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나는 남자다.
아, 아니. 아니지. 나는 남자가 아니다.
비록 오랜 시간 남자로 살아왔어도, 내 정신과 영혼은 엄연히 여자라는 정체성을 띠었다.
기실 이렇게 인지하게 된 것도 기껏해야 몇 달 되지 않았다. 하녀의 삶을 선택한 초기에만 해도, 나는 남자인 안데르트로서의 나와 여자인 데이지로서의 나를 구분할 필요성을 못 느꼈으므로.
그런 내가 구분의 소용을 실감한 근원이 있다면.
바로, 너.
“이제 됐냐?”
너야, 루.
‘너라고 이 바보야.’
나는 보란 듯 상의를 탈의한 그를 복잡한 심경으로 응시했다. 첨탑에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말끔한 그의 등을 봐서 기뻤고,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우울했다.
풀이 죽은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내 반응을 잠시간 살핀 루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네 눈에는 내가 길바닥에 나뒹굴면서 검 좀 휘두르는 떠돌이 용병처럼 보이나 본데. 골절이고 자상이고 뭐고, 하루에 서넛씩 달라붙어서 완치시키려 기를 쓰고 있으니 쓸데없는 부분에서 병자 취급하려 들지 마.”
맞아…… 건강해진 게 어디야.
“그래, 그래. 알았어. 대단하세요, 루 대장님. 굉장하시고, 엄청나시고, 훌륭하십니다.”
“까부냐?”
한 대 후려칠 기세인 까칠한 경고였지만, 루는 온천수 앞에 선 그대로 나를 향해 가볍게 턱짓만 했다.
“옷 까고 이쪽으로 와 봐, 확인하게.”
……까라고?
“왜, 왜?”
“뭘 왜야. 네 등 상태 볼 거니까.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는 말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루가 훌러덩 하의를 벗었다.
그래, 벗었다.
뭘? 하의를.
나는 이른 새벽 물안개 낀 강가처럼 흐릿한 시야 너머,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아련한 실루엣…… 그림자…… 뒤태……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찰나의 공황.
아니, 찰나가 아니라 긴 공황. 길어지는 공황. 멈추지 않는 공황…….
루는 나의 침묵을 명령 불복종으로 이해한 듯싶었다.
“지금 내 말 씹냐?”
돌아보는 미간이 참 어여쁘게도 구겨져 있다. 설마, 하는 두려움을 비웃듯 루가 금방이라도 날 덮칠 기세로 몸을 틀었다! 나는 기겁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 정지! 멈춰!”
“웬 지랄을…….”
“나 여자야!”
루의 인기척이 뚝 멈췄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간 밝히지 못한, 지금 이 순간 그와 나 사이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 요소를 지체 없이 알렸다.
“디, 디안은 남자가 맞지만 나는 여자라고…… 10년을 남자로 살았지만 엄연히 여자야. 태어나기를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절대 다가오지 마!”
조금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가 다시 등을 돌렸나 싶어 손가락 사이로 시야를 확인하는데, 좁은 틈 너머 선 루가 심각한 낯짝 그대로 헛소리를 뱉고 있었다.
“싫은데?”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갈…….”
“알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온천수 안으로 조용히 발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하며 손을 내리자 온천 안에 몸을 담그고 바위에 기댄 채 날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다.
“이제 됐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내게 루가 손짓했다.
“이리로 와 봐.”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그의 요구에 따랐다. 새하얀 김이 수면 위를 가득 메운 데다, 온천수 자체도 그리 투명하지 않은 터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루는 매끈한 바위에 팔을 기댄 채 손끝으로 내 뺨을 툭, 건드리고는 중얼거리듯 읊었다.
“그래, 어쩐지…….”
감상하듯 세밀한 시선이 내 얼굴 곳곳을 살폈다. 지금 루의 눈에 비치는 얼굴이, 디안보다는 내 본래 외양에 가까울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곤란한가?”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을 달싹이지는 못했다. 내게 던진 질문이 아니라, 마치 자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얼굴에서 손을 뗀 그가 넌지시 물었다.
“네 몸은 어디 있어?”
“내 몸?”
“그래, 네 몸. 네 영혼을 담는 육체. 따로 있다며?”
“내가 언제 그랬어?”라는 반문은 입 밖으로 꺼내지기 직전 쏘옥 들어갔다. 맞아, 방금 전에 여자로 태어났다고 소리쳤지……. 민망함을 떨치기 위해 크게 헛기침한 후 대답했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있어. 아마 절대 못 찾을걸.”
나는 구태여 ‘절대’에 힘주어 말했다. 절대 못 찾을 예정이니까 기어이 찾아내 검 노예 같은 거로 부릴 생각은 일절 말라는 의미였다.
루는 그런 내 태도가 눈에 거슬린다는 듯, 성의껏 이죽이며 되물었다.
