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내가 충격에 넋을 놓고 있을 동안, 남성이 창살을 열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허리춤을 뒤적인 그는 긴 가죽 채찍을 꺼내 아이 보듬듯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내렸다.
“그런 시건방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비릿하게 웃은 남성이 이내 거침없는 몸짓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촤악!
“잘 보십시오, 아가씨.”
촤악!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들은 이런 식으로…….”
“그만!”
어찌나 큰 목소리로 외쳤는지 목 안이 따끔했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루의 피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남성이 루에게 했던 짓거리를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자, 이건 내 몸이 아니야.’
내가 저지른 일을 디안이 감당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놀라셨습니까? 아가씨께서는 유독 심약하셔서 걱정입니다.”
아쉽다는 듯 짧게 혀를 차는 남성을 쏘아봤다. 그는 어린 동생 대하듯 귀엽다는 얼굴로 싱긋 웃고는, 내게 속삭였다.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아가씨. 짐승 앞에서는 말입니다. 얕보이는 순간 끝입니다.”
남성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 두 어깨를 붙잡아 루 앞으로 밀어냈다.
“자아, 잘 보십시오. 앞으로 아가씨께서 관리해야 하는 물건입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의 차가운 금안이 날 향했다.
선뜩한 적의에 두 손을 그러쥔 순간.
철컹! 감옥을 살벌하게 울리는 소음과 함께, 널브러져 있던 루의 상체가 날 덮쳐 왔다.
그의 새까만 그림자는 내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석벽에 매달린 두 팔이 아니었다면 분명 큰 상처가 났을 것이다. 후욱, 후욱. 거친 숨소리가 지척에서 퍼졌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루는 내가 알던 루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그건 그야말로…….
“짐승에게는 얕보이는 순간 끝입니다.”
그때였다.
두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잠깐만. 설마 지금 기절하려는 거야?’
머리를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결박당한 상대가 위협 좀 한 건데? 여기서 기절을 한다고?
디안, 이 약해 빠진 녀석! 가지가지 한다……라고 생각하며.
나는 정말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루!”
내 부름에, 루의 고개가 아주 살짝 내 쪽으로 돌아섰다.
이번 꿈속에서도, 그는 절벽 위에 앉아 있었다. 답답한 겨울 성에 갇혀 있다가 퀸 섬으로 돌아오니 숨통이 다 트이는 기분이었다.
쉬지 않고 달음박질하며 도착한 절벽에서는 시원한 파도 내음이 풍겼다. 아니, 파도고 자시고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봤어? 첨탑에 갇혀 있던 노예! 대체 어쩌다 거기에 갇혀 있게 된 거야? 아니, 갇힌 건 둘째 치고 그 사람 너 맞…….”
“기억에 없는 과거다.”
……기억에 없다고?
‘그럼 그 노예는 루가 아닌 건가?’
그럴 리 없다. 창살 속의 남자는 분명 루가 맞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애먼 이를 루로 착각할 리 없었다.
“설마 디안이 살던 그 세계, 현실이 아닌 환상인 거야?”
당황한 내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한 루가 조용히 대답했다.
“기억에 없는 과거라고 했지, 가짜라고 한 적은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스물둘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루의 과거에 대해선 어떠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고향은 어디인지, 가족은 어떤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루는 과거 이야기에 유독 입이 무거웠다.
“어쩌다가?”
“몰라.”
무성의한 대답이네.
하지만 재차 물을 자신이 없다. 어쩌면 잃어버린 루의 과거가,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안데르트가 그러했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루 옆에 자리하자, 그는 선명한 수평선을 응시하며 뒷말을 이었다.
“추측건대 환상은 아닐 거야. 디안 케트는 이런 장난을 칠 성격이 못 돼. 게다가 ‘노예’라 불린 나는 스물쯤으로 보이니, 시기상 기억하지 못해도 이상할 건 없어.”
“그럼…… 내가 몸을 차지한, 아니,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디안도 실제 과거의 디안이란 소리야?”
“아마.”
“그 노예도 진짜 루고?”
“어쩌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디찬 감옥에 갇혀, 노예 취급받고 학대당하는 존재가 나의 마법사라니.
“그럼 루는 어떡하지? 내가 구해도 되나?”
그곳은 실제 과거이고, 디안과 루도 실제 존재인데……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일까?
