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80화 (180/195)

180화

루가 크리온인지 뭔지를 조곤조곤 갈굴 동안, 나는 엎어진 상태 그대로 얼굴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 냈다.

‘그래, 이게 훨씬 낫다. 내 몸도 아닌데 괜히 반감 샀다가 디안이 더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나도 나름 인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한번 정도는 대인배처럼 넘어갈 줄 안다. 이 군대의 우두머리인 루가 한마디 했으니 오늘 같은 불상사가 다시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화이트.”

루의 부름에 코앞에서 구경하던 하녀 암살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네, 대장!”

“네가 디안 세레니예를 돌봐. 쓸데없이 건드리는 녀석들 없게 신경 쓰고.”

“……제가요? 꼭 저여야 해요?”

입술을 삐쭉 내민 화이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날 안아 올린 채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막사 입구가 닫히기 무섭게 그녀의 품에서 내려와 옷을 더럽힌 흙과 눈을 털어 냈다.

주변을 맴돌던 화이트가 돌연 입을 연 건 이제 막 외투를 벗으려던 때였다.

“……네, 네 도움에 감사하는 녀석들도 있어. 요. 지난 이틀간…… 상태 심각한 녀석들의 치료도 도와줬었고.”

디안이 그랬다고?

힐긋 쳐다보자, 크게 움찔한 화이트가 뒷걸음질 치며 막사 입구를 손에 쥐었다.

“물론 용서한다는 건 아니야. 요. 둘은 별개니까! 요. 그냥 아, 알아 두라고. 요!”

묻지도 않은 사실을 줄줄 읊은 그녀는 도망치듯 막사를 나갔다.

‘치료라…… 참기를 잘했네. 디안이 도와준 놈들을 다시 괴롭히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러나 마음먹은 것과, 달리 내게 주어진 인내는 짧았다.

이틀 후, 디안의 등과 복부에서 새파란 멍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 * *

‘누구일까?’

그건 일을 치르기 전 처음으로 가진 의문이었다.

눈을 떴을 때, 반란군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둔지를 옮기고 있었다. 귀중한 인질답게 마차에 실린 채로 이동되던 나는 바깥을 살폈다. 디안의 몸에 새파란 흔적을 남긴 깜찍한 녀석을 솎아 내기 위해서였다.

“정지!”

운이 좋게도 해가 지기 직전 새로운 주둔지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춘 장소는, 그러니까, 음…….

‘유령성?’

낡다 못해 다 무너져 가는 성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흐릿한 안개. 귀가 아플 정도로 낡은 소음을 내며 열리는 성문. 어딘지 모르게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공기까지.

‘하기야 이 정도로 오랫동안 버려진 성이니 반군이 주둔할 수 있는 거겠지.’

마침 잘됐네. 짐을 옮기고 정비하는 틈을 타 고민하던 사안을 해결하면 될 듯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일부러 이놈, 저놈을 건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중에 유독 찐득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다 못해 어깨까지 부여잡는 이가 있었으니.

“조심해.”

바로 화이트와 함께 세레니예 성에 잠입했던 시종이었다.

‘후보 1번. 세레니예 지하실에서 몸소 고문까지 받았던 몸이니까 복수심도 꽤 클 거야.’

이 녀석이 디안의 몸에 멍을 만들었을까?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만약 디안에게 원한을 가진 반군이라면, 디안이 소란을 일으켰을 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까?

시종이 허리춤에 찬 검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한판 뜨자.”

“……뭐라고?’

“대련하자고.”

빼앗은 검을 발검하자, 나를 바라보던 시종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래도 보는 눈은 있나 본데. 나는 사람이 덜 붐비는 성벽 쪽으로 이동해 시종을 불렀다.

그리고 싸웠다.

“커헉!”

화이트보다 못하구먼.

몇 수 교환하지도 못했는데, 시종은 종잇장처럼 날아가 성벽에 처박혔다. 그에 은근슬쩍 구경하고 있던 놈들 중 몇 명이 튀어나와 그를 부축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디안 세레니예!”

“뭐 하기는, 대련이지. 이번에는 네가 덤빌래?”

“……뭐?”

나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살살 돌리며 뒷말을 이었다.

“너도 내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지지? 원수 같은 세레니예의 자식이 동행하는 모습, 눈 뜨고 못 봐 주겠잖아.”

“…….”

“대장에게 꼰지르지도 않고, 후환 없이 상대해 줄 테니까 덤벼. 쫄리면 도망가시고.”

가벼운 도발이었으나 반응은 꽤 열성적이었다.

후보 2번.

“켁!

“다음.”

……후보 5번.

“크윽.”

“다음.”

……후보 9번.

“으, 으아악!”

“다음.”

그렇게, 정확히 11번째 후보를 쥐어팰 때였다. 묘한 기시감을 느낀 나는 후보 12번을 앞에 두고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뭐지?

‘이 자식들, 복수심과 원한에 활활 타오르는 눈이 아닌데?’

나와 검을 맞대기 위해 길게 줄 선 무인들의 상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에 띈 몇몇 놈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당장 이틀 전 사태의 주범인 크리온조차 예상과 전혀 다른 눈을 한 것으로 봐선 일부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뭐야, 네 친구가 추한 꼴을 보이며 패배했는데 왜 그런 흥분한 표정을 짓는 건데?