“쉽게 단언하는데. 평생 디안 세레니예 몸에 기생하며 살 거냐?”
“그럴 리가. 돌아가야지.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언젠가는 곧이지 않을까?
실제로, 이전에 비해 내가 디안의 몸으로 활동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유리제비꽃 치료 약을 섭취하기 시작한 이후, 오후 5시만 되면 반사적으로 떠지던 눈이 이제는 저녁 6시쯤 되어야 반응한다. 하루하루 눈을 뜰 때마다 시계의 분침이 너른 간격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게 보였다.
이렇듯 계속해서 깨어나는 시간이 늦춰지다가…… 어느 날 불현듯 디안의 육체를 떠나겠지. 어느 날 불현듯 그와 육체를 나누게 되었듯.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있는 몸에 어찌 돌아간다고?”
“뭐라 말하기 어렵기는 한데…… 가능해,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럼 어디에 있는지 말해.”
“왜?”
“찾아서 가져오면 너도 더 편한 거 아닌가? 디안 세레니예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주제에, 원한으로 뭉친 반란군 틈에 두고 가려고? 시도해 볼 테니까 말해.”
“그러니까 네가 왜?”
순수한 의문에 던진 질문이었는데, 안 그래도 이죽거리면서 차갑게 식었던 루의 얼굴이 더 예리하게 굳어 갔다. 내 반문이 시비처럼 느껴졌나 싶어 최대한 부드럽게 내 사정을 설명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필요 없어. 디안과 헤어질지 말지는 그와 나 사이에서 결정할 문제야. 나는 네가 걱정할 만큼 유약하고 어리숙한 존재가 아니니까.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디안에게 조금 더 신경 써 줘. 시간이 지나면 분명 너희에게 큰 전력이 될 거야.”
뭐, 150년 후면 세계 최고의 치료사가 될 몸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왜?”
하지만 돌아온 건 차디찬 조소뿐이었다.
“내가 널 왜 살려 두는 것 같아? 내가 그 더러운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서? 그곳에서 나눈 약속 때문에? 아, 그거참 불쾌한 착각이네. 널 반시체로 만들어서 핏물을 뺀 사냥감처럼 질질 끌고 다녔어도 약속은 지켜졌어. 어쨌든 바깥으로 끌고 나온 건 맞으니까.”
“…….”
“이해 못 했냐? 다시 말해 줘?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건 디안 세레니예가 아니라 너라는 소리잖아, 연두색 눈깔. 그런데 정작 너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별것 없으니…….”
조금도 다정하지 않은 시선으로 날 쏘아본 그가 익숙하게 명령했다.
“이제 알아들었으면 이름이나 말해.”
나는 뚱하니 대꾸했다.
“디안 세레니예.”
“아, 그래. 디안. 그렇지. 너는 그런 이름이었지.”
잠시 착각했다는 얼굴로 능청스레 고개를 끄덕인 루가 불쑥 내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래서?”
탄탄하다 못해 딴딴한 가슴팍이 내 광대에 맞닿았다. 둥, 둥.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 소리가 듣기 좋게 내 세상을 흔들었다. 본능적으로 루를 밀어내려 했지만 세 개의 벽을 넘은 지고한 검사의 몸이 쉽사리 물러설 리 없었다.
“이름이 뭐라고?”
웃음기 띤 선명한 숨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뭐, 뭐야. 나는 전신을 단단히 경직한 채로 비명 지르듯 외쳤다.
“이 벼, 변태! 디안은 아직 성인도 안 된 어린애란 말이야! 저리 꺼져!”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렇게 소중하신 디안 세레니예를 지키고 싶으면 순순히 질문에나 답해.”
경악스러우리만치 아름다운 얼굴이 내게로 내려온다. 내려오고, 내려오다가 서로의 이마가 닿았다. 세상에. 그쯤 되자 나는 순순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애, 애쉬! 애쉬야! 애쉬라고 불러!”
“좋아…… 애쉬.”
씨익, 웃은 루는 문득 이마를 맞댄 자세 그대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 정도는 해야 입을 여는 거야? 너 생각보다 진짜 음흉하다. 나랑 그렇게 붙어먹고 싶었어? 변태냐?”
변태?
내가?
너무 황당하면 목소리도 안 나온다는 게 이런 의미였던 건가?
남의 속은 모르고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게 웃은 루가 내 등을 멀찍이 밀어냈다.
“오늘은 이 정도까지만 해 두지. 변태는 돌아가도 좋아.”
나는 그가 밀어낸 방향 그대로 열심히 다리를 놀려 도망쳤다. 아른아른한 온천의 열기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러던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으로 중정 한가운데 멈춰 섰다.
‘디안의 몸으로 루에게 설레다니…….’
나는 쓰레기야.
미안해, 디안. 역시 나는 쓰레기가 맞았나 봐.
쓰레기라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