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전에 없던 자신감이 솟았지만, 흥분하지 않고 바닥을 살폈다.
내 걸음이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것처럼.
‘무언가 이상해. 분명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데, 검성만 계속 물러서고 있어.’
……설마, 이건.
‘시간을 끌고 있는 건가?’
5분 후 괘종시계가 울려야만 경비가 몰려오고, 우리를 생포해 붙잡아 둘 수 있으니까!
‘수를 써야 해.’
괘종시계의 시침을 확인한 나는 처음으로 검에 살기를 실었다. 그리고 조금은 다급하고 거칠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로지 검성에게 중상을 입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윽.’
검성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채 더 큰 감정을 실어 검성을 공격했다.
감정적인 공격은 말미가 좋지 못한 법.
카앙!
진주 검이 날아갔다.
“방금은 조금 급했다. ……오랜만에 진심을 다해 몰입했는데. 아쉽군, 안데르트 경.”
검성은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효율을 추구한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작은 손해쯤 대수롭지 않게 감수하는 남자였다.
그런 검성의 목적은 생포였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는 상대를 효율적으로 생포하는 방법은…….
역시 피를 보는 것밖에 없겠지.
“경은 좀 얌전해질 필요가 있어.”
검성이 날 향해 검을 들었다.
계산대로였다.
‘지금이야, 진!’
내 목소리가 들린 것일까? 저 멀리서, 진이 명치를 끌어안은 채 내 앞으로 달려왔다.
한걸음에 날아온 그녀는 보호하듯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찰나의 틈새에서 검성의 움직임이 둔화됐다.
바로 이 순간이다.
나는, 그리고 진은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위기가 왔을 때, 네가 내 앞을 막아서.”
“제가…… 말입니까?”
“그래. 위험할 거야. 어깨를 베기 위해 휘두른 칼이 잘못하면 네 심장을 찌를 수도 있으니까. 할 수 있겠어? 아니, 믿을 수 있겠어?”
내 판단을.
그리고 검성이라는 인물을.
‘진 혼자서는 절대로 검성을 베지 못해. 하지만…….’
검성 또한 진을 베지 못한다.
이용하는 것과 위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세상의 그 어떤 스승이 매정하게 제자를 벨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심지어, 벽을 넘을 수 있는 시련까지 선사했던 제자를.
“죄송합니다, 공작님.”
진은 검성이 흐트러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검의 궤도가 바뀌는 타이밍을 노려, 소매 안에 숨겨 둔 푸르스름한 단검을 꺼내 검성의 눈을 공격했다.
검성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왼손을 들어 눈을 보호하려 들었고, 단검은 검성의 눈이 아닌 손바닥을 꿰뚫었다.
눈이든 손바닥이든 상관없다.
뚫리기만 한다면.
“……수고했어, 진.”
단검에 담긴 칼레파의 마가 주입되자, 검성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나는 쓰러지는 진을 부축하며 단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이 단검은 우르드와 스쿨드에게서 선물 받은 마도구로, 루가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데 사용한 검 형상의 마도구를 본떠서 제작된 물건이었다.
“그래서, 마도구가 필요하다고 했나? 무엇 때문에 필요한 거지?”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의 기억을 들춰 보고 싶습니다.”
“마도구 제작에는 거금과 시간이 든다. 때에 따라서는 고문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어.”
“공교롭게도…… 스스로 입을 열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러니 억지로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마도구를 통해서 검성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빠르게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는, 그가 머릿속에 꽁꽁 숨겨 두고 있던 정보들이.
* * *
검성의 기억.
기억은 마치, 신문의 흑백 사진을 이어 놓은 것 같았다. 강렬한 순간의 잔상이 드문드문 나타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나타난 장면은 연합군 선포 0년 여름.
지하르크 막사 내부에서 두 남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장 결정석? 생소한 물건이군.”
지하르크의 반문에 그의 보좌가 서류를 훑으며 대답했다.
“죽은 사람의 심장을 결정화한 돌이라고 합니다. 보고에 따르면 로궤 마법학의 핵심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고순도 에너지원으로 이용되는 모양입니다.”
“고순도 에너지원이라. 메피스토가 부리는 그 괴상망측한 괴물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더 자세히 조사해 보도록.”
“예.”
장면이 흐릿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펜 로타 제국이 본격적인 전쟁 통을 겪기 시작한 무자비한 겨울이 시작됐다.
연합군 선포 1년 겨울.
지하르크의 막사에 도착한 보좌관이 보고를 올렸다.
“공작 각하. 접선한 4인의 로궤 소속 마법사 중 절반이 요구에 응했습니다. 해당 인원은 보름 후 레그먼트 협곡에 도착한 즉시 전사 처리되고, 로궤에는 해당 협곡의 물살이 빨라 시신 이양이 불가능했다고 전달할 예정입니다. 두 명은 곧장 동부 호수 이리겔로 보내 ‘심장 결정석 연구’에 투입시키겠습니다.”
