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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82화 (182/195)

182화

* * *

어느 순간부터, 기상 시각을 확인하는 일은 내게 몹시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저녁 6시 40분…….’

이제는 아예 저녁 6시가 아니라 저녁 7시 근방에 눈을 뜨게 됐네.

확실히 당장 이틀 전과 비교해도 오늘 몸 상태는 상당히 좋았다. 특히 급작스러운 복통이나 두통, 이명이 사라진 것은 물론 기본적인 체력이 크게 는 게 실감됐다.

‘근래에는 검을 휘둘러도 근육통이 덜한 느낌이야.’

다음은 하루의 두 번째로 중요한 일과.

수첩을 열어 확인한 메모에는, 이틀 동안 이어진 내 사죄에 대한 다정한 답장이 쓰여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애쉬.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이 저를 얼마나 위해 주고 배려하는지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곳에 온 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 사람들이 겪어 온 참사에 비하면 제가 세레니예에서 겪은 일들은 별것 아니더군요.

차마 입에 담아 동정심을 요구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울 정도로요…….』

나는 발작하는 척하면서 반란군의 동정심을 끌어냈는데. 역시 쓰레기라서인가?

‘그것보다 세레니예 성에서의 일이 별것 아니라니?’

자신의 불운을 하찮은 일로 치부하는 건 못된 습관이며, 건강한 정신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디안과 몸을 공유한 이래 처음으로 아주 긴 잔소리를 남겼다. 쉬지 않고 손을 놀리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새장에서 나와 방 내부(그 유령성의 방 맞다)를 뒤뚱거리며 돌아다니던 애쉬가 부리로 펜촉을 콕콕 찔렀다.

“그만, 애쉬.”

“빽.”

애쉬(매)는 날지 못한다.

고작 이틀 전에 안 사실이었다. 아무리 새끼라 해도, 애완조도 아닌 사냥매를 새장에 넣어 기르는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디안은 후천적인 장애일 거라 여기고 있었는데, 애초 애쉬와의 인연이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매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까닭이었다.

때문에 애쉬의 날개는 보기에 멀쩡했으나 창공을 누빌 수는 없었다.

“……못 나는 게 오히려 너한테는 호재일 수도 있어.”

“빼액.”

“디안이 거둬 줘서 놀고먹고 싸고만 살 수 있잖아.”

“빼애액!”

“흠. 그래, 네 말도 맞다. 놀고먹고 싸기만 하는 삶에 무슨 이유가 있겠어. 사람이든 동물이든 일을 해야 해. 그렇지?”

“빼애애액!”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유리병을 살살 흔들며 애쉬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자, 이거 먹자. 디안이 널 위해 준비한 약인가 봐. 고기에 섞어 주면 되려나.”

“빼액?”

그때였다.

“그, 그건!”

루의 명령에 의해, 보호 명목으로 같은 방에서 지내는 화이트가 대뜸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고개를 돌리자, 한참 동안 검을 다듬던 화이트가 어깨를 움츠리며 뒷말을 이었다.

“……저 새가 아니라 그쪽을 위한 거야. 요.”

그쪽?

“이게 뭔데?”

“그쪽이 요즘 자잘한 사, 상처도 달고 열심히 움직이는 걸 알아서…… 그, 그래서 그쪽이 만들었잖아! 보양을 위한…… 대충 그런 거랬잖아! 요!”

이것 봐라.

‘말하는 꼴이 수상해도 너무 수상한데?’

나는 유리병을 내려놓은 후 화이트 앞에 섰다.

“야.”

창백해진 화이트가 쥐고 있던 검 자루를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열심히 노력할 거야. 오늘도 강해지고, 내일은 더 강해지고, 모레는 더 더 강해질 거야!

듣기 싫은 공명은 아니었으나, 지금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이쪽이 아니다.

“너 디안이랑 무슨 관계야.”

“무, 무슨 말을…… 히끅!”

“솔직히 말해. 뭘 알고 있어?”

그에 화이트의 두 눈이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 채 격렬히 요동쳤다.

그러나 혼돈은 길지 않았다. 이내 곧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소리쳤으므로.

“그래, 다 알고 있다! 머리에 뇌가 들어 있지 않은 등신 아니고서야 너랑 디안이 다르다는 걸 누가 몰라! 이 사이코! 폭력 반대!”

역시 우리 둘의 인격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던 건가? 뭐, 우리 둘의 성정이 워낙 달라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기야 하지만…….

“제인은 모르던데.”

