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뭐, 굳이 말하면 내 장기는 몸 쓰는 일이긴 한데.’
말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대로 밝힐 경우 날 개처럼 굴릴 게 훤하다. 왜냐고? 안 그러고는 못 배기는 실력이니까.
‘난 디안의 유리 세공품 같은 여리여리한 몸으로 개처럼 구르고 싶지는 않은데.’
어디 보자, 검과 주먹을 제외하고 루에게 날 어필할 만큼 잘하는 게…… 아.
맞다, 나 하녀였지.
“청소.”
“…….”
“빨래.”
“…….”
“설거지.”
“…….”
“참고로 요리는 못해.”
루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뱉다가, 이내 곧 재수 없는 표정으로 내 코를 놓았다.
“청소라. 뭐, 그럼 그 구더기 같은 집안의 시종이기라도 했던 건가? 단순한 고용인이라기에는 힘을 사용하는 데 능숙한 것 같고. 일단 피붙이가 아닌 건 확실하겠어.”
짧은 답 하나로 내 정체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루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심히 언짢았다.
“그리고 널 맡던 하녀들은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씨, 뭐야. 이미 내보냈던 거야? 이 못돼 먹은 놈 같으니라고!
“그런 건 미리미리 좀 말해!”
“내가 왜?”
능숙하게 종이를 치운 그는 외투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간이침대 위로 올라갔다. 가벼운 손짓에 한 단계 흐릿해지는 등불 너머, 루의 나른한 목소리가 연기처럼 퍼졌다.
“쉴 동안 얌전히 내 옆에 처박혀 있어. 도망치면 대륙 끝까지 쫓아가서 뒷목 잡고 끌고 올 줄 알아.”
“어차피 갈 곳도 없어. 그런데 아직 저녁 7시조차 안 되지 않았어? 벌써 자?”
더는 대답이 없었다.
해질녘처럼 어두운 내부에 한기가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라, 나도 침낭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삐이이, 삐이. 애쉬 코골이가 근방에서 들려오는 걸 보면 막사 어딘가에 곤히 잠든 듯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존재감에 멍하니 집중하고 있을 때쯤. 휘몰아치는 바람에 막사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보라다.
‘그래서 일찍 잠들었구나.’
궂은 날씨에 야외 활동을 할 수는 없으니까.
드문드문 밀려 들어오는 눈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생각했다.
‘대체 뭐 하는 집단일까?’
이 막사는 어디에 자리 잡았고, 세레니예 성은 어떤 상태일까. 불에 전소되었을까? 미래에 방문한 세레니예 성과 지금의 성은 확실히 다른 모습이긴 한데…….
나는 가방 안에 넣어 둔 수첩을 찾았다.
그러나 세레니예에서 변태 새끼에게 고문하길 강요받다 기절했던 일도 그렇고, 연달은 사태에 메모를 남길 여력이 없었는지 수첩은 휑했다.
‘……일단 어떻게 된 경위인지는 남겨 둬야겠지.’
눈떠 보니 펼쳐진 상황에, 디안은 얼마나 놀랐을까? 내 의도가 어찌 되었든 당사자는 큰 좌절감과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니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끝났구나.
하지만 후회하기는 너무 멀리 왔다. 나는 디안을 안심시키기 위해 길고 긴 메모를 써 내려갔다.
* * *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날 만큼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무너질 기세로 막사가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언뜻 살핀 바깥은 쏟아지는 눈보라 때문에 시야를 분간하기 힘들었습니다.
오전에는 대장(그가 자신을 대장이라 부르라고 했어요)이 챙겨 주고 나간 뜨거운 물에 꽁꽁 언 손을 녹이면서 애쉬의 먹이를 챙겨 주고, 제 몫의 치료 약도 먹었어요.
거센 눈보라 한가운데에서 오도카니 앉아 있다니. 성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경이로운 경험이었어요.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는데, 이상하게 외롭거나 두렵지 않더군요.
신기한 일이죠.』
평소와 달리 삐쭉삐쭉한 글자를 동해서, 디안이 은연중 얼마나 흥분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무섭지는 않느냐고 물으셨죠?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혼자 남은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애쉬 그리고 당신과 함께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아요.
간밤에 악몽을 꿨으나 꿈에서 나타난 건 무너진 세레니예 성이 아니었어요.
잿더미 틈에서 손을 뻗은 건 저를 데리러 온 아버지 그리고 제가 만든 독에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은 이름 모를 자들이었어요. 이들 반란군의 가족이자 친구이기도 한 이들이지요.』
역시 루가 이끄는 군대는 반란군이 맞았구나.
『이제야 제가 지어 온 죄를 정면으로 마주한 느낌이 듭니다.
경멸 어린 시선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을 돕고 싶어요. 제가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떻게 속죄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에요. 숨을 구석이 없어졌는데도 마음은 더 가벼워지다니.
새삼 이런 이중적이고 수치스러운 진심을 털어놓을 상대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네요.』
메모의 마지막에는 루가 속한 반란군에 관해 아주 짧은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4년 전부터 뭍에 올라왔고, 아스트로사 외부에서 세력을 키운 후 점점 국내로 확장하는 기세라…….’
