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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77화 (177/195)

177화

“뭐?”

“그리고 고문하여 성에 숨어든 목적을 알아내십시오. 이런 일에 늘 겁먹으셨던 아가씨가 오늘 일마저 성공해 내신다면 가주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실 겁니다.”

나보고 지금, 이 시종을 고문하라는 거야?

쿵. 쿵.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디안의 몸이 크게 거부하는 게 느껴졌다. 그가 2시간 동안 기절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안 돼.’

그간, 디안의 심성과 영혼이 얼마나 심약한지 몸으로 직접 겪어 왔다.

독약 제조만으로도 고역스러워하던 그가 제 손으로 직접 한 생명을 짓뭉개는 데 찬성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나는…… 못 하겠어. 아직 거기까지는 자신이…….”

뒷걸음치는 내게 남자가 커다란 노성을 터트렸다.

“정신 차리십시오, 아가씨! 한 번 기절한 것으로 부족하신 겁니까!”

그에 나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해, 디안. 두려워할 것 없어. 여기 있는 건 나야. 내가 널 지킬 수 있다고…….

“귀중한 기회를 날려 버릴 심산이십니까? 가주님께서는 최근 아가씨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계십니다! 아가씨께서 매일 밤 첨탑을 오르고, 로크 도련님을 크게 혼쭐내셨단 사실을 그분이 모르실 것 같습니까?”

“…….”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며, 주제 파악 못 하고 기어오르는 쓰레기를 내치는 결단력! 이제야 아가씨께서 정신 차리셨으니 더 큰 일을 해내셔야지요? 감히 세레니예에 반기를 든 자들의 목을 뽑고 성문 앞에 매달아 쓰레기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십시오! 로궤와 세레니예의 무서움을 쥐새끼들에게 알리는 겁니다!”

말없이 계속 숨만 고르고 있자, 남자가 사나운 표정으로 내 뒤에 선 노인에게 눈짓했다.

“아가씨께서 주저하시는 듯하니 네가 도와라.”

“예.”

공손히 등을 숙인 노인이 내 등을 철창 안으로 천천히 밀었다. 그리고 내 손등을 꽈악 붙잡은 채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이 약을 먹인 후 어금니를 하나씩 뺄 겁니다. 이 분야만큼은 최고의 전문가이니 잘 따라 하십시오, 아가씨.”

“……놔.”

“이 독약은 움직임을 봉쇄하는 약입니다. 조금만 마셔도 마비가 일어나니 저항이 심한 놈들은 먼저 머리를 한 번 후려치…… 컥!”

손아귀로 느껴지는 동맥의 울림이 점차 빨라진다. 나는 노인의 목덜미를 쥔 손에 강한 힘을 주며 경고했다.

“놓으라고 했지. 내 말 못 들었어?”

“커, 커헉!”

고문? 그래, 하라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디안은?

내가 순순히 이자를 고문하면, 그다음은 디안의 몫이다. 한평생 세레니예에 갇혀 독약을 제조하고, 사람을 고문해야 할 업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미래를 허락할 수는 없었다.

팔을 휘두르자 노인의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이곳에서 나가야겠어. 오늘 일은 아버지에게 전하든 말든 마음대로…….”

“아, 아아……!”

그때, 소름 끼치는 웃음이 내 등 뒤에서 터졌다.

“바로 그겁니다, 아가씨……!”

거칠게 숨을 들이쉰 남자가 황홀경에 젖은 눈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그…… 그 흔들림 없이 강직한 눈! 약자를 경멸하는 시선! 쓰러지신 후부터 마음가짐이 완전히 뒤바뀌셨다고 여겼는데, 역시 제 판단이 옳았습니다. 암, 아가씨의 몸에 겁도 없이 손대는 녀석들은 더 냉철하게 내치셔도 되고말고요!”

뭐야, 이 변태 새끼는?

두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떤 변태 새끼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쓰러진 시종을 가리켰다.

“아가씨께 알려드리고 싶은 고문법이 산더미입니다. 자아, 어서 약을 먹이세요! 오늘부터 아가씨는 세레니예의 새로운 별로 떠오를…….”

퍽.

힘을 실은 발길질에 변태 새끼의 안색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별……이…….”

벌벌 떠는 손으로 중심 부위를 가린 그는 미간을 거칠게 구긴 채 힘없이 쓰러졌다.

“하아아. 개자식들.”

나는 검지로 미간을 꾸욱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일을 벌였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은 무를 수 없지. 발끝으로 두 쓰레기를 밀어 낸 나는 첩자로 몰린 시종에게 턱짓했다.

“너, 혹시 검은 머리의 하녀와 아는 사이야?”

“…….”

잔뜩 경계하는 시종을 지나쳐, 벽 쪽에 늘어선 고문 도구 중 단도를 들었다.

“살고 싶으면 따라와. 아니면 여기서 그냥 죽든지.”

그대로 단도를 내리쳐, 변태 새끼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주머니에 넣은 후 지하실을 올라갔다.

이게 옳은 선택이냐고?

모르겠다.

하지만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세레니예는 디안을 가축 부리듯 채찍질하고, 소중한 동반자를 인질로 협박하며, 꿈을 짓밟고, 간접 살인을 종용하는 데다, 고문까지 강요하는 오물 더미 같은 집단이었다.

디안이 오늘의 선택을 원망한다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그와 별개로, 이런 역겨운 집안에 내 생명의 은인을 버리고 돌아가기는 싫었다. 그게 내가 내린 최후의 판단이다.

침실로 돌아간 나는 침대 밑에서 화이트를 끌어 올려,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자물쇠와 끈을 전부 풀었다.

“화이트!”

조심스럽게 뒤따르던 시종이 하녀 암살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안부를 확인했다.

