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뭐? 어제?
‘정말 디안이 와서 치료했던 거야?’
큰일 났다.
치료한 건 둘째 치고, 둘이서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감이 하나도 안 잡혔다.
루는 나에게 그리 호의적인 편도 아닌데, 설마 디안과는 동명이인을 운운할 정도로 시답잖은 담소를 나눌 만큼 가까워진 건가? 그래서 괜히 더 옆으로 다가오라고 한 거야? 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 뭐, 물론, 전 대륙 방방곡곡 뒤지면 못 나올 것도 없지만…….”
말끝을 흐리며 루를 쳐다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느껴졌다.
언뜻 무신경하게 보일 수 있었지만, 그는 내 표정과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집중을 넘어서 탐색하고 있었다.
어째서?
‘……아, 이런.’
거짓말.
그건 거짓말이었던 거야. 나를 떠보기 위한 거짓. 그래, 어제 디안과 그는 동명이인이 한 명 더 있다는 소리 따위를 나눈 적이 없는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어디서부터 거짓말인 거지?’
일단 디안이 어제 루를 찾아왔던 건 확실해 보였다. 루의 호전된 상태와 늘어난 연고의 양이 그 사실을 방증했으니까. 역시 말을 돌리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나?
그때 루의 입꼬리로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머리 굴리느라 아주 바쁘신가 본데.”
그의 두 손은 분명 석벽에 구속되어 있을 텐데. 마치,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꽈악 움켜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넌 날 못 속여. 헛짓거리 말고 사실대로 말해. 너 누구냐?”
……내가, 누구냐고?
꽉 닫힌 목청으로 외칠 뻔했다. ‘그걸 말하면 네가 알아?’라고.
이 몸? 그래, 디안 세레니예의 몸이다. 하지만 이 얼굴로 루와 만나고, 대화하고, 치료한 건 디안이 아닌 나였다.
미래의 그와 손잡고, 포옹하며, 마주 웃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도 디안이 아닌 나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루는 신이 되어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과거의 그에게 화풀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임을 알기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디안 세레니예가 아닌 누구면?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뭐 할 생각 없는데.”
“그럼 왜 물어봐? 나에 대해 궁금해?”
그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얼굴로 굵은 핏줄이 듬성듬성 솟은 주먹을 크게 쥐었다가 폈다.
무심코 손을 뻗어 손등을 건드리자 투박한 손톱이 움찔하며 굳었다. 살아 있는 그를 느끼며, 나는 진실에 가장 가까운 거짓을 말했다.
“나는…… 인격이 두 개야.”
말하고 보니 뭔가 좀 부끄럽긴 한데. 흠흠.
루의 한쪽 눈썹이 크게 들썩였다. 저 습관은 지금이나 미래나 똑같네. 처음으로 찾게 된 공통점에 어쩐지 들뜬 기분이 들었다.
“이중인격이라고. 낮에는 지금의 나와 다른 인격으로 활동해. 물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
“나를 다른 놈들과 똑같은 병신으로 보나. 지금 누굴 속이려고 들어?”
손등을 뒤집은 그가 돌연 내 손가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너는 디안 세레니예가 아니야.”
“…….”
“그 연두색 눈깔도, 둥그런 코끝도 디안 세레니예와는 미세하게 달라. 그럴싸한 마법으로 다른 놈들 이목을 속이고 있나 본데, 내 눈은 못 속여.”
루의 또렷한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디안이 아닌 나를.
마치, 내 영혼을 꿰뚫을 것처럼.
“디안 세레니예 말고 너. 그 안에 든 너 누구냐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설마, 나를, 보고 있는 거야?
‘어떻게?’
멍하니 그를 마주 보다가 반대쪽 손을 올려 더듬더듬 내 얼굴을 매만졌다.
‘아, 눈. 눈이…… 눈이, 연두색으로 보인다고 했지.’
얼굴도 조금 다르다고 했었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제인도, 가주도, 그 누구도 지금의 나를 디안과 별개로 인식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건 디안의 몸이니까.
그런데도 나를 알아보다니.
“그건…… 반칙이야.”
“뭐?”
“…….”
“어이, 연두색 눈깔. 귀먹었어?”
“……네가 뭐라 하든 나는 디안 세레니예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루는 내 답을 대놓고 조롱했다.
“연두색 눈깔이란 부름이 마음에 들었나 봐? 원한다니 계속 그렇게 불러 주지, 연두색 눈깔.”
저 얄미운 입술이 날 ‘우리 데이지’라고 부르던 그 입술과 똑같은 입술이라, 이건가. 믿기지 않았다.
“있잖아. 본인도 본인이 되게 애 같은 거 알아?”
“애새끼 같은 건 너겠지. 친부의 명령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제멋대로 구는 계집애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데.”
