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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71화 (171/195)

171화

나는 다음 장에 두 번째 메모를 남겼다.

일단 몸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이니, 실수로 독을 먹었다면 어떤 독을 먹었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더해서 루와 관련된 일정은 며칠만 더 미루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다음으로는.

‘아, 추워.’

일단 침대에서 쉰다.

이 더럽게 추운 아스트로사의 겨울은 아직 내게 익숙하지 않아서, 침대 밖에서 길게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만으로 고역이었다.

이불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자니 두 명의 하녀 중 한 명이 슬쩍 다가와 내게 물었다.

“아가씨, 오늘은 제약실에 안 가시나요?”

“제약실?”

“저…… 저희가 보온 마도구를 빌려서 제약실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려 뒀어요. 간이 침실에 폭신폭신한 침구도 옮겨 뒀으니 제약실에서도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봤자 침실만큼 편하겠는가? 따지자면 제약실은 디안의 일터일 텐데.

‘게다가 나는 약 같은 건 하나도 모른단 말이야.’

한데, 됐다고 말하기에는 하녀들의 표정이 영 마음에 걸렸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두 하녀는 한참 만에 입술을 뗐다.

“아가씨가 제약실을 오래 비워 두시면, 가주님께서 저번처럼 괜히 한 소리 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그 빌어먹을 가주 놈이 문제야?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좋아, 가자.”

휴우. 하녀들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디안이 인복이 있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고용인들이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 써 주니까.

제약실로 향하기 전, 문 앞에 서서 하녀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제인.”

“네?”

“나, 똑똑한 편이야?”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제인이 돌연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 당연하죠! 형제분들 중에 아가씨만큼 똑똑하고 현명하신 분이 어디 계시다고요? 어릴 적부터 머리가 워낙 비상하셔서, 웬만한 의원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수준 높은 의학 서적을 독파하셨잖아요. 가주님께서도 입에 닳도록 말씀하신 점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아가씨를 차기 가주로…….”

“얘, 제인.”

동료 하녀의 부름에 제인이 흠칫하며 어깨를 굳혔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너무 방자했습니다.”

“괜찮아. 좋게 봐 줘서 고마워.”

얼굴이 새빨개진 제인을 뒤로하고, 나는 제약실로 약했다.

‘역시 반신이 될 인재는 새싹부터 남다르구나.’

나는 마디마디가 두꺼운 디안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이렇게 왜소하고 연약한 몸도 남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나랑 디안은 비슷한 점이 많네.’

이성으로 살아가고, 영혼도 한 번 깨졌고, 이름도 한 번 바꿨고. 그래서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 건가.

디안의 제약실은 별관에 위치했다.

제인의 말대로 가주의 적잖은 신임을 받고 있는지, 1층의 꽤 큰 방 하나 전체가 디안의 소유였다.

‘약 냄새.’

제약실 내부는 깨끗했다. 천재는 더럽다는 내 편견을 깨부수고도 남을 정도였다.

암막 커튼으로 꼼꼼하게 가린 실내에는 붉은색 등이 빼곡했다. 아마, 약제의 보관을 위해 특수 조치가 된 등불인 것 같았다.

늘어선 전시장 안에는 오색의 가루와 액체가 빼곡했으며, 특히 독으로 보이는 재료들은 주의 표시와 함께 밀봉된 상태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본격적이잖아.’

디안의 나이가 워낙 어려서 이 정도의 전문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벽 한쪽에 마련된 책장에는 디안 개인이 정리해 둔 전문 서적과 노트로 가득 차 있었는데, 특히 노트의 경우 약학 요약본에 가까워서 읽기에 훨씬 수월했다.

‘좋아, 나는 이걸로 공부하면 되겠는데?’

불현듯 첨탑에 갇힌 루가 떠올랐다.

몸 곳곳에 새겨져 있던 크고 작은 상흔들. 피딱지가 선명한 붉은색인 걸 봐선 거의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는 모양이었다.

계속 그 꼴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내가 직접 연고를 만들어 볼까?’

디안은 자신의 치료약을 찾고 만드느라 바쁠 테니까.

떠오른 김에 바로 디안의 제조법 노트를 살폈다.

“상처에 바르는 연고, 연고…… 아! 여기 있다. 음. 연고에도 종류가 많구나. 상처를 치료하는 연고, 새살이 나는 연고…….”

……차이를 모르겠다.

“몰라, 일단 다 만들자. 두 개를 다 바르면 빨리 낫겠지. 그래서 첫 번째 약제는, 보자…… 프톨롤라 가루 30g…….”

그게 뭔데?

아무래도 연고 하나 만드는 데 온종일 걸릴 듯싶었다.

* * *

“헉, 헉. 힘들어…… 멀어…….”

