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내가 디안 케트라니.’
이 되도 않는 사태에 대한 충격은 꽤 오래갔다.
뒤늦게 들어온 하녀는 말없이 멍하기만 한 내 모습을 보고는 연신 ‘불쌍한 우리 디안 아가씨.’라 말하며 내 손과 발을 주무르기 바빴다.
막연히 좌절하던 중 이성을 되찾은 것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의원이 찾아와 내 몸 상태를 살핀 후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 유감입니다만, 아가씨께서 깨어나셨다고 하여 건강이 호전된 것은 아닙니다. 기력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이대로라면…….”
말끝은 왜 흐려? 지금 시한부 선고하려는 거야?
덕분에 정신을 차린 나는 불편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의원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콜록, 콜록…… 저기, 나는 왜 쓰러진 건가요?”
“추측건대 제약 과정에서 독성이 강한 약을 잘못 흡입하신 듯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여 제조하시길 바랍니다. 약은 오늘 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노의원이 나가기 무섭게, 두 명의 하녀가 부랴부랴 다가와 나를 위로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금방 호전되실 거예요.”
“맞아요. 나쁜 생각은 최대한 하지 마시고, 내년 봄만 생각하세요. 그때가 되면 아가씨도 멋진 신사복을 입으실 수 있으니까요! 많이 시장하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바로 수프를 내올게요.”
내년에 신사복을 입을 수 있다는 건…… 올해 디안의 나이가 17세라는 뜻이겠지.
‘말도 안 돼. 이런 작고 허약한 몸으로 17세라니? 14세라고 해도 믿겠네.’
나는 하녀들의 얼굴에 대고 ‘나는 디안이 아니야, 데이지야!’라고 지껄이는 한심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당면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다.
‘디안 케트의 10대 시절이니까. 여기는 대략 150년 전쯤 아스트로사겠지.’
150년 전의 아스트로사.
좋지 않은 숫자다. 이쯤 로궤는 큰 내란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그 염병할 메피스토가 생체 실험의 영감을 받은 시기도 정확히 이때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로궤는 아스트로사 왕국을 거대한 소생 실험의 무대로 삼고 있었거든.”
……잠깐.
‘그럼 이 시기의 루도 있다는 말이잖아?’
신이 되지 않은 인간 루를 만날 수도 있다!
그리 여기자 답답했던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호흡이 편안해지고 전신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루에 대한 사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디안.”
예고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인물 때문이었다.
“다행히 멀쩡히 일어났군.”
기다란 턱수염에 심상찮은 덩치, 그리고 원형 탈모가 분명해 보이는 저 인물은…….
“아버지.”
“죽을 것 같으냐?”
사경을 헤매다 돌아온 자식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지독하게 무심한 질문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느껴지던 매정한 분위기를 떠올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의원이 길어 봤자 3년이라더군. 너는 내 자식이다. 설마 그렇게 약해 빠지지는 않았겠지, 디안?”
그러니까 그게 네놈 아들에게 할 소리냐고, 이 수염 대머리야.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었으므로 함부로 움직이기 어색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런 내 얼굴을 스윽 살핀 세레니예 가주가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괜찮아 보이니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다. 사흘 후 네게 그 노예를 보내도록 하지.”
문이 닫혔다.
아들의 수명은 기껏해야 3년이라는데. 걱정해 주지는 못할망정 일을 떠넘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니.
‘확실히, 문제가 있는 집구석이야.’
책상 위에 앉아 디안의 물건들을 살피자, 하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버, 벌써 일하시려고요? 쉬시지 않고…….”
나는 벽 속에서 보았던 디안 케트의 다정하면서 소심한 성정을 떠올리며, 하녀에게 답했다.
“괜찮아. 혼자 있고 싶은데 잠깐 나가 줄래?”
“그럴게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아가씨. 거듭 말씀드리지만 건강이 더 중요해요.”
나는 혼자 남은 침실에서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이 사태의 근원은 명확해 보였다.
‘디안 케트의 심장 결정석 때문이겠지.’
이곳으로 끌려 들어오기 전. 전세 역전이 된 디안 케트의 심장과 내 영혼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현 상황에서는 디안이 나를 살린 게 아니라 내가 디안을 살린 처지가 되었다.
디안의 영혼이 깨진 원인은 독약.
‘그럼 만약 해독약을 찾아서 해독하면? 영혼도 원래대로 돌아오겠네?’
디안이 멀쩡해지면? 나 역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확률이 생긴다.
“좋아. 그럼 일단 나도 약학을 공부하자!”
……아, 어쩐지 몸이 더 안 좋아지는 듯한 기분이.
“삑.”
그때, 책상 옆 새장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새끼 매의 울음이었다.
“……안녕. 네가 애쉬지?”
“삑!”
“흠. 좀 매정한 느낌인데. 내가 네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거야? 역시 동물은 감이 다르구나. 우리는 이름도 같은 처지니까 당분간 잘 부탁해.”
대답이 없다. 매정하긴.
다행히 디안의 책장에는 약학 서적이 빼곡했다. 그와 공생하게 된 첫날. 나는 약학 공부를 위해 책을 펼쳤고.
그대로 잠들었다.
* * *
다시 깨어났을 때, 겨울 해는 이미 중천에서 서서히 내려가는 시간대였다.
‘지금 나 16시간을 넘게 잠든 거야?’
길게도 잤네. 디안의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 건가?
벽난로에 불을 때도 더럽게 추운 건 여전했다. 일어나기 싫은 마음에 이불 안에서 꼼지락대고 있는데, 하녀가 식사를 준비해 왔다.