“지금 내게 조언을 구하는 건가?”
“응.”
“나는 네 질문이 이해되지 않아. 왜 그에게 신경 쓰는 거지?”
“왜냐니? 그 노예는 너잖아.”
“네 목표는 디안 케트의 영혼을 고쳐서 본래 너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일 텐데? 그럼 그 일에만 집중하면 될 일이야. 노예고 뭐고 쓸데없이 상관할 필요 없어.”
상관하지 말라니. 무심하기만 한 루의 조언이 내 귀에는 조금 어처구니없게 들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 노예는 너인데?”
“네가 신경 쓰는 나라는 존재의 경계에 저 녀석까지 포함하지 말라는 뜻이야.”
“이해되지 않아. 그렇게 따지면 노예는 진짜 루고, 너는 루의 힘에 불과한걸.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진짜 루 쪽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루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서 전에 없던 미세한 언짢음이 느껴졌다. 혹시 기분이 상한 걸까? 다분히 이성적인 그를 상대로, 가장 이성적인 질문이 필요할 거라 여겼을 뿐인데.
“음. 네 말은 대충 알아들었어. ……아, 혹시나 싶어 말해 두는데. 오늘 만남도 세 번의 기회에 포함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착각이 아니라면 이전보다 조금 더 차갑게 느껴지는 답이 돌아왔다.
“억지 부리지 마.”
“억지라니? 사막에서 네게 한 말 기억하지? 그 논리랑 똑같아. 내가 만약 여기서 디안을 구하지 못하면? 너와 함께할 세 번의 기회는 허무하게 소진하고, 눈만 펄펄 내리는 이 북쪽 땅에서 디안의 몸에 갇혀 객사하면? 너 만족스럽게 신이 되어 떠날 수 있겠어?”
“그 정도면 제안이 아닌 협박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협박 아니라, 나는…….”
“안 돼. 네 억지를 계속 받아 줄 생각은 없어.”
절벽 끝에서 천천히 일어선 그가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는 시선으로 날 내려다봤다.
“이제 남은 만남은 두 번이야. 잊지 마.”
욱한 심정에 루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려던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 * *
차가운 공기가 훅, 폐부로 쏟아졌다.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낀 나는 베개를 천장으로 내던지며 울분을 토했다.
“쩨쩨한 놈!”
“아, 아가씨? 왜 그러세요? 이상한 꿈이라도 꾸셨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하녀가 타 준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분을 삼켰다.
좋아, 이번에도 오후 5시에 일어난 건가? 시각을 확인하기 무섭게 책상으로 가 앉았다. 이번에야말로 디안의 메모를 읽을 차례였다.
‘그런데 어제 기절하고 말았잖아. 답장이 없어 날 가짜라고 여기면 어쩐담.’
우려와 달리, 수첩에는 전에 없던 한 개의 메모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나는 디안이 남긴 두 개의 메모를 차례로 훑었다.
첫 번째는 어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메모.
『긴 고민 끝에 답장을 남깁니다, 애쉬.
당신의 편지를 확인하고 많이 놀랐습니다. 근래 나도 내 몸 상태에 의문을 갖고 있었거든요.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쓰러진 후 이중인격이 되어 버린 건가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설마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을 줄은…….』
이어진 두 번째 메모는 오늘 아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이는 메모였다.
『괜찮으신가요? 첨탑에서 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메모를 확인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디안은 다정한 사람이구나. 고작 두 개의 메모를 확인했음에도, 그가 어떤 성정을 지닌 소년인지 확실하게 느껴졌다.
디안이 내 존재를 확실하게 신뢰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안이 됐다. 나는 두 번째 메모 마지막에 적힌 첨언을 살폈다.
『조심하세요, 애쉬. 그 노예는 보통 노예가 아닙니다. 로궤와 세레니예가 협력해 성심성의껏 키우고 있는 괴물이에요. 독의 내성을 키우기 위해 제게 보내진 걸 보면…… 아무래도 인간 병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외의 정보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만,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지 마세요.』
인간 병기. 나는 첨탑에서 남성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가주님의 명령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아스트로사 3대 독약에 내성이 생기도록 훈련시킬 것.”
‘그래, 분명 비슷한 말을 했었어.’
독에 내성을 기르게 하라니. 그 말은 계속 독을 먹이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내 손으로 직접 루를 고문시키라고? 턱도 없는 요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