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우리 이전에 침입자가 있었던 건가? 피가 제대로 굳지도 않은 걸 봐선 얼마 되지 않았어.”
“아니, 침입자가 아닌 내란일 확률이 더 높다. 이걸 봐라.”
어느새 안쪽 깊숙이 들어가 부검하던 라파엘로가 내게 손짓했다.
“제대로 된 병장기는 물론, 갑작스러운 침입에 대응한 흔적조차 하나 없어. 대부분이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주위를 훑던 나는 라파엘로에게 되물었다.
“암살일 가능성은?”
“메피스토의 신전을 떠올리면 이런 무덤의 입구는 하나이기 마련이고, 입구에서 실험실의 거리가 멀지도 않아. 비밀스럽게 잠입할 수 없는 구조지.”
라파엘로가 동의하느냐는 눈짓을 보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이 함께여서 그런지, 반사적으로 연합군 시절의 행동이 튀어나왔다. 이런 문답은 이곳 지하 실험실처럼 밀폐된 장소를 빠르게 탐색하는 데 유용했다.
‘라파엘로와 손발을 맞추는 게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능숙하네.’
역시 10년은 우습게 볼 시간이 아니구나. 뭔가,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이다.
“……루?”
어느 순간 뚝 끊긴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우두커니 선 루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윽고 발을 디딘 땅은 마치 무도회장 같았다. 공터처럼 드넓은 홀. 다만 실제 무도회장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벽면에 따개비처럼 붙은 거대한 실험관일 것이다.
유독 크고 단단해 보이는 이곳의 실험관은 우리가 지나온 여타 실험관처럼 형편없이 깨진 상태였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실험관 내부에서 풍겨 오는 이 꺼림칙한 기운. 거기에 피부를 바싹바싹 태워 버리는 듯한 착각이 일게 하는 불결한 공기.
“설마, 이게…….”
“흔적.”
짧게 답한 루가 서늘한 시선으로 텅 빈 유리관 내부를 지그시 응시했다.
“메피스토의 심장이 보관되어 있던 흔적이야. 그러나 흔적만 남고, 심장은 사라졌어. ……꼴을 봐선 도둑도 멀리 가지는 못했군. 아마 이 근방에 있을 거다.”
나는 복잡해진 기분으로 깨진 유리관을 바라봤다.
‘고작 흔적으로 이 정도의 압박감을 주다니. 범인은 심장을 쳐다보지도 못하겠네.’
그래서 심장은 저 관 안에 보관해 두었던 것일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특수한 마가 코팅된 유리일 것으로 예상됐다.
뒤따라 홀 안으로 들어온 라파엘로가 넌지시 물었다.
“믿기지 않는 힘이군. 대마법사 메피스토는 반신이었던 건가?”
“아니. 그는 휘라고 들었어.”
내 대답에 라파엘로가 납득할 수 없다는 눈으로 유리관을 노려봤다.
“휘라면, 세 개의 벽을 넘은 로궤의 사제? 이상하군.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였다 한들 이 정도의 힘을 품는 건 말이 안 된다. 심지어 이미 죽은 자의 심장일진대.”
라파엘로를 스윽 돌아본 루가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눈치가 꽤 쓸 만한걸, 공작님.”
“…….”
“그래, 이건 메피스토 본연의 힘이 아니다. 여러 힘이 뒤섞여 있지. 아무래도 전쟁을 일으킨 10년 동안 거하게 폭식을 즐긴 모양이야.”
식사 행위를 통해서 반신에 견줄 만한 마를 쌓았다? 예상 가는 바가 있었다.
“메피스토가 심장 결정석을 먹었다는 거야?”
“그래, 하지만 몇십 개로는 이 정도로 가시적인 힘을 얻을 수 없어. 최소 백 단위…… 아니, 천 단위려나.”
눈치 빠른 라파엘로는 우리가 나눈 몇 마디의 대화로 상황의 흐름을 유추했다.
“힘을 축적했다라…… 전사한 군인들의 심장을 파먹은 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 하찮아. 녀석은 좀 더 섬세하게 제련된, 수준 높은 심장을 원했을 거다. 이를테면 로궤 신도의 심장이라든지.”
아.
‘그렇구나. 그게 진짜 목적이었던 거야.’
남로궤는 메피스토의 세력이 남하하면서 탄생한 세력이다.
이들은 벽을 넘기 위해 비윤리적인 방식을 활용했으며, 그 방증으로 메피스토의 신전에서 행해진 여러 생체 실험이 있다.
남로궤의 신도들은 깨달음 없이 벽을 넘길 원했다. 그리고 메피스토는 그런 신도들의 욕망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키웠다. 벽을 넘은 신도들의 심장을 빼앗음으로써.
