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차라리 리웨인 경이 나을 뻔했어. 아니면 최소한 수상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다른 이가.”
“라파엘로는 우리 엄마야?”
나를 쏘아본 라파엘로가 구겨진 이마를 엄지 끝으로 꾸욱 눌렀다.
“너는…… 하아. 빌어먹을, 됐다. 따라오기나 해.”
말 안 해도 따라가고 있었는데.
우리는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다만 중간에 예기치 못한 문제점을 깨달았다. 지하 실험실의 구조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넓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와는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끼아아아아악!
“……라파엘로, 들었어?”
대답이 없다.
나는 라파엘로가 앞서 이동한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암흑 속,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돌아봤다.
마귀.
―키아아악!
파지지직. 진주 검을 꺼내고 빠르게 덮쳐 오는 마귀를 반으로 분절했다. 마귀의 육신은 두 동강 난 즉시 검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마치 형체가 없는 안개를 벤 것처럼.
‘……환상?’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정신 트랩이다.
‘언제부터 갇힌 거지? 라파엘로는?’
제자리에서 천천히 머리를 굴린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 트랩은 뭔가 이상하다.
보통 정신 트랩이라 하면, 타깃이 트랩의 존재를 인지한 상태여야만 환상 여부를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반대였다. 베려던 마귀가 환상처럼 흩어진 뒤에야 트랩임을 인지하지 않았는가? 한마디로, 불안정한 트랩이란 의미였다.
“라파엘로! 내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끼아아아악!
“……음, 너희를 부른 건 아니었는데.”
어둠 속, 감겨 있던 붉은 눈이 차례로 눈을 떴다. 하나, 둘, 셋, 넷……. 열 마리?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게다가 놈들은 내가 아는 ‘진짜’ 마귀였다. 사냥제에서 마주한, 나약하고 덜 완성된 마귀가 아니라 크고 재빠르며 높은 지능을 가진 그런 마귀.
“안데르트!”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릴 만큼 익숙한 외침이 들렸다.
흩어지는 검은 재 너머, 시체 못지않은 몰골로 정신없이 뛰어오는 여인이 보인다. 바싹 말라 도드라지는 광대와 움푹 들어간 눈. 말이 아닌 행색이었지만 한눈에 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여인이었다.
“정신 차려, 안데르트!”
“……나타샤.”
그녀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소나기처럼 세차게 휘날린 재가 내 시야를 가리더니, 주위의 풍경 역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우리는 협곡에 서 있었다.
내 발치에는 연합군과 마귀의 시체가, 등 뒤에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그 옆에 자리한 임시 처소에는 피난 가족이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피난민들이 두려워하는 건 마귀가 아니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나야.
“안데르트! 날 봐. 나타샤야. 마귀가 아니라 네가 모셔야 할 차기 군주이자 배우자인 나타샤라고! 정신을 집중해라. 검귀가 되어선 안 돼!”
목이 터져라 외친 나타샤가 침착한 걸음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나, 검귀가 되었나?’
아니, 그렇지 않다. 검의 공명이 조용하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더 이상 검귀가 될 수 없는 몸이었다.
“쉬이…… 그래, 그거야. 침착해. 네 몸에 상처를 만들지 말고.”
그럼에도, 나는 아이 대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뻗어오는 손을 쳐 내지 못했다. 피부에 닿는 푸석푸석한 손끝이 느껴지자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환상이라 해도 이런 모습은 너무하잖아.’
전시에도 이 정도로 애처로운 형상은 아니었는데.
“괜찮아.”
나타샤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어서…….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네 옆을 지킬 거야, 안데르트.”
날카로운 칼날이, 정확히 심장 아래를 관통했다.
“……너를 지킬 거야. 내가 너를, 안데르트를 지켜야 해.”
한 번 더.
“그러니까 너희는 전부 사라져.”
한 번, 더.
“안데르트를 괴롭히는 건, 그를 위협하는 건 전부, 전부 사라져! 모조리!”
둥그렇게 뚫린 왼쪽 가슴에서 분수처럼 피가 쏟아져 나왔다.
환영이 깨졌다. 모래바람이 불던 협곡은 흔적도 없이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고, 주위는 다시 어둠이 잠식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왜 통증이 느껴지지?
왜, 내가 아프지?
멍청하기는. 내가 아픈 이유는 간단하잖아. 이건 가짜가 아닌 진짜 피라서 그래. 넌 환상에게 찔린 게 아니야. 너는…….
