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이유 모를 오싹함을 느끼기 무섭게 루가 철창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절뚝거리며 일어선 시종은 내 눈치를 살피며, 루의 귓가에 무언가를 작게 속삭였다. 내 육체였다면 속삭임이고 뭐고 전부 들렸겠지만 디안의 몸으로는 남의 말을 엿듣기엔 역부족이었다.
“인원은?”
“레베카, 드렉슬러, 크리온, 젠리를 포함해 스무 명의 주요 전력입니다. 성 안쪽에서 바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자정까지는?”
“20분 정도 남았습니다.”
잠깐.
‘설마, 세레니예 성을 급습할 계획인가?’
변태 새끼가 캐내려 했던 정보가 이 정보였던 거야?
루가 소속된 집단. 기껏해야 소형 용병단 수준의 단체일 거라 여겼는데, 주요 전력이 스무 명인 걸 봐선 최소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로궤에 반목하는 수백, 수천 명으로 이루어진 단체라. 반란군 같은 걸까.
“대장?”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코앞으로 다가온 루가 아주 당당한 얼굴로 선전 포고했다.
“지금부터 10초 후 너를 기절시킬 거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어처구니가 없네. 구해 준 사람에게 한다는 소리가 뭐? 기절이라고?
“왜, 왜 기절시키는데? 데리고 나가 준다며?”
“알아. 난 약속은 지켜. 북대륙 방방곡곡을 개처럼 끌고 다녀 줄 테니 쓸데없는 걱정 말고.”
잠깐. 아무리 그래도 이건 계획에 없던 거야. 순순히 기절당할 수는 없……나?
‘급습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나한테는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중요한 짐도 다 챙겨 나왔잖아.’
그래, 디안의 하찮은 체력을 고려하면 이게 더 나았다.
“할 말 없냐?”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머리를 굴리며 답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날 돌봐 주던 하녀들은 살려 줘. 그리고 디안의 물건, 특히 치료 약은 몇 개 남기고 왔으니까 꼭 챙겨 주고…… 아! 별관 제약실의 약과 서적들도 웬만하면 건들지…….”
“10초 지났어.”
탁. 뒷목을 후려치는 가벼운 손짓에 정신이 급속도로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이…… 나쁜…… 자식.’
알겠다는 말 정도는 하고 기절시키라고!
* * *
“윽.”
몸이 뻐근하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근육통이 꽤 크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기 무섭게 기절 직전의 상황을 상기하며 주위를 살폈다. 사방이 어두운 공간에 낡은 등불 하나가 오도카니 켜져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일단 성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침낭 아래로 느껴지는 땅의 한기. 거기에 틈틈이 새어 들어오는 찬 바람까지. 외지에 툭 하고 떨어진 듯한 이 느낌이, 절대 낯설지 않았다.
‘임시 막사구나.’
루가 약속을 지켰어. 정말 세레니예 성 밖으로 나온 거야!
불안과 설렘이 묘하게 뒤섞인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막사의 입구 쪽으로 다가가 바깥을 확인하려던 나는 일어선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중상은 없습니다. 다만 드렉슬러의 발목이 비틀려서 회복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막사 안으로 이제 막 들어서던 두 인영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어.’
진심으로 놀랐다. 루가 정말, 사람 같아서.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감상이었지만 그보다 더 솔직한 감상도 없을 것이다.
첨탑의 노예 꼴에서 벗어나 겨울용 두꺼운 외투에 모자, 군화, 가죽 장갑까지 걸친 루는 정말 사람 같아 보였다.
걸음 하나하나조차 왕성한 혈기가 풍기는 그에게선 만사에 통달한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나보다도 활기차고 건장한…….
‘뭐야. 그러고 보니 지금의 루는 나보다 더 어리잖아?’
스물? 그쯤이랬나? 커다란 신장과 위압적인 눈매 때문인지 특별히 앳된 느낌은 안 든다. 저보다 열댓 살은 높아 보이는 남정네들에게 대장이라 불리는 걸 봐선 실력도, 인품(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지만)도 인정받는 듯했다.
나는 그런 루가 대단하게 느껴지기에 앞서 입 안이 썼다.
스물에 불과한 삶을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저런 무력과 장악력을 지니게 되었단 말인가?
“저 인질은 아직도 이곳에 있던 겁니까? 대장,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철저하게 감시하겠습니다.”
‘인질?’
루, 이 자식. 인질이라고? 우리 협력 관계 아니었어?
모자를 벗으며 내 얼굴을 스윽 확인한 루가 넌지시 답했다.
“됐어. 나가.”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곳은 대장의 개인…….”
“나가라고. 피곤하니 다음에 이야기해.”
루가 귀찮다는 듯 손을 털자, 남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막사를 나갔다. 천막이 닫히면서 한바탕 휘날린 먼지와 겨울바람이 내부의 공기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 루는 아무렇지 않게 모자와 장갑을 벗어 던졌다. 가볍게 등불을 건들자 흐릿했던 빛이 환해지면서 막사의 내부가 한층 또렷해졌다. 덕분에 루의 모습도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군화와 외투에 선홍색 피가 튀어 있었다.
