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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63화 (163/195)

163화

라파엘로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자리 잡았다.

“네가 미친 소릴 지껄이는 건 오늘내일 있던 일이 아니라 그리 놀랍지 않다. 돌이켜 보면 나름의 정당한 목표와 근거가 있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이번에도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 빠져나갈 생각 말고 제대로 설명해라.”

음.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군.

안데르트의 증언에 따르면, 나타샤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다가 지하실 안쪽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이후 안데르트의 외침을 들은 라파엘로가 나타나 나타샤를 뒤쫓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상태를 봐주던 루가 ‘곧 정신을 잃을 테니, 나와 데이지를 안전한 장소로 옮겨라’라는 경고와 함께 정신을 잃은 터라, 더 이상의 탐색 없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라파엘로는 안데르트로 변한 내 모습을 감추기 위해 로즈벨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후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즉시 이곳, 올랑 루즈로 돌아왔는데…….

주목적은 아슈네이케 황제의 폐위 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만찬 이후 황제로부터 어떤 황명도 받지 못했지.’

따지자면 황실 입장에서는 내게 어떠한 요구도 하기 어려운 처지이긴 했다.

당시의 만남을 되새길수록, 황제가 내게 무언가를 바랐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악귀로부터 보호하는 보주를 선물했던 것도 그렇고. 마치 지하 실험실에 들어갈 상황을 염려했던 것처럼.

‘내가 나타샤를 찾고 있단 걸 눈치챘던 걸까?’

하지만 또 보란 듯이 감금하지 않았는가.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나타샤 말이야. 날 찌른 직후 도망갔다던데, 너는 그 애를 못 봤겠지?”

라파엘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샤는 메피스토의 심장을 먹었어.”

내 증언에 드셰로와 라파엘로의 안색이 대번 심각해졌다.

“그게 확실합니까?”

“확실해. 게다가 제정신이 아니야.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면 메피스토의 자아와 완전히 일체화되겠지.”

라파엘로, 로즈벨, 검성.

이토록 화려한 라인업의 전쟁 영웅들만 찾아가는 건 나타샤에게 보란 듯이 티를 내기 위해서였다.

네가 찾던 안데르트가 여기 있다고. 내게 볼일이 있으면, 나를 직접 찾아오라고.

“나타샤는 내게 이상하리만치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어. 그리고 지금처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시기에는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이지.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야.”

그래서 제나일 성에 들어오기 직전에는 개미 떼처럼 몰린 기자들 위해 멋진 피사체까지 되어 주었다. 가면을 쓴 내 모습이 전국 방방곡곡 퍼져 나가기를 바라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던져 둔 가면을 재빨리 착용한 후 고개를 돌리자, 얇은 서류 뭉치를 든 리웨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연 라파엘로가 딱딱한 목소리로 질타했다.

“분명 오후 5시까지는 보고를 올리지 말라 언질해 뒀을 텐데?”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해 주셨으면 하는 문건이 있습니다.”

심기 불편한 적안이 나를 돌아본다. 문제없다는 의미로 엄지를 들자, 라파엘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리웨인을 안으로 들였다.

드셰로가 속삭였다.

“단원들 등쌀에 밀려 왔나 봅니다.”

“설마 나 때문에?”

“판이 깔리면 거부를 못 하거든요. 진짜 안데르트 파거인지 확인하러 온 거겠죠.”

어쩐지. 볼일은 라파엘로에게 있는 주제에 눈동자만 힐끔힐끔 날 향한다 싶었지.

“리웨인 경.”

뻣뻣하게 굳은 리웨인이 진 못지않게 삐걱거리며 날 돌아봤다.

“예.”

“나한테 할 말 있어?”

“…….”

“없어? 어떤 사람은 내 사인 받아 가던데.”

진 말이다.

그때 리웨인의 눈이 처음으로 번뜩였다.

“……저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두 손 공손히 내밀어진 손수건에 펜으로 사인을 그렸다. <멋진 안데르트 파거>. 하녀장이 만들어 준 사인이었다.

그때, 리웨인이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분홍색 프릴 손수건을 내 앞에 내밀었다.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제 어머니 것도 부탁드립니다.”

“리웨인 경은 참 효자야.”

“예?”

“어머니께 잘하라고.”

등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의 없네요.”

“평소의 미적 감각을 생각하면 무난한 편이지.”

다 들린다.

리웨인이 나간 후, 라파엘로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안데르트?”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애매하다. 딱히 바라는 게 있어서 라파엘로를 찾아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해, 안데르트. 너는 나를 버렸다.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구태여 보태자면, 더는 그런 심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

나는 가만히 가면을 매만지다가 넌지시 말했다.

“배고픈데 밥은 언제 먹어?”

“…….”

“…….”

그날 제나일 성에서 먹은 점심은 맛있었다.

* * *

늦은 저녁.

챙겨 둔 열쇠를 이용해, 제나일에서 칼레파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내가 이 열쇠를 사용하는 경우는 사실상 하나뿐이다. 루를 만나기 위해서.

