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루는 잠옷 차림의 나를 접시 돌리는 생쥐를 구경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것도 한참이나.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해 호기롭게 옷을 벗은 나였지만, 디안의 육체로는 추위를 참는 데 한계가 있었다.
“빨리 허락해! 나 춥다고!”
별다른 반응이 없다. 혹시나 싶어 곁으로 바짝 다가가도 고개만 반대쪽으로 살짝 돌릴 뿐, 더 이상 날 위협하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팔뚝 부근에 소독제를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얌전하게 구는 건 좋은데 말이지.’
독한 놈. 옷 입고 치료하라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 추, 추워. 안 되겠다. 나 옷 좀 입을게.”
대답은 듣지 않고 재빨리 벗어 둔 옷을 챙겨 입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독 때문에 치료해 두니 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 하등 관계없으니까.”
언뜻 보이는 그의 마른 뺨에 조소가 걸쳐졌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씹.”
말을 채 끝내지 못한 루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깊게 파인 상처 부근을 꾸욱 누르던 손가락을 뗐다.
“아, 미안. 실수했어.”
“……너.”
미간을 한껏 구긴 루가 살벌한 시선으로 날 돌아보다가, 더 거칠게 인상을 구기고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옷을 제대로 안 입어서 날 못 쳐다보는 건가?’
음, 디안은 남자인데.
하기야 주변이 이리도 어두우니 가까이에서 봐도 남녀 구분이 어려울 듯싶었다. 디안이 워낙 마르기도 했고.
하체까지 손대면 발로 차일 느낌이라, 상체를 중점으로 소독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입마개를 청결하게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올 거야.”
추위로 붉어진 손에 장갑을 끼우는데 등 뒤에서 쉰 음성이 들려왔다.
“목적이 뭐냐.”
답답하다는 듯, 벽에 매달린 양손을 여러 번 쥐었다 편 루가 사납게 물었다.
“독 때문이 아니라고 했었나? 그럼 네가 이런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는 걸 가주도 알고 있나?”
알겠냐?
‘마음 같아서는 내가 누구인지 전부 사실대로 불고 싶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내 주장을 믿을 리 없지.
복잡한 심경으로 루를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다시 등을 돌렸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을 때는 입을 닫는 게 최고다.
‘그래도 루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
나 알고 보면 의학 분야의 영재일지도? 다음은 알약을 준비해 봐야겠다.
……라고 호방하게 마음먹은 것과 달리.
“앳취!”
바로 감기에 걸려 버렸다.
덕분에 방으로 돌아와 잠들기 위해 누웠던 몸을 바로 일으켜야 했다. 물처럼 흘러내리는 콧물 때문에 도저히 곱게 잠들 수 없던 것이다.
몸을 함부로 써서 미안해, 디안. 설마 이 정도로 감기 걸릴 줄은 몰랐어…….
“킁. 어디 보자, 책상 서랍 쪽에 약이 좀 있었나?”
책상을 뒤지다가 문득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디안이 공부하는 책들, 전부 치료 약과 관련된 책들이네.’
그러고 보니 제약실에 보관된 약제들도 전부 새것에 가까웠다.
종류도, 사용 흔적도 전부 독 쪽이 많아서 독에 관심이 큰 줄 알았는데. 제약실에 마련된 독약 관련 서적은 새것처럼 깨끗했던 반면에 치료 약 서적들은 열심히 공부했는지 책 끝이 죄다 닳아 있었다.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맞는 걸까? 나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독약을 제조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
역시 독약 제조는 강요에 의한 건가.
“……아, 여기 있다.”
나는 두 번째 서랍에 보관된 갈색 유리병들을 살폈다.
뚜껑에 붙은 메모를 살피니 죄다 애쉬 전용 약제였다. 애쉬 연고, 애쉬 소화제, 애쉬 지사제 등.
‘디안은 애쉬를 굉장히 아끼는구나.’
다행히 많고 많은 애쉬의 약제 안쪽에 내가 쓸 약제가 보였다. 기침약, 콧물약, 두통제 그리고…….
‘등 연고?’
뭔가 싶어 뚜껑을 열어 보니 사용 흔적이 꽤, 아니, 아주 많다. 대체 어디에 사용했던 연고인가 싶어서 거울 앞에 다가가 옷을 걷었다.
이어서 나타난 광경에 절로 한탄이 뱉어졌다.
“이게 무슨…….”
무수한 상흔.
마치 채찍에 얻어맞은 것처럼, 길고 흉측한 상흔이 디안에 등에 즐비했다. 나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쓸어내렸다. 여기에 연고를 발랐던 걸까? 꽤 오래전에 아물었는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이렇게 만든 거지?’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가주였다. 그 더러운 성정을 생각했을 때, 폭력으로 자식들을 가르쳤다고 봐도 이상할 점이 하나 없던 까닭이다.
간접 살인을 강요하는 것으로 모자라 잔혹한 폭력까지 일삼는 집안이라.
“애쉬.”
“…….”
“디안은 이런 집에서 대체 어떤 정신으로 버텨 온 걸까?”