“……누구 피야?”
가열용 마도구로 보이는 평평한 사각 철판 위에 주전자를 올린 그가 내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으며 반문했다.
“글쎄. 누구 피일까?”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설렘은 그 한마디에 한 줌도 남기지 않고 괴사했다.
“레베카, 드렉슬러, 크리온, 젠리를 포함해 스무 명의 주요 전력입니다. 성 안쪽에서 바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급습.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나는 다급히 디안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 문제없어. 디안의 몸은 멀쩡해.’
이들은 세레니예 성을 급습할지언정 디안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세레니예 가문을 어떻게 한 거야?”
“아.”
묵묵히 주전자를 응시하던 루가 메마른 탄성과 함께 나를 돌아봤다.
“눈치가 꽤 쓸 만해. 그걸 먼저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첨탑에 갇혀 있던 날 풀어낸 네가.”
“질문에나 대답해.”
루는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멸문은 안 했어. 쥐새끼들처럼 비밀 통로로 도망쳤는지 흔적도 안 남았더군.”
그 말에 얻을 수 있는 해답은 확고했다.
세레니예 성이 점령됐다.
‘나 때문……이겠지?’
흠. 디안에게는 미안하지만 별로 죄책감이 안 드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단 하나.
“날 돌봐 주던 하녀들은? 그들도 통로로 도망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어떻게 했어? 보내 줬어?”
탁.
김 오르는 컵이 내 앞에 놓였다. 나는 펄펄 끓는 물의 모양새를 복잡한 심정으로 노려봤다.
‘죽였다는 건가? 아니면 마시고 화상이나 당하라는 거야?’
그런 의심은 루가 바닥에 커다란 종이를 펼치면서 한 단계 더 심화됐다.
“세레니예 성의 구조다. 비밀 통로와 안전 가옥의 위치를 말해. 네 질문에 대한 답은 위치를 듣고 결정할 테니까.”
설마 날 심문하려 들 줄이야.
‘그것도 하필 디안이 아닌 내가 깨어 있을 때!’
세레니예 성의 비밀 통로와, 세레니예 가문의 안전 가옥? 내가 그걸 알겠냐? 별관 옆에 마구간이 있었단 사실도 방금 처음 알았는데!
‘어쩌지. 모른다고 잡아떼면…… 제인을 죽이겠다는 뜻이잖아.’
성이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으므로 거짓말은 안 통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유사한 가치를 지닌 정보나 물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내가 빈털터리라는 거지.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내가 걸 수 있는 건 한 가지뿐.
바로 나 자신.
“……나는 의학 분야의 귀재야.”
루가 어쩌라는 거냔 눈을 했다.
“신의 아바타라는…… 귀중한 그릇의 내성 연구를 맡길 수준이니까, 독 분야는 이미 웬만한 전문가 수준을 넘어섰다고 보면 돼. 하지만 진심으로 열중하고 파헤쳐 온 분야는 독이 아니라 약학과 의료야. 전시 중 군의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일부 국가는 나라에서 직접 양성할 정도로…….”
됐다는 듯 손을 흔든 그가 내게 턱짓했다.
“너는?”
“나?”
“디안 세레니예의 쓸모는 대충 그렇다 치고. 네 쓸모나 말해 봐.”
“내가 곧 디안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모르는 척 태연하게 뱉은 반박에 루의 비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일전에 말했을 텐데, 연두색 눈깔. 너는 날 못 속인다고.”
“…….”
“나는 흥미가 생기면 속눈썹 개수 하나하나까지 전부 세서 기억하거든. 눈이 어떻게 접히는지, 이가 드러나게 웃는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느릿하게 내리깔린 금안이 컵을 쥔 내 왼손을 응시했다.
“왼손잡이인지 아닌지.”
“…….”
“가문의 적통씩이나 되어서 성의 구조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네가, 디안 세레니예의 두 번째 인격이라고? 날 병신으로 보는 거냐?”
너 병신 맞잖아. 나도 못 알아보는 병신. ……아, 아니. 병신은 어감이 너무 그러니까 바보 정도로 하자.
“디안 세레니예도 너에 관해서는 침묵을 고수하더군. 한 몸을 나눠 쓰는 형제라도 되는 건가?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루는 펄펄 끓는 물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켰다. 루의 목구멍은 강철로 만들어진 걸까?
그가 얼마나 튼튼하든,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없다. 아니, 그런데 내 정체가 그렇게 중요해? 어쨌든 이 몸은 디안의 몸이잖아. 그냥 오락가락하는 정신병자쯤으로 알아 두라고, 사람 곤란하게 하지 말고.
그렇게 침묵을 이용해 시위 아닌 시위를 하던 어느 순간.
“야.”
등을 숙인 루가 내 코끝을 잡아 끌어당기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 테니 내 질문에나 대답해. 그래서 네 쓸모가 뭔데?”
대충 넘어가 준다니 고맙기는 한데.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이라니. 대체 날 얼마나 볶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