“안녕, 루. 오늘도 잘생겼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하나둘 칼레파가 모여든다.

스쿨드와 우르드는 마도구 제작으로 제단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베르단드는 종종 이곳에 머물러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그냥 잡아다가 고문하라니까 그러네? 마도구 완성까지 기다리다니, 데이지 양도 참 성실해. 속세에서의 잡일을 하루빨리 끝마치고 로궤에 들어와야 네 번째 벽도 넘지.”

지금처럼 잔소리도 하고.

“그래서 그 네 번째 벽은 어떻게 넘는 건데요?”

“…….”

“…….”

“……흠흠. 그 방법을 알면 우리 셋이 이 꼴로 있지는 않을걸?”

헛기침한 베르단드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로드 칼레파도 무심하시지. 항시 마지막 벽을 넘으라고만 질책하실 뿐. 그럴싸한 힌트라고는 전혀 주지 않으셨으니.”

“아무도 힌트를 주지 않은 겁니까?’

“디안 케트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벽은 나머지 세 개의 벽과는 궤도 자체가 다르다고 하셨어. 그리고 ‘너희는 가능하다면 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이셨지.”

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반신은 로궤가 추구하는 마지막 경지라고 들었는데. 넘지 않기를 바란다니 이상하네요.”

“그에 대한 해석은 로궤 내에서도 제각각이야. 벽이란 결국 진리가 아닌 자아의 깨달음을 통해 넘는 것.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렵지만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럼 로궤에서 세 번째 벽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흠. 답변에 앞서 데이지 양에게 이렇게 묻고 싶네. 그대는 ‘벽’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벽이라.

기실, 벽이라 함은 보통 높고 넓은 성벽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나는 이 성벽의 이미지가 심신일체에 몹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까마득하기도 하고, 견고하기도 하고, 벽을 넘기 전과 후의 세계가 다르기도 하고…….

“서두르지 마십시오. 허둥댄다는 건 그만큼 벽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어느새 도착한 스쿨드가 의자에 앉은 채 뒷말을 이었다.

“로궤에서 궁극의 깨달음은 한 줄로 정리됩니다. ‘나를 알고, 받아들이고, 버릴 때 비로소 나의 자아가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벽이란 나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벽을 넘는 과정 자체가 나 자신을 깨부수는 일련의 과정인 것이지요.”

“그 말은…… 네 번째 벽은 나의 자아와 관련이 없다는 뜻인가요?”

“예리하군요.”

“어렵지? 그래서 디안 케트 님도 당신의 제자들이 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는 네 번째 벽의 존재가 너무 까마득한 데다, 당장 세 번째 벽을 넘는 것부터가 큰 문제였다.

‘나를 알고, 받아들이고, 버린다라. 그럼 세 번째 벽은 나를 버려야 넘을 수 있다는 뜻인데.’

이건…… 가장 모호했다.

“세 번째 벽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습니까?”

스쿨드가 물었다.

“네.”

“제 조언은 간단합니다. 로궤로 오십시오, 데이지 양.”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확언했다.

“속세를 등지는 건 나 자신을 버리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당신이 지닌 모든 의무를 버리고,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칼레파에 머무세요.”

나는 차마,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확실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 * *

가장 고요한 도시.

그 명성에 걸맞게, 로즈벨 백작가가 수백 년간 다스려 온 땅, 블라보트는 파란 하늘 아래 널리 자리한 동산이 그림 같은 곳이었다.

블라보트는 올랑 루즈 바로 옆에 자리한 국경 지역이기도 해서 평지 너머로 흐릿한 설산의 자태가 보이는데, 그 풍경이 일품이었다.

로즈벨 성에 도착했을 때는 백작 내외를 비롯한 소수의 고용인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아주 오랫동안…….”

나름 (일방적으로) 공개적인 방문이었음에도, 성 근처는 놀라우리만치 조용했다. 로즈벨 백작이 나를 배려해 이목을 최소화한 모양이었다.

그날 나는 로즈벨 백작에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허어! 동일인처럼 굴어도 남매라 그렇구나, 하고 여겼지. 설마 진짜 동일인이었을 줄은 몰랐네. 자네 정말 감쪽같은 마법을 부렸어. 하하! 이 고트 로즈벨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군그래!”

“죄송합니다.”

“아니야. 멀쩡히 살아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네. 정말 그것으로 다 된 일이지. 암.”

신이 난 얼굴로 술을 들이켜던 로즈벨 백작은 문득 미간을 찡그리며 날 돌아봤다.

“……그런데, 원래 여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쩌다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 거지?”

그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품에 챙겨 온 반지를 꺼내 보였다.

“백작님께서 며칠 전 제게 주신 이 반지,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흠, 잘 보관하고 있었군. 나는 언제나 약속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네, 친구. 부탁할 일이 있다면 주저 말고 말하게나.”

“그럼 백작님에게 웨더우즈의 사람들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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