디안도 루처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젊은 남자가 총사령관이라는 점에서 깜짝 놀란 듯했다.
루는 국내외로 굉장한 지지를 받는 듯한데, 디안은 내내 성에서 지낸 탓에 그 이상의 정보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흐음. 루는 처음부터 로궤의 신도였던 게 아니구나. 그럼 이 전쟁을 통해서 나중에…….’
펄럭.
그때, 막사 입구가 거칠게 열리면서 커다란 장정 한 명이 들어섰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씹어 먹듯 디안의 이름을 읊조렸다.
“디안 세레니예……!”
날 선 눈에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예고 없이 들어선 남자는 거침없이 걸어와 내 팔을 부여잡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눈보라가 그친 하늘은 잠잠했다. 날 더러워진 눈 위로 내팽개친 남자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병장기들을 바닥에 쏟아 냈다. 시끄러운 소음에 휴식을 취하던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순간적으로 확 짜증이 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무기 들어.”
“뭐?”
“당장 무기 들라고, 이 개자식아!”
피를 토하듯 외치는 그의 손에는 이미 긴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예고도, 설명도 없이 다분히 거칠기만 한 언행이었으나 나는 남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복수……인 건가?’
세레니예는 아스트로사 왕국을 무대로 학살과 생체 실험을 일삼은 가문이다. 그런 가문의 후계자가 인질이랍시고 끌려왔으니, 여기 사방으로 원수가 널려 있을 터였다.
“……나는 무기를 들 몸이 못 돼.”
“입 닥쳐. 무기 들 몸이 못 된다고? 그럼 활조차 쥘 줄 몰랐던 레일라는? 그녀는 왜 죽어야 했던 거지? 응?”
“…….”
“총사령관님만 아니었으면 너 같은 개새끼는 내가 진작 밟아 죽였을 텐데! 왜…… 왜 너 같은 쓰레기는 보란 듯이 살아남고, 레일라는…… 레일라는……!”
말없이 올려다보고만 있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은 남자가 내 팔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겁쟁이 새끼. 들지 못하겠다면 억지로라도 들게 만들어 주마.”
소중한 사람을 잃은 분노. 그들이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신념.
뭐, 이해는 한다.
나도 나름 전쟁터에서 10년을 구른 처지니까. 안데르트가 죽은 후 복수라는 일념 하나로 마도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저자의 사정까지 헤아려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맞는 걸까? 나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독약을 제조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
디안이 무고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강요였다 하더라도, 디안은 한평생 그의 행동이 빚어낸 결과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란 걸 안다.
다만 내가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필시 디안의 인간성일 것이다.
나는 오늘 디안의 메모를 읽으며 그가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길 선택한 데에 적잖이 놀랐다. 디안의 입장에서는 분명 억울하다 느낄 수 있는 적의다. 세레니예는 그에게 천국이 아닌 지옥이었고, 대개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속죄란 어느 의미로는 용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디안이 계속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런 기회에 기강 한번 제대로 잡아 줘야 얌전해지겠지.’
순순히 검을 집으려던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싸늘한 소름이 전신을 쫘악 타고 올라갔다.
뭐지? 누구야? 누가 이렇게 따가운 시선으로…….
‘루.’
정확히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루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어서 어젯밤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네 쓸모나 말해 봐.”
“그래서 네 쓸모가 뭔데?”
지금 여기서 검을 들면 내 쓸모는…….
‘검쟁이.’
여기까지 와서 또 검을 휘둘러야 한다고?
그건 너무 싫은데?
망설일 동안 꾹꾹 눌러 참던 화가 터져 버렸는지, 남자가 내 어깨를 거세게 쥐었다.
“어딜 도망치려……!”
“으, 으아아악!”
그에 나는 발작하며 남자의 손을 쳐 냈다.
뒷걸음치다 엉덩방아를 찧은 건 나름의 호재나 다름없었다. 바닥에 웅크린 채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사지를 벌벌 떨곤 외쳤다.
“사, 살려 주세요,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흑. 아버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때리지 마세요…….”
“……너.”
“죄송해요. 멍청해서 정말 죄송해요.”
“…….”
“다시는 반항하지 않을게요……. 때리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얇게 열린 시야 틈으로 충격에 굳은 낯짝이 보였다. 내가 이런 발작을 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흑, 죄송해요……. 제, 제발 사, 살려 주세요.”
그래, 이 자식아. 개미 눈곱만큼이라도 죄책감 좀 느껴라.
디안은 아직 미성년자인 데다, 태어날 때부터 몸도 약했고, 얼마 전에는 독살까지 당할 뻔한 삐쩍 마른 꼬마애라고!
사위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다른 이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울기를 한참, 주춤하던 남자의 걸음이 한 발자국 가까워지려던 찰나.
“크리온.”
멀지 않은 곳에서 심히 언짢은 부름이 들려왔다.
“……예, 총사령관님.”
루의 목소리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누가 등신같이 나서서 분위기 이딴 식으로 만들래?”
“죄송합니다.”
“더 할 거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왜. 더 해 보지 그래.”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앞뒤 안 가리고 흥분했습니다.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처박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