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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74화 (174/195)

174화

* * *

휘이잉.

찬 바람이 분다.

그에, 어두운 공간에 자리한 샛노란 촛불이 홀연히 일렁거렸다. 등 안에 새로운 초를 넣고 불을 옮겨 붙인 여성이 의자에서 일어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스물을 넘겼을까? 앳된 인상의 하녀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여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거지는?”

짧은 질문에 하녀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부 끝났어요.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돼요?”

“안 돼. 너는 밀린 계단 청소 마감하고 들어가.”

단호하게 거부하자, 하녀의 안색이 일순 창백해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뜬 그녀는 자리를 뜨려는 여성의 뒤를 졸졸 쫓으며 떼를 부렸다.

“하지만 하녀장님, 이제 곧 자정인데요? 게다가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러게 누가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농땡이 피우래?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화이트. 자꾸 이러면 세레니예 가문에서 계속 일하기 힘들 거다.”

“너무 어두워서 시, 실수로 미끄러지면 어떡해요?”

“조심해서 청소해야지.”

“하녀장님!”

하녀장은 화이트의 억울한 외침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주방을 나섰다.

제자리에 선 채 한참 씩씩대던 화이트는 결국 걸레와 왁스를 챙기고 계단으로 향했다. 이 추운 날씨에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계단까지 청소하고 자야 한다니!

“깐깐한 아줌마 같으니라고. 그까짓 계단 청소쯤 하루 거른다고 사람이 죽어, 집안이 무너져? 이래서 하녀장이란 작자들은…….”

하아아. 계단에 주저앉아 왁스의 뚜껑을 열었다.

그때, 불이 들지 않는 계단 아래의 사각지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자 멀쑥한 인상의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침묵 뒤,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 안녕.”

화이트는 이 듬직한 남자가 하녀들 사이에서 퍽 인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뭐,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꽤 쓸 만하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할 동안 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갔다.

화이트는 내심 떨리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늦게까지 일하는 걸 알고 계속 기다렸구나.’

성큼성큼 다가온 시종이 싱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혼자서 하는 거야? 마침 시간도 남았으니 도와줄게.”

“정말요? 가, 감사합니다.”

“뭘.”

남자는 바구니에서 남은 걸레를 꺼냈다. 이어서 화이트 옆에 무릎을 굽히며 속삭였다.

“열쇠는?”

주위를 살핀 화이트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못 찾았어.”

“감금된 층은?”

“……그것도.”

“디안 세레니예는?”

시무룩하던 화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지난 저녁의 일을 상기하며, 쥐고 있던 걸레를 계단 위에 내팽개쳤다.

“디안 세레니예, 그 번거로운 자식! 하필 속이 안 좋다는 이유로 오늘 식사를 걸러서 보기 좋게 덫을 피해 갔……”

“하아.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이봐, 화이트. 네가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 대체 뭐야?”

노골적인 비하에 이를 악물며 시종을 노려봤다. 그러나 막상 냉랭한 시종의 눈과 마주하게 되자 입술이 말려들어 갔다. 자신의 무능함에 할 말은 잊은 것이다.

화이트의 정체는 하녀로 위장한 첩자였다.

비록 지금은 쭈구리고 앉아 계단이나 닦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나름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바로 첨탑에 갇힌 ‘그 남자’를 구출하는 일 말이다.

“대장이 저 빌어먹을 첨탑에 갇힌 지가 벌써 일주일이야. 네가 여기서 한심하게 계단을 닦는 일로 혼나고 있을 동안 대장은 어떤 고문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고. 제기랄. 역시 널 내 파트너로 데려오는 게 아니…….”

“웃기시네!”

작은 목소리로 최대한 크게 외친 화이트가 시종의 어깨를 쿡, 쿡 찌르며 분을 터트렸다.

“너야말로 잘못된 독을 줬겠지. 나는 분명 디안 세레니예 요리에 정량의 독을 넣었어! 그렇게 작은 몸집을 가진 세레니예 사남쯤은 급사할 정도의 양이었단 말이야!”

시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이트는 이게 문제다. 매사에 꼼꼼하지 못해서 일을 꼭 두 번, 세 번 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썩 믿음직스럽지 않은 그녀를 임무 파트너로 데려온 이유는 단 하나. 여린 외형과 대비되는 살벌한 무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유사시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만큼.

세레니예 가문은 로궤의 생체 실험을 적극적으로 돕는, 그들 입장에선 인간 도축업자나 다름없는 가문이었다.

이런 성에 임무를 실패한 동료가 고립되어 실험 재료로 쓰이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대장 또한 그런 희생은 허락하지 않을 테고.

“화이트.”

“…….”

“명심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마른침을 삼키며, 화이트는 시종이 건넨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아스트로사 3대 극독 중 하나인 유리제비꽃. 디안 세레니예를 죽음으로 몰고 갈 투명한 액체는 곧 화이트의 주머니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또 실패하면 네가 직접 몸을 써서라도 놈을 암살해. 너도 알지? 디안 세레니예를 죽이지 못하면 내성 실험이 시작될 거야. 그리고 내성 실험이 끝나면…….”