“…….”
잠든 매는 대답이 없었다.
* * *
가까스로 잠든 내가 깨어난 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면서였다.
“헉!”
갑작스러운 한기에 주위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안 그래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몸에 찬물까지 끼얹어지니 내장이 죄다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콜록, 콜록!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디안 세레니예.”
그때, 누군가 내 멱살을 거칠게 끌어 올렸다.
속절없이 끌려 올라간 나는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이며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려 애썼다.
“감히 오라버니가 말씀하는데 잠이 들어?”
이 못생긴 놈은…….
‘만찬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계속 시비 걸던 그 녀석이잖아?’
게다가 이곳은 디안은 침실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응접실 안에는 못생긴 놈과 나 단둘뿐이었다.
창밖의 하늘색을 보니 지금 시각은 오후 5시 무렵. 아무래도 디안이 이곳에 끌려온 후 잠들고 내가 몸을 차지한 듯했다.
‘어쩐지 사지도 좀 얼얼한 것 같은데.’
설마, 명색이 디안의 형제면서 찬물을 붓는 것으로 모자라 폭력까지 휘두르는 건가? 의심하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짜악!
“이 자식, 내가 딴짓하지 말랬지! 벌레처럼 약해 빠진 새끼가, 너 정말 나한테 죽고 싶냐? 응?”
이게 돌았나. 지금 누구 뺨을 때려? 신경질적으로 쏘아보자 발작하듯 내 멱살을 흔들었다.
“어딜 노려봐?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말해!”
“콜록, 콜록…… 대체 뭘 말하라는 거야?”
“첨탑의 그 괴물을 어떻게 교육시킬 건지 말하라고!”
그 한마디에 곧장 깨달았다.
‘디안의 공을 가로채려 하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무식하게 폭력을 휘두르다니. 나이도 그렇게 어려 보이지 않는데 생각이 짧다.
“싫은데?”
“뭐? 하! 너 아버지를 등에 업고 아주 건방지게 날뛴다? 안 되겠어, 오랜만에 정신 좀 차리게 만들어 주마.”
곧 루에게 연고 바르러 갈 시간인데. 슬슬 이 못생긴 놈을 상대하기가 귀찮아졌다.
‘하아. 하필 디안의 가족이라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난 멱살을 쥔 못생긴 놈의 손을 톡, 톡 두드리며 경고했다.
“됐고. 이 손 놔. 아버지에게 전부 말하기 전에. 네가 이런 식으로 날 방해하는 걸 아시면 참 좋아하시겠어. 안 그래?”
예상과 달리, 못생긴 놈은 내 협박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듯 한참 비웃고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 뒤에 숨겨져 있던 물건을 꺼내 보였다.
“일러 봐, 이 벌레 자식아.”
빽, 빽 작게 우는 새가 앉은 돔 형식의 철장.
“그 순간 네가 싸고도는 이 새 새끼를 바로 죽여 줄 테니까. 저번에도 한 번 겪어 봤지? 응?”
애쉬의 새장이었다.
‘……저번에도라.’
그 말에 서랍 안에 소복이 쌓여 있던 약제들이 떠올랐다. 디안이 애쉬의 건강에 필요 이상으로 불안감을 느꼈던 건 혹시…….
촤악!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졌다. 못생긴 놈의 손에는 어느새 새장이 아닌 기다란 채찍이 자리해 있었다. 두 눈을 시뻘겋게 뜬 그가 비릿한 미소로 내게 명령했다.
“기어 와라, 디안 세레니예. 네가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 주마.”
채찍.
……아아, 그래. 너 때문이었구나.
“너 때문에 디안의 등이 그 꼴이었던 거였어.”
“뭐?”
나는 물에 젖은 머리칼을 이마 뒤로 넘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춥다. 하지만 걸을 수는 있다. 디안은 약하지만 벌레처럼 연약하지 않았다.
“이 미친 자식이 아까부터 내 말을 무시해? 기어 오라는 말 못 들…… 헉!”
명치에 주먹이 박힌 못생긴 놈이 창백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허억, 헉.”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바닥을 구르는 잘못된 면상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래도 되나?’
디안의 형인데.
디안이랑 피를 나눈 가족이잖아. 나중에 디안이 피해를 보면 어쩌려고?
디안의 형제인데…….
디안의…….
“하아. 나도 모르겠다.”
“아, 아아악!”
내게 어깨가 밟힌 못생긴 놈이 거세게 발버둥 쳤다.
미안해, 디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이런 건 형제도, 가족도 아니잖아? 가족은 보듬어 주는 존재이지 채찍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야. 그래, 채찍은 보통 적이 휘두르기 마련이지.
“그러니까 넌 지금부터 내 적이다, 못생긴 놈.”
경지란 육체와 영혼의 합의로 이루지는 것.
내 몸이 아니어서 그런지 조금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쓸 만했다. 힘은 부족해도 기술은 어렴풋이 따라 할 수 있었다.
“야.”
“아, 아아악! 이거 놔! 이 벌레 같은……!”
“닥치고 일단 좀 맞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