지난 반년간, 지하르크는 독자적인 정보 수집을 통해 심장 결정석에 대한 다수의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그는 심장 결정석에 대한 연구가 몹시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마침 로궤와 북대륙에서 보낸 지원군 중 일부가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조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들 일부를 포섭했다.
심장 결정석 연구가 궁극적으로 메피스토 군대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가능한 협력이었다.
“이리겔에 보냈던 그 돌도 심장 결정석이 맞았나?”
지하르크는 자신이 주웠던 기묘한 물건에 대해 물었다.
“예. 듣기로, 상당량의 에너지를 보유한 특이 심장 결정석이라고 하더군요. 발견 장소가 정말 퀸 섬이 맞는지 여쭙길 요청했습니다.”
“퀸 섬이 맞다. 1년 전, 퀸 섬 사태가 일어난 직후 발견한 물건이지. 어떤 짓을 해도 흠집조차 가지 않아 기이하게 여겼었는데…… 역시 심장 결정석이었군.”
검성이 주운 심장 결정석은 ‘퀸’으로 불리며, 연구 진전에 큰 역할을 했다.
연합군 선포 8년 겨울.
지하르크의 막사에 폭삭 늙어 버린 보좌관과 후드로 얼굴을 가린 노마법사가 찾아왔다.
둘을 맞이하는 검성의 낯은 극심한 피로로 검게 죽어 있었다. 그는 노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연구를 이대로 중단하라?”
“공작 각하. ‘퀸’은 분명 가공할 에너지를 지녔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
“냉정하게 말씀드려서, 지난 7년 동안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 준 연구라고는 트랩 연구와 치료 마법 연구, 그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개선 연구가 다입니다. 마귀에 대응할 키메라 생산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각하.”
“예정대로라면 연합군은 2년 내로 퀸 섬에 진입한다. 그 전까지 계속 연구를 지원해.”
“……알겠습니다.
이후 몇 번의 언쟁이 더 오간 후, 보좌관은 노마법사를 이끌고 막사를 나섰다.
연합군 선포 9년, 가을.
다시금 막사를 찾아온 노마법사가 무릎을 꿇으며 성토했다.
“공작 각하, 더는 힘듭니다.”
그런 그를 노려보는 지하르크의 얼굴은 다듬지 못한 수염으로 거뭇거뭇했다.
“더는 힘들다라. 납득이 안 되는군. 힘들다고? 정확히 무엇이 힘들다는 거지? 지원? 그간 연합군과 황실의 눈을 피해 최고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안? 지난 8년 동안 이리겔 근처에 작은 쥐새끼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어. 그런데도 무엇이 연구를 방해하고 있다는 건가!”
이토록 화난 모습의 지하르크는 처음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노마법사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연구의 핵심은 퀸이었습니다. 압도적인 에너지와 마 기운을 지닌 심장. 사람의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하기 힘든 고귀한 심장을 이용해서 타 연구와는 비견되지 않을 만큼 극도로 효율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지난 8년간의 연구 끝에 확신했습니다. 이 심장은 우리의 키메라 연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노마법사는 자조하는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믿기십니까? 엄지손톱보다 작은 이 돌멩이가 자아를 지녔다는 소립니다. 키메라 연구는 실패한 게 아닙니다. 단지 이 심장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일례로 정신 치료와 관련된 연구는 모두 성공적으로…….”
“우습군. 지금 내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노마법사는 그대로 막사에서 쫓겨났다.
그를 대신해 세 명의 마법사가 다시금 불려 왔지만, 그들 역시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동일한 주장을 펼쳤다. 심장의 자아가 키메라 연구를 거부한다는 주장이었다.
연합군은 퀸 섬 진입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고,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결국 지하르크는 연구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연구원들의 헛된 짓거리를 방지하기 위해 퀸을 수거했다.
지하르크의 품으로 돌아온 퀸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게 뭡니까?”
“버클리그레이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약.”
지하르크가 자신의 전우이자, 동료이며, 제자이기도 한 안데르트에게 퀸을 넘긴 이유는 간단했다.
그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으니까.
전쟁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승리에는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하르크만은 희생될 수 없었다. 라파엘로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수백만의 연합군이 오직 그들을 믿고, 의지하며 이 섬을 밟았으므로.
안데르트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가능성이라도 그가 품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토록 대단한 에너지원이라 해도, 결국 메피스토를 저지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 없었다. 죽기 위해 나아가는 안데르트를 도울 수 없다면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안데르트는 그들의 마지막 가능성이었고.
그들의 가능성은 결국 승리를 쟁취해 냈다.
연합군 선포 10년, 겨울.
메피스토 성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너지면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던 마귀 부대가 모래처럼 스러져 사라졌다.
죽어서도 절대 잊지 못할 신기루 같은 광경이었다.
“이, 이겼다아아아!”
“대마법사 메피스토가 죽었다! 연합군의 승리다!”
모두가 승리를 기뻐할 동안, 누군가는 친우의 희생에 참담함을 숨기지 못했다.
“안데르트…….”
이후 무너진 성터를 샅샅이 뒤졌지만, 메피스토와 안데르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연합군이 승리했다.
그리고, 영웅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