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그러고 보니, 디안이 쓰러졌던 날도 가족 식사가 있던 날이었다.
‘암살이라. 아직 성인도 안 된 애를 위협하는 이유가 뭐지?’
형제가 다섯이나 되니, 후계 싸움과 연관된 문제일 수도 있겠다.
‘난감하네. 식사를 아예 걸러야 하나.’
고민하느라 걸음이 좀 느려졌는지 다이닝 룸에 도착했을 때는 빈 의자가 내 몫뿐이었다. 달갑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고, 나는 그 시선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해 뒀다.
이 중에 범인이 있을까?
“늦었구나, 디안.”
“죄송합니다.”
사죄하며 자리에 앉기 무섭게, 주홍색 소스가 버무려진 조개 구이가 나왔다. 나는 식사를 시작한 형제들을 둘러보다가 조용히 시종을 불렀다.
“속이 좋지 않아서 그러는데, 고기 수프에 잘게 썬 채소를 넣어 간단한 스튜를 만들어 주겠어?”
“요리사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형제가 내 속삭임을 들었는지 작게 코웃음 쳤다.
“유난스럽게도 구네.”
공교롭게도 디안이 형제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음식도 제대로 안 넘어가는 상태면서 뭐 하러 만찬에 참여하냐?”
“…….”
“야. 내 말 안 들려?”
“…….”
“허. 요즘 살맛이 좀 나나 보지? 이제는 제 오라비를 무시해?”
“…….”
얘 왜 이렇게 시끄럽냐. 그냥 적당히 쫀 척할 걸 그랬나.
옆자리 놈의 시비 거는 목청이 갈수록 커진 탓에, 조용히 식사하던 가주의 이목이 이쪽을 향했다.
“디안, 몸이 아직 안 좋으냐?”
그럼 독 먹고 쓰러졌는데 좋겠냐?
“좋아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래, 노력하는 모습 보기 좋구나.”
좋긴 뭐가 좋아 저 또라이가. 대화할 때마다 분통 터지게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한데 착각이 아니라면, 디안의 형제들은 저 되도 않는 칭찬조차 조금은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냉담한 분위기가 이어진 지 10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지루한 얼굴로 형제들의 자랑을 듣고 있던 가주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먼저 자리를 뜨지 않는구나, 디안.”
눈치가 좀 빠른걸.
‘디안이 그만큼 이 식사 자리를 꺼렸다는 뜻이겠지.’
나는 끈덕지게 자리를 지키는 의도를 순순히 밝혔다.
“아버지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노예에 관한 건가?”
“예.”
거절할까 싶어 살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가주는 의외로 곧장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너희는 모두 방으로 돌아가거라.”
그렇다고 설마 식사도 마치지 않은 형제들을 내쫓아 버릴 줄은 몰랐지만.
‘이 사람에게 부성애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나?’
우물쭈물하던 형제들 중 한 명이 빳빳한 미소를 지으며 가주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도 그 유명한 ‘첨탑 괴물’이 궁금한데…….”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들 게냐?”
말을 꺼낸 형제는 희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내일 뵙겠습니다.”
폭군이네, 폭군이야.
어처구니없는 행태였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세레니예 가주를 안 지 고작 며칠에 불과했지만, 그가 얼마나 고압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인지 충분히 깨달은 까닭이다.
형제들이 자리를 비운 후.
한 차례 술을 들이켠 세레니예 가주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지?”
“……많고 많은 노예 중 꼭 ‘그 노예’여야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가주의 사나운 낯짝에 괜히 움찔한 나는 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아버지의 명령은 착실히 이행할 생각입니다. 다만 제 눈에 특별한 점이 없어 보이기에…….”
“디안, 너는 그 노예가 몇 살로 보이느냐?”
꿈속에서 나눈 루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대략적인 숫자를 말했다.
“스물이 조금 넘어 보였습니다.”
“맞다. 놈은 스물을 겨우 넘겼고, 세 개의 벽을 넘었다.”
뭐?
‘말도 안 돼. 고작 스물을 넘긴 나이에 세 개의 벽을 넘었다고?’
세 개의 벽을 넘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로궤의 세 칼레파 그리고 검성과 동일한 수준이란 의미다. 신이 내린 천재라 불렸던 검성조차 마흔이 넘어 달성한 경지를. 그 반절도 되지 않은 나이에.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구나.’
그 정도로 천재여야 되어야 반신의 경지에 오르는 건가? 나는 꿈도 못 꾸겠네.
“믿기지 않는군요. 그런 놀라운 재능을 가진 자가 어떻게 첨탑에 갇혀서…….”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물론 대단하기야 하지. 하지만 제까짓 게 벽을 세 개 넘어 봤자 칼레파님의 상대가 되겠느냐?”
가주의 조소는 분노에 차 있던 첨탑의 루를 떠오르게 했다.
“아니면 이것도 날 그 역겨운 신이라는 새끼의 아바타로 만들기 위한 수작인가?”
‘설마 루가 말한 역겨운 신이라는 게, 칼레파?’
단언하기에는 아직 아는 바가 부족하다.
고심하던 나는 가주의 귀에 어렴풋이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가주가 예리하게 반문했다.
“그런 거라니?”
나는 흠칫 놀란 척하며 더듬더듬 답을 내놓았다.