뭘 그렇게 두근두근 떨려 해?

어째서 긴장된 낯짝으로 검집을 꽈악 움켜쥐는 거야?

“디안 세레니예!”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화이트가 뛰어왔다.

창백한 안색으로 후다닥 달려온 그녀는 주위 상황을 파악하곤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로 마련해 둔 마차에서 마취약을 만들고 있지 않았어? 무슨 일 있었어? 요?”

쥐어패는 이유에 대해 꽁꽁 숨길 마음은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외투를 벗었다. 삐쩍 마른 여자아이가 옷을 벗어젖히자, 조용했던 주변이 눈에 띄게 소란스러워졌다.

화이트가 넋 나간 얼굴로 날 일으켜 세우려던 순간, 나는 맨등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따졌다.

“오늘 아침 내 몸에 이런 게 생겼는데. 내가 참아야 해?”

“…….”

“얻어맞아도 얌전히 처박혀 있어야 하냐고.”

놀란 얼굴로 내 등을 살핀 화이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건…… 오늘이 아니라 첫날 생긴 멍이라고 하지 않았어? 요?”

“……첫날?”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직접 들었으니까? 요?”

뭐야, 새로 생긴 멍이 아니라고?

루가 주의를 주기 전에 생긴 멍이었어?

“크흠흠.”

아무래도…… 내가 디안의 맨몸을 확인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이런 오해가…….

헛기침하며 주위를 살피는데, 분위기가 여간 무거운 게 아니다. 한데 착각이 아니라면 이 침묵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반성에 의한 침묵이 아니었다.

뭔가 싶어 등을 매만지자 손끝으로 거칠한 흔적이 느껴졌다.

‘상처 자국.’

아차 싶은 마음에 곧장 상의를 내리려 했다.

그러나 꼬옥 쥔 의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간 닿아 오는 싸늘한 한기에, 나는 몸서리치듯 고개를 돌렸다.

“채찍이군.”

“…….”

“로프스키 세레니예냐?”

등 뒤로, 언제 왔는지 모를 루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에 나는 어색한 손짓으로 상의를 내리며 되물었다.

“로프스키……가 누군데?”

“가주.”

다시금 외투를 챙겨 입으며 아주 짧은 시간 고심했다.

‘디안의 사생활을 내 입으로 밝혀도 되나?’

아무리 내가 그 현장에 자리했다 하더라도, 고작 하루였지 않은가? 당사자인 디안에게는 타인에게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일 수도 있었다.

‘그래, 트라우마일 수도 있지.’

그리고 나는 그 트라우마를 세간에 보란 듯이 내보였어. 이거 완전 쓰레기잖아? 나는 쓰레기. 나는 쓰레기……. 쓰레기가 된 나는 축 처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주는 아니야.”

루는 턱을 괸 채 묘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다가, 이내 곧 내 손을 잡아끌었다.

바글바글 모인 군인, 잡일꾼, 요리사 등등을 뒤로 물린 나는 이내 곧 건물 틈 사이사이에 자리한 계단을 올라 본성으로 향했다.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루와 함께.

“……왜 그렇게 쳐다봐?”

“마음에 들어서.”

“뭐?”

“너라면 오지에 던져 놔도 잘 안 죽을 것 같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람. 물론 내가 오지에서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긴 한데…….

“너는 로궤 신도인가?”

로궤 신도는 무슨.

“나는 디안 세레니예. 치료사죠.”

그리고 데이지 파거는 쓰레기다.

내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루가 날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흘겨보며 말했다.

“내가 부르는 ‘너’는 디안 세레니예가 아니란 걸 몇 번이나 설명해 줘야 하는 거냐?”

디안이 아닌 정확히 나를 꿰뚫어 보는 시선 때문일까? 괜히 목 뒤쪽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손을 빼내려 해도 되레 더 세게 부여잡는 느낌이라 길게 반항하지도 못했다.

“로, 로궤의 신도는 절대 아니야. 너나 반군에 해를 끼칠 신분도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그럼 누군데?”

“…….”

“비밀이 참 많으시군. 어쭙잖게.”

으. 네가 내 입장이 되어 봐, 루. 술술 밝힐 수 있나.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한 중정에 도달했을 즈음. 지난 며칠간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루의 상처는?’

디안의 등에 남은 흔적만큼 혹은 그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고문의 흔적이지 않은가?

“마침 잘됐어, 루. 잠깐 저쪽에 앉아서 옷 좀 걷어 봐, 상처 확인해 보게.”

루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는 내 요구대로 옷을 벗는 대신 중정을 지나쳐 성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음산한 후원 너머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아니, 그건 호수가 아니었다.

‘와아. 이런 데 온천이 있다고?’

유령성이 희끄무레한 안개에 둘러싸여 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안개가 아니라, 온도 높은 온천수에 의해 생긴 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환상적인 풍경을 여유롭게 감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설렁설렁 걷던 루가 대뜸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상체 탈의한 모습을 지겹도록 본 나였으나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하의까지 벗어 던질 기세였으니까.

“오, 옷은 왜 벗어?”

“네가 벗으라며?”

귀찮다는 반문에, 나는 그간 조금도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루는 내가 여자인 걸 모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