준비해 온 온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분명 한참 올라온 것 같은데, 첨탑의 꼭대기 층에 다다르려면 3분은 더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휴대용 등불을 쥔 채 걷는 통에 몸이 더 무거웠다.

“쇠약해 죽기는 무슨…… 계단 오르다 죽겠네.”

3분? 헛된 꿈이었다. 5분은 더 걸려서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나는 몸에서 나는 열을 못 참고, 머플러와 장갑을 벗어 던지며 감옥 쪽으로 다가갔다.

‘어둡네.’

이제 막 자정에 가까운 시각인 데다, 하늘이 유독 흐려서 그런지 감옥에는 달빛 한 점 들지 않았다.

휴대용 등불에 의지한 채 창살 너머를 살폈다. 전날 밤 그러했듯, 루는 벽에 양 팔목이 고정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또 기절할 수는 없으니 가능한 한 조심히 다가가자.’

챙겨 온 열쇠를 이용해 창살을 밀고 들어갔다.

“저기.”

죽은 듯 멈춰 있던 루의 머리가 천천히 정면을 향해 들렸다.

안 그래도 우울한 인상에 저런 눈을 하고 있으니 마치 움직이는 시체처럼 느껴졌다.

나는 의사와 무관하게 살살 떨리기 시작한 두 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무서워하네. 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디안이라서 그런 건가?’

금색으로 번뜩이는 안광이 내 걸음걸음을 뒤따른다. 루의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그의 몸 상태를 자세히 확인했다.

‘근육은 생각보다 멀쩡해. 감금된 지 얼마 안 된 거야. 뼈도 특별히 골절된 곳은 없어 보이고…….’

하지만 곳곳에 푸른 멍과 곪은 상처가 보였다. 게다가 입마개와 닿은 피부가 영 좋지 않게 짓이겨져 있었다.

‘일단 여기부터 약을 바르자.’

나는 등불을 내려놓고 루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 입마개를 빼 주려는 거야.”

나름 그를 안심시키려는 마음으로 달랜 것인데, 루는 미동도 없이 조용했다.

입마개를 분리하자 스트레칭하듯 고개를 크게 돌린 루가 아주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수년 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게 된 사람처럼. 이어서…….

퉤.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란 눈을 하자, 웃음기 하나 없는 축객령이 떨어졌다.

“꺼져.”

나는 그의 그런 대응이 불쾌하기보다는 조금 놀라웠다.

‘신기하네. 나이대는 내가 아는 루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는 훨씬 어려.’

다만 오랫동안 못 씻어서 그런지 침 냄새가 심했다. 그래 봤자 전쟁터에서 한 몸처럼 붙어 잠들었던 시체의 악취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나는 외투로 침이 묻은 얼굴을 슥슥 닦으며 물었다.

“어디가 가장 아파?”

“…….”

“연고를 가져왔는데, 화상에는 사용 못 하고 타박상에만 사용이 가능해. 소독약도 가져왔는데 어디가 가장 크게 곪았는지 말해 줄래?”

말과 함께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는데, 노골적인 조소가 돌아왔다.

“지랄한다.”

나는 연고의 뚜껑을 열다 말고 루를 돌아봤다.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친 욕설을 쏟아 냈다.

“대단한 위선이야. 아니면 이것도 날 그 역겨운 신이라는 새끼의 아바타로 만들기 위한 수작인가? 아, 그래. 그쪽이 맞겠어. 세레니예의 핏줄이 어디 갈 리 없지.”

경멸 깃든 금색 안광이 날 씹어 먹을 기세로 쏘아 봤다.

“썩 꺼져. 쓰레기의 적선은 필요 없으니까.”

나는 그런 루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열었던 연고 뚜껑을 다시 닫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리겠는걸.’

지금 다가가 봤자 치료는 고사하고, 디안의 몸에 상처만 생길지 모른다.

“오늘은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내일 다시 올게.”

나는 더러운 입마개를 챙기고 창살을 벗어나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이런 불결한 물건을 루의 상처에 닿게 할 수는 없지.

‘신의 아바타. 그리고 괴물이라.’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이다.

자세히 알아봐야 할 정보가 하나 생겼다.

* * *

다음 날 오후.

디안이 남긴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애쉬,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 아침에 제인으로부터 의사가 제 병을 독에 의한 내상이라고 진단했다고 들었어요.

저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요. 제약실에 들어갈 때는 특수 제작 마스크와 의복을 착용하기 때문에 실수로라도 독을 삼키는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제가 관리하고 있는 독들은 용량도, 종류도 전부 그대로였어요(당신이 사용 기록을 남긴 재료들은 독과 무관한 재료입니다). 이는 누군가 실수로 혹은 고의로 제 독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아무래도 외부의 독이 저에게 쓰인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식사할 때 조심하세요.』

메모를 전부 확인한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 알아냈는데, 하필 오늘 저녁이 가족 식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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