“오늘 저녁은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따뜻한 소고기 스튜로 준비해 봤어요. 건강 회복을 위해 당분간 혼자 식사하셔도 된다는 허락도 잘 받아 왔습니다. 잘했죠?”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잊으셨어요? 낮에 산책을 나가시기 전에 짧게 언급하셨잖아요.”
산책이라고? 내가 낮에 산책도 나갔어?
‘뭐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침실 내 보이는 흔적과, 주변 인물과의 대화에 따르면 분명 오전부터 활동했던 것 같은데…… 정작 내 기억은 잠든 순간이 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의문은 하녀의 증언으로 대강의 정리가 가능해졌다.
“오늘이요? 짧은 아침 식사 후에 다시 잠드셨고, 점심 식사 후에는 늘 그렇듯 산책을 나가셨어요. 그리고 약 제조를 준비하시다가 오후 4시쯤 쓰러지듯 잠드셨잖아요? 요즘 자꾸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건강이 나빠지면서 깜빡하시게 된 걸까요…….”
간단하게 정리해서. 오전 오후에는 디안이, 늦은 오후와 밤에는 내가 몸을 차지하게 되는 듯했다.
<디안 :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활동
이후 약 1시간의 수면
나 : 오후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활동>
감탄이 나올 만큼 합리적인 분배였다.
‘그럼 치료약 제조는 어쩌지? 기껏 열심히 연구했는데 디안이 치료제를 만들기도 전에 약제를 홀라당 써 버리거나 버려 버리면?’
대처가 필요하다. 당분간은 디안 모르게 약제를 꽁꽁 숨겨 놓기는 무슨.
“디안에게 내 존재를 알리자.”
“빼애애액!”
“너도 그게 가장 좋은 수라고 생각하지, 애쉬?”
“빽!”
이 몸의 주인은 디안이다.
게다가 디안은 나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해박한 제약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더 빨리, 그리고 더 확실하게 해독약을 제조할 수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활동하기에도 더 편해질 테고!
『안녕, 디안 세레니예.
서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네가 잠든 시간에 네 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야. 너무 놀라지는 마. 내가 더 놀랐으니까.
내가 너에게 이 메모를 남기는 이유는, 지금 일어난 불상사를 함께 타파하기 위해서…….』
다음 날 오후 5시.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예쁘게 놓인 수첩을 펼쳐, 내가 쓴 메모를 넘기자 반듯반듯한 글씨체의 메모가 새롭게 나타났다.
디안이 답장을 남긴 것이다!
‘뭐지? 이 괜히 설레는 기분은.’
내가 그 디안 케트와 펜팔을 나누게 될 줄이야. 흥분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메모를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침실을 노크했다.
똑똑.
‘나 참. 누구야?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문을 열자, 처음 보는 남성이 서 있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디안 아가씨.”
그 말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오늘은 가주가 내게 맡겼다는 그 노예와 처음 만나는 날이지.’
메모는 나중에 확인할 수밖에 없나.
하녀가 미리 챙겨 둔 외투와 머플러, 모자, 장갑을 착용한 후 남자를 뒤따랐다. 디안은 몸이 약해서 잠깐의 외출도 꼼꼼하게 신경 써서 준비해야 했다.
휘이이이잉.
날씨는 혹독했다.
‘으, 추워.’
나는 눈바람을 헤쳐 나가며, 머플러를 콧등까지 끌어올리고 남자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탑으로 갑니다.”
그 말하는 탑은 첨탑 감옥이었다.
심지어 목적지는 첨탑의 맨 꼭대기 층인 듯했다. 안 그래도 높은 탑을 허약해 빠진 몸으로 오르려니 정신이 오락가락한 기분이었다.
“헉, 헉.”
“도착했습니다.”
덜컥, 덜컥. 남자가 삼중으로 잠긴 자물쇠를 풀었다. 너른 독방이 자리한 꼭대기 층은 바닥이 기이한 마법 문양으로 가득했다. 노예의 탈출을 방지하는 마법 방책인 듯했다.
“이 물건이 바로 가주님께서 아가씨에게 맡기신 ‘그 노예’입니다.”
가주가 신신당부하며 맡긴 존재.
그 요주의 인물은, 차디찬 석벽에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매달려 있었다.
후욱, 후욱.
창살 너머로 그의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짐승에게나 사용할 법한 투박한 입마개가 그의 콧등과 턱을 덮고 있었다.
먼지로 더럽혀진 금발. 크고 작은 상처와 진물로 넝마가 된 신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풍겨 오는, 더없이 인상적인 생명력. 끔찍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는 사람의 이목을 끄는 형형한 존재감이 있었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루다니.’
머리칼 틈새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내 가슴을 헤집고 심장을 파헤칠 것처럼 살벌했다.
그리고 나는, 그 날카로운 금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성은 내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날 조금 더 뒤쪽으로 물리며 말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시길. 아직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아 거칠고 포악하니까요. 가주께서도 아가씨가 이 노예를 완전히 길들일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으시니, 명령을 완수하는 데만 집중하십시오.”
저 눈.
저 얼굴.
“가주님의 명령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아스트로사 3대 독약에 내성이 생기도록 훈련시킬 것. 성공하시면 분명 큰 상을…….”
남자의 시시콜콜한 잡담 따위는 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신경은 오로지 창살 너머의 노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당연했다.
머리색과 분위기는 내가 아는 ‘그’와 정반대였지만,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말도 안 돼. 저 노예는…….’
루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