진짜 나타샤에게 찔린 거야.
‘아, 빌어먹을.’
그 마귀들, 그 협곡, 그 피난민들! 전부 내 환상이 아니라, 나타샤의 환상이었다.
눈앞의 나타샤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다. 그래서 저런 몰골이었던 것이다.
“나, 타샤.”
네가 이 실험실을 무너뜨린 거였구나.
뒷걸음질 두어 번에 몸이 무너진다. 쨍강. 바짝 메마른 손아귀 사이에서 칼날이 미끄러졌다. 총명했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까맣게 가라앉았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그러지 않았어.”
나는 천천히 호흡을 유지한 채 나타샤를 안심시켰다.
“알아, 나타샤. 괜, 찮아. 괜찮으니까 나가서 라파엘로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나는……!”
무릎으로 기어 멀리 달아난 나타샤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도와줘…… 제발 나 좀 도와줘, 안데르트.”
더는 못 버틴다.
벌어진 가슴 틈으로 핏물이 줄줄 샜다. 아, 맞아. 피도 이런 식으로 쏟아질 수 있었지. 바닥에 고이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느껴지면 안 될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에게로 와라.
―신의 일부가 되어라.
순간 희미해지려던 정신이 번개가 내리꽂힌 것처럼 번쩍 일어섰다.
“너 설마 메피스토의 심장을…….”
먹었어?
그래서, 네가 만든 상처에 메피스토의 힘이 느껴지는 거야?
울컥, 쏟아진 피에 말문이 틀어 막혔다.
“데이지!”
어둠 너머, 누군가 내 이름을 비명처럼 내질렀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안다. 나타샤의 것이 아니다. 내 동생, 안데르트의 목소리였다.
그도 이 지하에 있었던 걸까? 더듬더듬 손을 뻗자, 단단한 온기가 내 손을 잡아 왔다.
이상하게 마음이 안심됐다. 그와 동시에, 검게 가라앉은 시야로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올랐다.
‘루. 어떡하지.’
걱정할 텐데.
두고 갈 수 없는데.
전신이 수렁에 빠진다. 나는 깊고 어두운 구렁으로 끝없이, 끝없이 빠졌다.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다.
4년 전에 느낀 그 감각.
죽음의 감각.
나는, 죽어 가며 눈을 감았다.
.
.
.
영혼이 완전히 깨졌다. 나는 부서졌다.
“누구 마음대로?”
.
.
.
누군가 내게 속삭였다.
“너는 끝까지 내 한계를 시험해, 데이지.”
.
.
.
금이 간 영혼에 다시 힘이 깃드는 듯했다.
“날 고작 인간 따위에 휘둘리는 하찮은 존재로 끌어내리지.”
.
.
.
나는 죽은 걸까?
“…….”
.
.
.
나는 죽은 거야, 루?
“아니, 포기해. 너는.”
.
.
.
나는…….
.
.
.
“내 허락 없이 죽지 못하니까.”
* * *
“허헉!”
찬 공기가 폐부를 뚫을 기세로 밀려 들어온다.
발작하듯 일어선 몸이 한기에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깊게 감았다.
“하아, 하아.”
여긴 어디지? 닫혀 있던 오감이 열리면서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것은 바로 기억이었다.
차가운 지하 바닥. 공포에 질려 있던 나타샤의 얼굴. 내 이름을 부르던 안데르트의 목소리.
그리고 죽은 나.
‘……나, 살아 있나? 분명 심장이 뚫렸던 것 같은데?’
등골이 오싹했다. 설마 여기 사후 세계는 아니겠지?
하지만 죽었다기에는 오감이 너무나 생생하다. 넋 놓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몹시 낯익은 침실에 누워 있단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게 아니었어. 미드윈트리로 돌아왔구나.’
이곳은 미드윈트리의 웨더우즈 저택이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온 거람. 루가 날 업고 날아오기라도 한 걸까?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큰 현기증은 없었다. 단지 움직임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을 뿐.
‘어쩐지 시야가 좀 높아진 기분인데.’
한없이 어색한 느낌으로 서 있던 나는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울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바위처럼 단단히 굳어 버렸다.
거울 너머로 존재하면 안 되는 이가 서 있었다.
“……역시 사후 세계인 거지? 그렇지?”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이 아닌, 마도 전쟁의 영웅 안데르트 파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