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부탁한다니?”
의문 섞인 반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뭐?”
로즈벨 백작의 얼굴이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넉넉잡아 한 달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웨더우즈 가문에 소속된 고용인들의 신상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세한 출신이나, 가족 사항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고 웨더우즈가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건…….”
말끝을 흐린 로즈벨 백작이 참담한 낯으로 마른세수했다.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소리이지 않은가? 안데르트 경.”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말게. 경의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수 있어. 나는 다만……. 기다려 주게, 머릿속을 좀 정리하고 싶군.”
침묵이 이어질 동안, 그의 검에서 시시때때로 조용한 공명이 울렸다.
—힘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자랑스러운 동료들 그리고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다분히 로즈벨 백작다운,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명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수심에 잠긴 얼굴로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그는 돌연 손뼉을 쳤다.
“……디안 케트의 유산. 그래, 그 물건이 있었어!”
로즈벨 백작은 자세를 바로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보게, 웨더우즈 자작. 디안 케트의 전설을 아는가? 위대한 치료술사가 남긴 다섯 점의 유산을 모두 모으면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는 전설이네. 이 유산 중 하나가 라파엘로 공작에게 있다는데…….”
“저도 압니다. 거의 다 모았어요.”
“오, 그런가? 그 말은 유산의 전설이 사실이란 뜻이겠지?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그렇다면 경의 건강 문제도 곧 좋아지지 않겠나!”
내내 진지했던 그의 낯에 처음으로 안도감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날 걱정해 주는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구태여 그 유산이 다른 데 쓰일 수도 있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옛 추억에 잠긴 대화로 눈 깜짝할 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 때는 해가 산등성으로 넘어가,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어디 보자, 그럼…… 나 다음은 지하르크 공작 각하겠군.”
“네.”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룻밤 묵고 가는 게 어떤가? 오늘 밤 열차를 타 봤자 모레 아침에 도착할 텐데. 푹 쉬고 가세. 흠흠, 내 못난 조카들에게 사인도 좀 해 주고.”
로즈벨 저택 방문 일정은 이미 기사를 통해 세간에 알린 뒤다. 그러나 버클리그레이튼과 관련된 일정은 지나가듯 언급한 것에 그쳤다.
왜냐하면.
“누가 해 뜰 때 공작님을 찾아간답니까?”
급습해야 하거든.
전날 새벽에.
* *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
손톱처럼 얇고 샛노란 초승달이 삐쩍 마른 나무 위에 걸렸다.
잔가지 위로 올라가 성벽 너머를 살피며 적당한 때를 기다리길 수십 분. 어느 순간,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와 함께 더럽게 시끄러운 두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닥치고 자신 없으면 빠져. 걸리적거리니까.”
“걸리적거리다 못해 아예 형제의 인생에서 걸림돌이 된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요.”
“중요한 순간에 멈칫하면 네 그 잘난 주둥이를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전 당신의 주둥이를 가만두고 싶으니 제발 좀 닥쳐 주시겠습니까?”
저 두 녀석은 지치지도 않아.
땅으로 내려온 나는 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괜찮겠어, 진?”
돌아보는 낯에는 옅은 긴장과 흥분이 서려 있었다.
“자작님.”
“네가 검성을 찔러야 해.”
진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어깨를 밀치고 나온 안데르트가 불신 어린 눈초리로 말했다.
“이 자식은 못 미더워. 그냥 나한테 맡겨, 내가 할 테니까.”
“하아. 뭘 네가 하겠다는 건데? 이건 믿음직스럽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야.”
“스승을 벨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니까 이 녀석이 못 미덥다는 거잖아?”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안데르트. 스승을 벨 수 있느냐의 문제라니. 너희들이 검성을 벨 수 있을 것 같아?”
멈칫하는 안데르트와 달리, 진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의 미흡한 실력으로는 공작님의 머리카락도 건드릴 수 없겠지요.”
“그러면 어쩌겠다고?”
반문을 받은 진이 안데르트를 바라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어쩔 심산인지는…… 저와 자작님만의 비밀입니다. 눈치 못 챘으면 그냥 입 닥치고 망이나 보세요, 미친개 가로쉬.”
미간을 확 구긴 안데르트가 으름장을 놓았다.
“경고하는데, 앞으로는 그딴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싫은데요? 어딜 감히 안데르트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불리려고 합니까? 미친개 가로쉬 주제에.”
“X발 고귀하고 말고가 뭔 상관이야, 내 이름이라는데!”
투덜대는 안데르트를 홀로 두고, 진과 나는 버클리그레이튼 성내로 잠입했다.
안데르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성 밖에서 동태를 살피는 역할이다. 실제 검성과 대면하는 건 우리였기에, 내부 사정에 훤한 진을 앞세워 굴뚝을 통해 안쪽으로 진입했다.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그러한 공작이 기거하는 너른 성.
