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거울 너머로 비친 내 자태는 참혹했다.
복장은 분명 평소에 즐겨 입던 긴 원피스식 잠옷인데, 그 아래로 보이는 종아리가 마치 잘 익은 감자를 박아 넣은 것처럼 탄탄하고 거대하다고 해야 할까.
사내다운 다리털은 물론이고 천을 찢을 기세의 우람한 어깨와 커다란 손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무인의 골격이었다.
‘흠. 이렇게 보니 확실하게 안데르트 그놈보다 훨씬 훤칠한 인상이야. 키도 조금 더 큰 것 같고.’
내가 동생 따위한테 콩깍지가 씌어 있었나?
……아니, 이게 아니지.
“설마, 데이지 웨더우즈로 살던 시간은 모두 꿈?”
침실을 샅샅이 살폈다. 이부자리가 익숙한 걸 봐선 아무래도 꿈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현실이었다.
‘내 몸이 안데르트 파거로 돌아간 원인을 알아야 해.’
어떤 원인이 있지? 무슨 논리로 돌아올 수 있는 거지?
‘빌어먹을. 내가 알겠냐?’
사태 파악이 필요하다. 나는 침실을 나서, 어둠이 내려앉은 저택 내 어렴풋이 불이 켜진 응접실로 이동했다.
거의 발가락 보호대 수준인 실내화를 신은 채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일원들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바짝 굳어 있었다.
하녀장, 집사 암살자, 산적 하녀.
쨍그랑!
그다음은 하녀장이 떨어뜨린 찻잔과.
“살아 움직이는…… 안데르트 파거…….”
마지막으로, 충격에 파르르 떨리는 하녀장의 입술까지.
뭐라는 거야.
“마침 다들 모여 있었네. 물어볼 게 있는데, 나 어쩌다 여기로 돌아오게…….”
“꺄아아악!”
대뜸 비명을 내지른 하녀장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벽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고선 “어떡해, 정말 안데르트 님이야. 주인님이 정말 영웅 안데르트였어! 어떡하지? 나 지금 화장 다 지워졌을 텐데. 이게 말이 돼?”라며 중얼중얼하기 시작했다.
“……왜 저래?”
쨍그랑!
두 번째 찻잔이 깨졌다. 사기잔을 놓치고선 벌떡 일어선 집사 암살자가 차렷 자세로 커다랗게 외쳤다.
“예! 하녀장은 주인님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수줍은 듯싶습니다!”
“너는 왜 그러는데?”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주인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할 따름입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지금 중요한 건 이들의 정신 착란 여부가 아니다.
“하녀장, 나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허억. 이쪽으로 오, 오지 마세요!”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질겁한 하녀장이 서랍 위에 곱게 접힌 의복을 가리켰다.
“여기 제, 제가 준비해둔 오, 오, 옷을…….”
아, 맞아.
‘나 변태 꼴이었지.’
다들 이래서 놀랐던 거구나. 나는 머쓱해진 기분으로 잠시 응접실을 나가, 통로에서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들어왔다.
니트 조끼에 타이까지 완벽하게 마련된 실내복의 사이즈는 놀랍도록 꼬옥 맞아서, 움직이기 한결 수월했다.
“미안. 이제 이쪽 봐도 돼.”
……그런데 이거 사과하는 거 맞아? 몸만 좀 튼튼할 뿐인지, 나도 엄연한 여자인데.
하녀장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릴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나는 그녀와 눈 마주치기를 포기하고 재차 물었다.
“이제 사건 경위나 설명해 봐.”
마음을 다잡았는지, 불쑥 고개를 돌린 하녀장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설명했다.
“이, 이틀 전 새벽에 가, 갑자기 로, 로즈벨 백작님께서 라갈 타, 타운하우스르을…….”
그리고 바로 쓰러졌다.
무너지는 몸을 재빨리 부축했다. 가쁘게 숨을 내쉬던 하녀장이 맛이 간 눈으로 중얼거렸다.
“안데르트 님의 부축……! 이대로 죽어도…… 여한 없어…….”
제정신이 아니네.
까무룩 쓰러진 하녀장을 천천히 살핀 집사 암살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혼절했습니다! 그 외 건강에는 이상 없습니다!”
건강에 이상 없다니 다행……이기는 한데.
일단 하녀장을 침실에 눕히고, 하인 한 명을 붙여둔 후 응접실에 돌아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해줄 사람?”
“…….”
“없어?”
“…….”
“야. 너희 내가 무서워?”
“…….”
“하아…… 답답해 미치겠네. 이봐! 말리콥스 할아범, 저택에 있으면 잠깐 나와 봐!”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부터 작은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노인의 걸음으로 다소 다급하게 내려온 말리콥스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웨더우즈 자작……! 내 시체처럼 누운 꼴을 두 눈으로 확인하긴 했네만. 자네, 정말 라파엘로의 검이었군!”
“그럼 가짜였게? 그래도 멀쩡해서 다행이야, 할아범. 시간 괜찮으면 내가 어쩌다 저택으로 돌아오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줘. 다른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해.”
“말이 안 통한다고? 허허. 그럴 만도 하지. 저문 줄 알았던 시대의 영웅이 이토록 근사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말리콥스의 설명은 간결했다.