칼레파의 숙주로 거듭난다.

그들의 믿음직스러운 대장은 사라지고, 대장의 껍질을 지닌 악독한 살인마가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불안해진 화이트가 시종에게 물었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 계획’은?”

“네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반드시 실행될 거야. 그러니 만약 꼬리가 잡히면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서 살아남아, 화이트. 동료들이 오면 널 구할 수 있으니까.”

당부를 남긴 시종은 걸레를 바구니에 넣고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화이트는 3년 전 겪은 참사를 떠올렸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사냥하던 로궤의 악마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죄 없이 끌려가던 마을 사람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가족에게 제물이 되라고 소리치던 목소리.

“영광으로 알아라! 너희들은 우리가 대륙을 통일하는 데 바쳐질 귀중한 제물이 될 테니! 신께서 너희의 희생을 기꺼이 보듬고, 사랑하시리라!”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되새긴 화이트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두고 봐.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여기서 꼭 대장을 구하고 말 테니까.’

대장은 지옥으로 변한 아스트로사 왕국을 구해 낼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등불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디안 세레니예 암살에 성공해야 해. 반드시.’

* * *

이튿날 밤.

화이트는 긴 고민 끝에 디안 세레니예의 암살 방법을 결정했다. 바로, 독이 아닌 무력을 이용한 암살이었다.

역시 그녀에게는 이 방법이 확실했다. 더는 성공 여부로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았다.

화이트의 계획은 이러했다.

1. 하녀장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쪽지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2. 디안 세레니예의 침실에 몰래 숨어들어서 해가 지기까지 기다린다.

3. 디안 세레니예를 암살하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좋아, 완벽해.’

세레니예 영지의 겨울은 혹독해서 사람들이 하늘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

덕분에 화이트는 타깃이 침실을 비운 사이, 아래층 창문에서 벽을 타고 올라가 유리창을 깨고 침실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진흙을 이용해 깨진 부분을 채우고 커튼으로 창문을 가린 그녀는, 침대 밑에 숨어서 방 주인이 돌아오기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

덜컥.

‘……왔다.’

기척은 두 명.

화이트는 품고 있던 단도를 조용히 그러쥐었다. 이제 곧 저 한 명이 나가면…….

“따라 해. 죄송합니다, 디안 님.”

“죄, 죄송합니다. 디, 디안 님!”

“나 같은 건 가족도 아닙니다.”

“나 같은 건 가, 가족도 아닙니다!”

“나 같은 건 맞아도 싸요.”

“나, 나 같은 건 맞아도…… 악!”

“맞아도 싸니까 한 대 더 맞아.”

내용을 추측하기 힘든 대화가 이어지자, 화이트는 당황했다.

‘뭘 하는 거지?’

침실의 기척은 계속 두 사람을 유지했다. 한참 조용하기에 둘 다 잠이라도 든 건가 싶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뭐야? 이건 왜 깨져 있어?”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디안 세레니예가 깨진 유리창을 발견하고 말았다.

‘들켰다.’

위험하다.

유리창의 상태가 가주에게 알려진다면 침실을 조사하려 할 것이고, 자신의 위치도 금방 들킬 터였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해.’

바로 지금.

화이트는 천천히 기어서 침대 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창문을 살피고 있을 디안 세레니예의 뒤를 덮쳐…….

“……어?”

덮쳐야 했는데……?

화이트는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꼼짝 못 하고 굳어 버렸다.

이제 막 침대 밑을 빠져나온 그녀 앞에, 디안 세레니예가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너구나? 디안에게 독을 먹인 게.”

무던한 미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화이트는 본능적으로 단검을 휘둘렀지만, 검 끝은 디안에게 닿지 못했다. 두 번째, 세 번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무아지경으로 단검을 휘두르던 화이트는 어느 순간 자신 앞에 거대한 벽이 존재함을 인지했다.

‘절대 못 이겨. 이, 이건 말도 안 돼…… 나보다 어린 녀석에게 이 내가 손끝도 댈 수 없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대장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위압감을 이런 작고 허약한 녀석을 상대로 느끼다니? 화이트는 무인으로 태어나, 무인으로 컸다. 그런 그녀의 오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자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깨달은 즉시 스스로 자결하려 했으나, 뒤늦은 판단이었다. 순식간에 그녀를 넘어뜨린 디안 세레니예가 암 바를 걸었기 때문이다!

쓰러진 화이트는 눈을 뜬 채 정신을 잃은 제 옆의 웬 못생긴 놈과 눈이 마주쳤다. 설마 죽은 건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둘 중에 하나 골라 봐. 괴롭게 죽을래, 고통스럽게 죽을래?”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한 질문에, 화이트는 눈물을 삼키며 소리쳤다.

“케엑, 켁…… 사, 살려 주세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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