성내에서 우리가 검성의 침실까지 닿는 데 처리해야 할 경비는…… 놀랍게도, 2시간 단위로 성내를 점검하는 버클리그레이튼 기사단원이 끝이었다.
다분히 효율적인 배치였다. 그도 그럴 게,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검성을 암살하려 하겠는가?
탁.
“컥.’
갑작스럽게 급소를 얻어맞은 기사가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끝?”
“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텅텅 빈 거 아니냐고.
쓰러진 기사를 곱게 접어 커튼 뒤로 숨긴 후 계단을 올라갔다. 검성의 침실은 2층 동쪽 통로 정가운데의 방이다.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연 순간.
“전우 혹은 제자…… 나의 옛 추억이 오셨군.”
가벼운 백색 슬립 가운 차림의 검성이 우리를 반겼다.
거칠게 숨을 들이켠 진이 검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금방 알아챌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대화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맞나, 안데르트 경?”
“……아무래도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라서요.”
입이 빌어먹게 무거워서 직접 벌리러 왔다, 이거야.
“그런가? 퍽 재미있는 조합이야. 내 제자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기에 제격이겠어.”
웃음을 흘린 검성이 침실 내부에 자리한 괘종시계 앞으로 다가가, 유리문을 열고 한가운데 추를 아래로 당겼다.
째깍째각. 초침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검성이 당긴 추가 아주 느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5분 후면 비상 경비 알람이 울릴 거다. 그때까지 버틴다면…….”
흐려지는 말끝과 함께, 검성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으로 그의 흔적을 좇을 겨를은 없었다.
파지지직, 카앙!
진주 검을 뽑기 무섭게, 검성의 날카로운 검날이 내 검을 내리눌렀다.
“둘 모두 돌려보내 주지.”
그런 그의 뒤를 진이 노렸으나, 검성은 예상한 일이라는 듯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팔꿈치로 진의 가슴 아래를 가격했다.
“쿨럭!”
거친 숨을 몰아쉰 진이 재빨리 물러섰다.
우리 사이에 선 검성은 초연한 모습이었다.
검성은 나를 다시없을 인재라며 치켜세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나이와 경험을 전제로 한 칭찬일 뿐이다.
압도적인 경험과 세 개의 벽을 넘은 검성의 무위는 아직 나 홀로 감당하기 버거운 감이 있다.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야 크게 밀리지 않는 정도였으니까.
“생각이 많아 보인다, 안데르트 경. 그럼 이쪽이 먼저 가지.”
경고가 무색하게, 검성은 정면에 선 내가 아닌 등 뒤의 진을 공격했다.
“내 말 잘 기억해, 진.”
상대의 유려한 일격에도 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언뜻 팽팽해 보이는 공격이 이어졌지만, 균형은 금방 무너졌다. 수세에 몰린 진이 검기를 끌어올렸다.
“검성은 가장 먼저 네 검부터 부술 거야. 네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깨닫고 전의를 상실하도록. 그게 검성의 방식이거든.”
“검의 울림이 차분해졌구나, 진. 검귀이기를 포기 못 한 것치고는 괜찮은 발전이다.”
검성의 맨 검과 맞닿은 진의 검기는 태풍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성치 못한 몸으로 덤벼든 점은 아쉽군.”
그리고 이내 곧 터졌다.
쨍강!
검날이 두 동강 나면서, 진의 검기가 먼지처럼 사그라졌다. 진의 넋이 일순 멍해지는 순간을 검성은 놓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검기를 모아 진을 벽으로 밀쳐 냈다.
“커헉!”
내상으로 인한 붉은 피가 카펫 위로 흩뿌려졌다.
그러나 검성은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그의 다음 놀이 상대는 나였다.
“검성은 내 검을 부수지 못해. 그 정도로 크게 실력 차가 나지 않으니까. 대신 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적잖이 깊은 상처를 내려 하겠지.”
“대단하군. 지난 4년 동안 전시 못지않게 실력이 올랐어.”
나 역시 대답할 여유는 없다. 입 한 번 열지 않고 온 정신을 집중해 그의 검을 막는 데 급급했다.
검성은 수를 양보할 일말의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한데 검성의 검이 원래 이런 무게였나?’
예전에는 한 수, 한 수 맞받아칠 때마다 어깨가 아렸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철옹성처럼 느껴지던 검술에 틈이 보였고 그 틈을 공격할 때마다 상대는 여지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부터인가 검성의 말이 줄었다.
몇 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느낌상 20분, 아니, 적어도 30분은 흐른 듯했다. 하지만 괘종시계는 여태 울리지 않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