루와 나를 타운하우스에 데려온 이는 로즈벨 백작이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이미 영웅 안데르트 파거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로즈벨 백작은 내가 생체 실험실에서 구조되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이후 하녀장과 하인들은 말리콥스에게 도움을 청했고, 무사히 미드윈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내 비밀을 지켜주었구나.’
그때, 도저히 한 귀로 듣고 흘릴 수 없는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루도 나처럼 쓰러진 채 왔다고?”
“그렇다네. 자네처럼 깊은 잠에 든 모습이셨어.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나는군.”
미드윈트리에 도착했을 때부터 안데르트의 모습이었고, 루는 정신을 잃었다라.
‘내가 이런 모습을 하게 된 데에 루와 관련이 있는 건가.’
뭔가 불안하다. 그다지 좋은 쪽이 아닐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일세. 무엇을 눈치채신 건지 몰라도, 도착하기 하루 전날 스쿨드께서 웨더우즈를 방문하셨지 뭔가? 그분은 칼레파를 모시고 곧장 칼레파로 돌아가셨다네. 그리고…….”
품을 뒤적인 말리콥스가 투박한 형태의 나무 열쇠를 건넸다.
“이게 뭐야?”
“일회용 이동 마도구. 자네에게 전달하면 그 쓰임을 바로 알아챌 거라 하시더군. 그리고 이왕이면, 알아챈 즉시 사용하라 말씀하셨지.”
일회용 이동 마도구.
짧은 설명이었지만, 어떤 쓰임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어디 좀 들렀다 올게. 하녀장을 부탁해.”
“천천히 다녀오시게, 자작. ……이곳은 자네가 돌아올 장소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열쇠를 사용하려다가, 까무룩 잊고 있던 존재가 떠올라 말리콥스를 돌아봤다.
“그런데 진은 어디 있어?”
“아아, 진 말인가? 영웅에게 어울리는 보좌관이 되어야 한다며 저녁 훈련을 나갔네. 안정을 취하라고 말렸지만 씨도 먹히지 않더군.”
젊네, 젊어.
나는 굳게 닫힌 침실 손잡이에 나무 열쇠를 넣고 돌렸다.
달칵.
문을 열었을 때, 온화한 기운을 풍기는 침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차갑다 못해 스산한 바람이 머리칼 사이사이를 스치고 흩어졌다.
높고 넓은 홀. 무너진 천장에서 아스라이 달빛. 그 너머, 오랜 시간이 녹아든 제단.
“오셨군요, 데이지 양.”
돌아온 성지, 칼레파에는 세 명의 남자가 보였다.
제단 옆에 선 자가 한 명, 긴 목조 의자에 앉은 자가 한 명, 벽에 선 채 독서에 빠진 자가 한 명.
문을 닫은 후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제단 위에는 목관과 유사한 형태의 하얀 목조 구조물이 올려져 있었고, 그 안에는 낯익은 남자가 누워 있었다.
바로 루였다.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걸까. 나는 죽은 듯 잠든 루를 응시하며, 제단 옆에 선 자에게 물었다.
“……나를 이곳에 부른 건 루입니까?”
제단 옆에 서 있던 남자, 로궤의 칼레파인 스쿨드가 답했다.
“유사시 그리하라고 전달받았습니다.”
“유사시라는 건?”
“로드 칼레파께서 더는 당신을 지켜볼 수 없는 경우를 뜻합니다.”
순간, 심장이 덜컹이며 땅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끝까지 내 한계를 시험해, 데이지.”
숨이 끊겨가는 와중에 들렸던 루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한데.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어째서?
“루가 날 살려서, 인가요?”
“예.”
“그런데 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 거죠?”
“신의 영역을 건드렸으니까.”
대답은 스쿨드가 아닌,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서 들렸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몸을 살짝 긴장시켰다. 은발의 칼레파. 안데르트와 칼레파에 진입했을 때, 검을 들고 우리를 가로막았던 이였다.
“로드 칼레파께서는 그대의 육체를 과거로 돌리신 거다. 당신께서 판단하신 가장 젊고 강하며 건강한 시절의 육체로.”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몸을 확인했다. 가장 젊고 강하며 건강한 시절의 육체.
그게 바로 안데르트 시절의 육체라는 건가?
“그럼 루는 언제쯤 일어날…….”
그때.
“흠. 그러니까, 이 육체가 디안 케트 님의 심장을 삼킨 직후의 그 육체란 말이지? ”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내 코앞으로 불쑥 들이 밀어졌다. 스쿨드와 우르드 못지않게 심심찮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몹시 흥미로운 눈으로 턱을 쓸며 내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었다.
“허! 그거참 놀랍군. 백방으로 찾아 헤매도 못 찾았던 그분의 심장이 이자의 영혼에 녹아들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어.”
“…….”
“아, 내 소개가 늦었나? 나는 로궤의 칼레파인 베르단드다. 이쪽의 재수 없는 인상은 우르드고 저쪽의 꼰대 같은 분위기는 스쿨드. 스쿨드와는 과거에 인연이 있다고 했지?”
반갑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린 베르단드가 조금은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대에게 진정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데이지 웨더우즈. 로드 칼레파의 생전 유언에 따라, 우리 세 명의 칼레파는 그대의 보호자이자 후견자가 될 것이며 그대가 네 번째 벽을 넘는 데 전적으로 도울 것을 약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