 없이 안더니, 이제 와서 내숭 떠는 것처럼 내외하는 게 그리 우스울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안 우습다.

사실, 조금 기쁘고 많이 슬펐다.

* * *

어떻게 해야 루의 심장이 멈추지 않을까?

반신의 마법을 무효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힘이 필요하다. 물론 마법의 시전자인 칼레파가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적당한 선에서 파괴시킬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주어진 시간이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과연 사흘 안에 방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빼액!”

그때 새끼 매가 코앞으로 다가와 눈을 맞췄다. 그에 맞춰 방 안으로 들어온 화이트가 내게 새 것으로 보이는 소형 가죽 패드를 내밀었다.

“자, 이거.”

“……이게 뭐야?”

“나즈. 이제 보니까 애쉬에게는 나즈가 없더라? 북대륙에서 매를 키우려면 이게 필요해.”

“나즈?”

“매의 다리에 다는 이름표야. 주인이 있다는 표식을 남기지 않으면 훔쳐 갈 수도 있거든. 매는 귀하니까.”

내내 테이블에 앉아 뭘 하나 싶었는데 이걸 만들고 있던 건가. 매에 대해 유독 잘 안다 싶었는데, 이것저것 배운 게 많은 듯했다.

“이 위에 애쉬의 이름을 새기면 돼.”

“애쉬의 주인은 내가 아니야. 그건 나 말고 디안이 깨어나면…….”

“디안은 당신에게 부탁하던데?”

“나한테?”

“어어. 애쉬의 이름을 제국어로 표기해 달라고 했어. 왜 하필 제국어인지 모르겠다니까? 애쉬는 북대륙에서 아주 멋진 뜻을 지닌 이름이란 말이야. ……그런데 당신 제국어도 할 줄 알아?”

할 줄 알지. 제국인이니까.

지금의 내가 아스트로사어를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 데는, 추측건대 디안의 영혼과 내 영혼이 뒤섞여 있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육체가 내 것이었을 때는 언어 쪽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 같은데. 역시 육체의 주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일까?

주변을 얼쩡거리던 화이트가 크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흠흠. 당신, 내 이름인 화이트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새하얀 사냥꾼이라는 뜻이야. 북대륙에서는 최고의 매에게만 화이트와 애쉬라는 이름이 붙……!”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던 화이트가 돌연 두 눈을 크게 떴다. 짧은 순간, 방 안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몸을 흠칫 떨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붙여진다고.”

“그래? 내 이름도 애쉬인데.”

“뭐? 진짜야? 당신 이름이……!”

재차 몸을 굳힌 화이트가 이제는 아예 속삭이듯 되물었다.

“애쉬라고?”

“응. 재라는 뜻. 아스트로사에서는 다른 뜻으로 쓰이나?”

“아니, 똑같아. 북대륙에서는 눈처럼 새하얀 매와 잿빛의 회색 매를 가장 훌륭한 종으로 치거든. 그런데 정말 당신 이름이 회색 매, 애쉬야? 으, 소름 끼치게 어울려. 회색 매는 보통 성격도 더러운데…….”

검은 눈동자가 3초마다 힐긋 침대를 향한다. 나는 그 침대에 대놓고 자리한 인물을 턱짓하며 화이트를 바라봤다.

“왜 자꾸 루의 눈치를 봐? 그냥 편하게 말해.”

흠칫 어깨를 굳힌 그녀가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펴, 편하게 말했는데에?”

“아닌데.”

“아, 아닌 게 아닌데에?”

화이트는 길게 말끝을 늘인 끝에 뒷걸음질 치며 방을 나섰다. 물론, 그녀가 과도하게 루의 눈치를 보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루는 지금 내 방에 잠들어 있었다.

왜 하필 내 방에서 자냐고?

글쎄. 확실한 건, 몸이 세 개여도 부족할 만큼 바쁜 루가 근래 날 감시하는 데 재미를 들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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