“어젯밤에 노예가 저를 보자마자 신의 아바타를 운운하며 역정을 냈습니다. 그가 말한 신이 ‘그분’이 맞다면, ‘그분의’ 아바타에게 아스트로사 3대 극독을 먹이는 게 올바른 일인가 싶어서…….”
“흠. 만찬을 싫어하는 네가 오늘 밤만은 꾸역꾸역 참석한 이유가 그것이었군. 그래, 네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안다. 제아무리 휘 급의 육신이라 해도 아스트로사 3대 극독을 버텨 내기는 힘들지.”
“…….”
“그래서 네게 맡긴 거다, 디안. 칼레파님에게 바칠 육체를 더 완벽하게 제련할 존재는 너밖에 없다.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칼레파께서 네게 아주 큰 상을 내리실 게야.”
짧은 격려에는 무시 못 할 적잖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간 겪은 사건들을 떠올리면 내 식으로 해석하기에 그다지 어려운 설명도 아니었다.
‘신은 칼레파를 뜻하고, 아바타는 칼레파의 새로운 육체를 가리키는 건가.’
또한 그 과정의 일부를 나, 아니, 디안이 맡게 된 듯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턱을 쓸던 가주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달라졌구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더니. 드디어 쓸 만한 내 아들이 되었어.”
세레니예 백작이 바라는 자식상이 어떤 자식상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칭찬받은 김에 조금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한데 아바타는 어떻게 완성되는 겁니까? 경우에 따라 특정 부위 회복이 더뎌질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그분의 심장을 몸 안에 집어넣는다. 인간 따위가 욕심 낼 수 없는 아주 영광스러운 은혜이지.”
심장 결정석.
‘이거 완전히…… 나타샤랑 똑같은 경우가 되는 거잖아?’
검성의 예상이 옳았어.
반신의 심장 결정석을 삼키면 숙주가 되어 몸을 빼앗길 수 있다!
한시 빨리 나타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 현실의 육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기절한 채 있는 건가?’
아. 정신을 차린 나는 한 박자 늦게 한껏 놀란 척하며 가주의 비위를 맞추었다.
“와, 세상에. 정말 대단한 은혜네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먹고 싶어요.”
……너무 갔나 싶었지만, 다행히 가주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루가 칼레파의 숙주가 되기 전에, 그 첨탑에서 구해야만 한다.
머릿속을 정리한 나는 곧장 약제실로 향했다.
* * *
자정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나는 전날 그러했듯, 동물 털이 북슬북슬한 외투와 모자로 중무장한 채 첨탑으로 향했다.
‘젠장. 다리에 알이 배겼잖아.’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강렬한 근육통인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무거운 가방을 멘 채 오늘도 계단을 올랐다. 첨탑의 계단을 오르는 유일한 장점은, 적어도 계단을 오르는 순간만큼은 추위를 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단점은 그 외 모든 것이다.
“안녕.”
꼭대기 층에 도착한 나는 창살을 밀고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감겨 있던 싸늘한 금안이 천천히 뜨인다. 날 올려다보는 시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냉담했다.
루의 입에는 새 입마개가 씌워져 있었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안에서 빼낸 물건은 내 팔뚝만 한 통 두 개와 물이었는데, 덕분에 이번에도 땀에 흠뻑 젖어 버렸다.
“상처가 좀 많아 보여서 연고를 더 많이 만들어 왔어. 음. 이건 소독약이고, 이건 화상 연고야.”
“…….”
“그러니까 이번에는 허락해 줄래?”
루의 바짝 마른 입술 끝에서, 새하얗고 얇은 입김이 환영처럼 솟아오른다.
“내가 말했지.”
더는 상대하기도 번거롭다는 듯, 다시금 눈을 감은 그가 나무껍질의 표면처럼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읊었다.
“너 같은 쓰레기의 적선은 필요 없으니…… 꺼져.”
오늘의 루는 마치 꺼져 가는 촛불 같았다. 나는 휴대용 등불을 조금 더 높게 들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 상처가 더 늘었어.’
저 상태라면 더욱 포기할 수 없다.
나는 등불을 내려놓은 채 루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한층 사나워진 눈초리가 날 위협하기 위해 등을 펴려 한 순간.
나는 옷을 벗었다.
“으, 추워.”
처음에는 머플러와 장갑, 그리고 모자. 그다음에는 외투, 카디건, 겨울용 원피스……. 특히 마지막 원피스의 단추를 풀 때는 손이 덜덜 떨렸다. 한시 빨리 신뢰를 얻고 싶은 마음에 루의 반응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여성용 긴팔 잠옷을 걸친 상태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루에게 말했다.
“이, 이제 나는 맨몸이야. 믿고 자시고를 떠나서 너, 너를 위협할 수 있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어. 아, 추워! 아니면 이 안쪽까지 화, 확인해 볼래?”
크게 뜨인 금안이 내 얼굴에 집중됐다. 노란 불빛에 그의 상체가 비춰졌다. 크게 부은 피부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 말이야. 저, 적어도 지금은, 이곳에 갇힌 널 어떻게 할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순간 울컥한 감정을 힘들게 끌어내리며 뒷말을 이었다.
“……내가 네 상처를 치료하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