홀 내부를 느릿하게 둘러본 루가 옅은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음성으로 작게 읊었다.
“세 치 혀로 어리숙한 사제들을 꼬여 낸 게 이걸 위해서였나. 정말 악귀 그 자체로군, 메피스토. 네 스승이 알면 땅을 치며 울겠구나.”
짧은 정적 끝에, 라파엘로가 운을 뗐다.
“메피스토의 심장이 이 근처에 있을 거라 했나? 내가 찾으러 가지. 따라와라, 데이지.”
그를 뒤따르려던 나는 긴 통로에 진입하기 직전,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루가 홀 한가운데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것이다.
“루?”
그는 슬슬 턱을 쓸며 날 돌아봤다.
“흠. 아무래도 뒤처리가 필요한 거 같은데.”
뒤처리?
“이 공간에 고여 있는 기운이 너무 강력해. 고밀도의 힘이 한정된 관 안에서 장기간 뭉쳐 있었던 탓에,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사달이 날 가능성이 높아. 게다가 진짜 문제는…….”
고심하듯 말끝을 흐린 루가 빙긋 미소 지었다.
“뒤쫓는 것보다 이쪽이 조금 더 급하겠군. 데이지, 잠시 눈을 감아 보겠어?”
감으라기에 일단 감았다. 자상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귓가를 울렸다.
“불쾌해도 조금만 참고 이 기운에 온 정신을 집중해 봐. 너라면 분명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아주 느리게 호흡을 뱉으며 공기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나에게로 와라.
―신의 일부가 되어라.
―심장을 바쳐라.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선연한 음성. 전신에 소름 끼치는 전율이 일었다.
그건 마치, 수십 개의 다리를 지닌 지네가 뇌 속을 기어 다니는 듯 끔찍하고 역겨운 느낌이기도 했다. 제길, 더럽게. 찝찝한 기분으로 귓가를 털어 냈다.
“이건 심장 결정석이 내는 공명 같은 거야?”
“메피스토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 심장에 자아가 남아 있어. 놈의 강렬한 ‘염원’이 심장에 기생해 명을 이어 가고 있는 거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네 말대로 공명과 유사하려나.”
그 공명에 집중하듯 느른히 눈을 감은 루가 설명을 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이런 기운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위험해. 메피스토의 자아에 동화되어 꼭두각시 인형이 되고 말아. 그래, 마치 마귀나 검귀처럼…….”
소유한 검의 공명도 아니고, 한때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악마에게 동화된다니. 말이라도 끔찍하다.
‘그럼 이 지하의 연구원들도 전부 동화된 상태였던 건가?’
공명에 동화되면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의 연구원들은 무려 4년간, 당장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영위해 오지 않았는가? 이는 메피스토와 동화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막았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었지만.
‘그럼 나타샤는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 메피스토의 심장을 찾는 게 급선무다. 지하의 입구는 여전히 닫힌 상태였으니 심장을 챙겨 간 주범 역시 우리와 한 공간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곳을 부탁할게, 루.”
“그래. 방금 들은 그 목소리를 기억해, 데이지. 각자 역할을 마무리하고 지상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 말이 내 귀에는 마치 라파엘로가 귀부인들과의 티타임에 뜨개질을 즐긴다는 말처럼 어색하게 들렸다. 뒤처리와 루.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루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책임감. 어쩌면 그 또한 균형이 무너지면서 되살아난 인간적인 감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피스토가 디안 케트의 제자였다는 건, 넓게 보면 로드 칼레파인 루의 제자이기도 했다는 뜻이니까.
“라파엘로 제나일.”
루가 어두운 통로를 응시하며 경고했다.
“내가 너의 동행을 허락한 건, 필시 쓸모 있을 거란 데이지의 주장에 동의해서다.”
다분히 적대적인 어조에, 통로 맞은편에 서 있던 라파엘로의 한쪽 눈썹이 매섭게 들썩였다. 설마 아까 말한 각자의 역할이라는 게 한판 뜨는 역할이었던 건 아니겠지?
무신경한 시선으로 라파엘로를 스윽 훑은 루가 선명한 조소를 지어 보였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꼴을 봐선 딱히 내 데이지를 웃도는 실력 같지도 않으니, 죽기 싫으면 그녀의 말에 토 달지 말고 고분고분 따르도록.”
나는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게 명확해 보이는 라파엘로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내가 잘 지킬 거야. 걱정하지 말고 위에서 봐!”
자, 가자. 어서 가자. 다행히 라파엘로는 순순히 내게 등을 떠밀려 주었다.
“성격이 제대로 파탄 났군. 저런 인간을 마음에 두다니 제정신이냐?”
괜찮아. 인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