“어울리지 않게 엄청 꽉 막힌 소리 하네. 나는 애라서 가주의 말을 거역하는 게 아니야. 다 커서 거역하는 거지.”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소독제와 연고를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그간 상체라고 해도 팔과 허리 주변만 치료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용기가 좀 생겨서 더 넓은 범위를 도전해 보기로 했다.
“등 쪽 잠깐만 확인할게.”
다행히 루는 몸을 비틀며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심하며 목 뒤쪽의 상처를 확인하는데, 처음 보는 물건이 피부 안쪽으로 깊게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마도구?’
크기의 형태는 약지보다 조금 작은 직사각형이었고 감촉은 마치 돌 같았다. 그리고 색은 선명한 파란색.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꺼림칙해질 만큼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기. 혹시 이것 때문에 힘을 못 쓰는 거야?”
대답이 없다. 그에 온 힘을 다해 푸른 돌을 잡아당겼지만, 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뻣뻣한데. 어떻게 빼는지 알아?”
돌이 파고든 살갗의 상처는 꽤 오래전에 나은 것처럼 보였다.
“응? 어떻게 빼?”
“……로궤의 반신이 만든 마도구를 힘으로 빼려는 멍청이도 다 있군. 그 족쇄는 허락받은 자만 건드릴 수 있고, 제거하는 순간 가주와 로궤에 신호가 갈 테니 괜한 짓거리 하지 마.”
루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빼는데?”
“하아. ……피를 이용해서.”
“피? 아하.”
머릿속에 저장 완료.
추측건대 아마 가주와 이 첨탑에 나를 처음 데려왔던 남자 정도의 피가 필요한 듯했다.
‘연고도 대충 다 발랐으니 이제 돌아갈 준비나 할까.’
가방의 빈자리를 정리하다가 웬 물건이 하나 튀어나왔다. 아, 맞아.
“초콜릿 먹을래?”
무슨 개소리냐는 눈초리가 날 쏘아봤다. 절대로 순순히 받아먹지 않을 기세였다.
“안 먹어? 독 같은 거 안 들었어. 자, 봐.”
작게 부순 조각을 보란 듯이 씹어 먹자, 루의 표정이 더 언짢아졌다.
나는 초콜릿을 손톱보다 조금 더 큰 크기로 잘라 내 루의 입술 사이로 집어넣었다. 거부하기 귀찮았는지 그는 얌전히 입술을 벌렸다.
“옳지. 잘 먹는다.”
칭찬하기 무섭게 퉤, 하고 바닥에 뱉어진다.
세상에, 루. 너 진짜 문제아구나!
“내일은 더 맛있는 거 가져올게. ……아, 한 가지 물을 게 있는데. 혹시 널 데려가기 위해 이 성에 잠입할 만한 사람 있어?”
루는 물끄러미 날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곧 긍정.
‘당분간 잘 살려 놔야 하나.’
귀찮아지겠네. 한숨을 포옥 내쉬며 첨탑을 내려왔다.
* * *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나는 오늘도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또 어디야?’
눈을 떴을 때 침실이 아니란 점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문제는 상황이다.
설마 로크가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디안을 겁박하려는 걸까 싶어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대충 봐도 평범한 공간은 아니었다.
지하 특유의 습한 기운과 어두운 조명. 단단한 석벽. 드문드문 보이는 철창까지. 무엇보다, 진득한 피 냄새가 진동한다는 부분에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처음 보는 노인이 내게 물을 건넸다. 거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노인이 크게 소리쳤다.
“책임관님, 디안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누워 있던 공간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나는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나를 첨탑으로 처음 안내했던, 큰 키의 음산한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2시간 가까이 기절하셔서 놀랐습니다. 그래도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자, 이리로 오시지요.”
남자는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날 이끌고 지하의 좁은 통로를 건너갔다. 뼈를 관통하는 한기에 두 팔을 감싸 안고 오들오들 떨며 뒤따라가야 했다.
‘이 느낌은…… 디안이 기절한 후 일어났을 때 느낌과 똑같은데.’
무슨 일로 기절하게 된 거지? 그 의문은 머지않아 바로 풀렸다.
“이자를 기억하십니까?”
남자가 나를 데려온 곳은 작은 감옥 앞이었다.
허술한 철창 너머, 딱 봐도 성치 않은 상태의 시종이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날 노려보는 눈동자만은 선명하고 또 날카롭다. 마치, 첨탑에 갇힌 루처럼.
“……머릿속이 흐릿해. 누구라고 했더라?”
“이해합니다. 너무 갑자기 쓰러지셨으니까요. 이자는 어젯밤 붙잡힌 간악한 첩자입니다. 아가씨를 위해 남겨 둔 성찬이기도 하지요.”
“성찬이라니?”
빙긋 웃은 남자가 내게 작은 유리병을 건네며 말했다.
“제가 준비해 둔 독약입니다. 저자에게 먹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