“그 하녀는 머, 멍청하니까 그렇지! 네가 밥 잘 먹고 한 번 웃기만 해도 그저 좋다며 안심했으니까!”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내가 밖에 나갈 때마다 사방에서 덩치 큰 놈들이 호기롭게 결투를 신청하던 이유가…….

“너 다른 놈들한테도 디안의 상태를 알린 거야?”

“이익! 아, 알렸다! 사이코 이중인격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퍼트렸어! 디안이 부, 불쌍해서 그랬는데 불만 있……!”

“잘했어.”

“……어?”

나는 멍한 얼굴의 화이트를 지나쳐, 새하얀 서리가 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악독하고 싸가지 없는 인격이 하나 더 있다고 소문나면 적어도 디안은 덜 귀찮아지겠지.’

서리를 입김으로 녹인 후 손바닥으로 창문을 닦아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드문드문 피워 놓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남녀노소 도란도란 모인 모습이 보였다.

이 유령성을 거점으로 삼게 된 후, 나는 반란군의 규모가 내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흘려듣기로 당장 이 성에 주둔하는 군인만 9만 명이라고 하니, 아스트로사 왕국 각지에 흩어진 인원을 전부 합하면 20만 명을 훌쩍 넘으리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칼레파에라도 진입하는 거야?”

“칼레파? 그게 어디 있는 줄 알고?”

“그럼 다들 뭘 저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건데?”

“……내일 푸스코프 성을 점령할 거야.”

주저하며 들려온 답이었다.

나는 창 너머 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화이트를 쳐다봤다.

“푸스코프?”

“세레니예의 생존자가 의탁한 가문이야. ……푸스코프 성까지 점령하면 아스트로사 왕국은 사실상 로궤로부터 자유를 되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푸스코프 가주는 현 아스트로사 국왕의 섭정이기도 하거든.”

그러고 보니, 현 아스트로사 국왕이 14세의 어린 소년이라고 했었나.

‘그 섭정이란 자가 로궤와 결탁해 왕국의 국민을 실험체로 갖다 바친 건가.’

150년 전이나 후나, 희대의 쓰레기는 각양 각지에 존재하는 듯싶었다.

“푸스코프 성을 성공적으로 점령하면 이 반란군도 해체되는 건가?”

화이트의 검은 눈이 처음 보는 살벌한 기운을 띠었다.

“아니? 우리가 원하는 건 아스트로사의 자유, 그 이상이야. 로궤에 남아 있는 칼레파의 잔당을 완전히 소탕하는 것. 따지자면 그게 가장 근본적인 목표에 가까워.”

입꼬리를 길게 내려뜨린 그녀는 이전에 비해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뒷말을 이었다.

“그 악마는…… 아스트로사를 생체 실험실로 사용해 왔으니까.”

“마귀 군대.”

“맞아, 정말 끔찍한 군대지. 내가 살던 마을이 불탄 것도 전부 그 군대 때문이었어. 그 빌어먹을 자식들은 일부러 오지 마을을 위주로 사냥하고 다녔거든.”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화이트는 그 발언 이후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검을 쓰다듬는 검은 뒤통수를 바라보자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복수라는 일념 하나로, 이 빠진 검 한 자루만 쥔 채 대륙에 발을 디뎠던 내가.

그 지옥 같던 시기를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었던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몇 명의 얼굴이 있었다.

나를 생존의 길로 이끌어 준 이들의 얼굴이.

“……검 들어, 화이트.”

“뭐?”

“너의 그 허접한 실력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것 같으니까, 검 들라고.”

어둡게 침전되어 있던 그녀의 낯이 순간 밝은 기운을 되찾았다.

“지, 진짜? 정말이지? 잠깐만 기다려! 나 장갑 챙겨 올게!”

우당탕 방을 벗어나는 화이트의 등을 응시하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받은 만큼 베푸는 건 번거롭다니까.

* * *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만큼 모든 점이 달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문 근처에 흐릿하게 선 인기척의 존재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인기척의 주인이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루.

그였다.

왜 이곳에 있는 거지? 푸스코프 성은? 점령에 실패한 것일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드디어 일어났네, 애쉬.”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한 인사였다.

내가 아는 미래의 루가 떠오를 만큼 자상한 목소리였지만, 반가움은커녕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기이한 스산함에 심장이 바짝 조여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쿵.

육중한 물건이 추락하는 소리였다.

데구루루 구른 그것은 곧 침대 근처 내 발치에 멈추었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온전하게 둥글지 못한 공을 내려다봤다.

그건 공이 아니었다.

“이제 말해 봐.”

……머리.

“이것들 중 누가 네 등을 그 꼴로 만들었어?”

그건 세레니예의 가주, 로프스키 세레니예의 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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