“세상에,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야? 얼굴은 왜 그렇고?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사람이 어쩌다가…… 그쪽도 디안 세레니예에게 처맞았어? 나처럼 잡혔구나!”

“헛소리하는 걸 보니 진짜 네가 맞긴 맞군. 후우, 상상도 못 했는데. 이런 곳에 갇혀 있었을 줄이야…….”

둘이 떠드는 사이 가방을 빵빵하게 가득 채우고, 마지막으로 애쉬의 새장을 품에 안았다.

잠에서 깬 애쉬가 “빼액?”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디안 세레니예. 목적이 뭐냐?”

서릿발처럼 차가운 쇠붙이가 턱 아래에 닿았다.

뒤로 바짝 다가온 시종이 날 위협하며 몰아세웠지만, 지금 내겐 한없이 귀찮은 행위일 뿐이었다.

“야.”

“무슨 목적으로 화이트를 가두고 나를…….”

“깝치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신경이 예민해져서인가 말이 곱게 안 나간다. 여기 와서 성격이 두 배로 더러워진 것 같은 건 단순한 착각일까?

“뭐?”

“잠깐! 잠깐, 잠깐만. 디, 디안 세레니예는 건들지 마. 건들면 안 돼.”

황당무계하다는 반응이 돌아왔지만, 다행히 눈치 빠른 하녀 암살자가 ‘이게 죽고 싶어 미쳤나?’ 하는 눈으로 시종을 말렸다. 나는 그런 둘을 지나치며 말했다.

“첨탑을 올라가야겠어. 괴물을 살리고 싶다면 너희 둘 다 나를 따라와.”

설명할 여유가 없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두껍게 옷을 차려입고 첨탑으로 이동했다.

몸이 긴장 상태에 들어서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더 빠르게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드, 드디어 도착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털어 내며 숨을 고를 동안, 군말 없이 뒤따르던 두 첩자가 철창으로 달려들었다.

철컹!

“대장! 대장이에요? 괜찮아요, 대장? 살아 있는 거 맞아요? 응?”

“잠깐. 멈춰, 화이트!”

철창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하녀 암살자를 가쁘게 저지한 시종이 날 경계하며 물었다.

“이제 진짜 목적을 밝혀라, 디안 세레니예!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주먹.

“이유가 무엇…… 푸엑!”

“후우.”

볼품없이 날아가 철창에 박힌 시종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안 그래도 숨차 죽겠는데 왜 자꾸 신경을 건드는 걸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깝치지 말랬잖아. 나 성격 나빠지게 자꾸 왜 그래?”

“빽!”

“애쉬가 너보고 친구 관리 잘하래. 알았어?”

지목당한 하녀 암살자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으응…….”

나 참. 주먹 몇 번 썼다고 벌써부터 손목이랑 어깨가 저리네.

나는 철창 문을 열고 루 앞에 섰다.

그는 드물게 놀란 눈이었다. 늘 길고 옅고 여유롭던 입김이 짧은 간격으로 천장까지 솟고 있었다. 루의 상태가 이전처럼 나름 멀쩡하단 사실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역시 정신 건강에는 루만 한 존재가 없다. 구금되어 고문당하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모든 화와 흥분이 먼지처럼 사그라졌다.

루는 누구처럼 흥분하거나, 내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재촉 어린 말투로 용건을 묻지 않고 조용히 날 응시하기만 했다. 이 별것 아닌 기다림이 내 불안함을 천천히 잠재웠다.

그래, 루는 항상 루다. 150년 전이든, 후든.

“나와 약속 하나 해, 루.”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냐?”

“널 이 첨탑에서 풀어 줄게.”

루는 두 눈을 부릅떴다.

“대신 디안을…… 나를 이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 줘.”

디안은 어리다.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본래 세계로 돌아가면 끝인 나와 달리, 어리고 약한 디안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이 더러운 야만인들에게서 숨기고, 보호해 줄 어른이.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루는 의심 어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약속해 줄 수 있는지나 말해.”

루. 그는, 두 번째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바라던 바다.”

나는 잘라 온 손가락을 꺼내 루에게로 다가갔다. 목 뒤에 박힌 돌 위로 손을 올려 걸레 짜듯 쥐어짰다.

이윽고, 가죽 끝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떨어지자.

키이이잉.

공명과 함께 마도구가 녹아내렸다.

푸른빛 돌이 흔적도 없이 루의 피부 속으로 자취를 감춘 후. 착각이 아니라면 강렬한 맥동이 들려오는 듯했다.

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주먹을 움켜쥔 루가 어깨를 비틀었다. 콰지직. 벽에 박혀 있던 쇠사슬이 힘없이 딸려 나갔다. 그간 무력하게 감금되어 있던 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할 힘이었다.

자유를 되찾은 육신이 땅 위로 일어서, 창살로 떨어지던 달빛을 집어삼켰다. 빛을 받는 루의 몸은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두 눈을 감은 그가 음미하듯 호흡을 들이켜고 또 내쉬었다.

하아…….

폐부 깊숙이에서 끌어 올려진 숨이었다.

그는 환영처럼 느릿하게 목을 돌렸다. 커다란 몸짓 하나하나에 웅크리고 있던 등 근육이 장대비를 맞이한 협곡처럼 길게 뻗어 나갔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그를 이루는 모든 피와 살이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기지개를 켰다.

루가 이렇게 컸던가?

의구심을 비웃듯, 형형한 생명의 빛을 품은 금안이 나를 돌아봤다.

“……이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달라 했었나?”

불쑥 다가온 커다란 손이 내 턱을 끌어당겼다. 거친 행동과 대비되는, 이질적일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춘 그가 사나운 미소를 띠며 속삭였다.

“약속대로 죽을 때까지 내 옆에 두고 다녀 주마, 연두색 눈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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