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이로써 구국을 위한 군사 작전의 뼈대가 정해졌다.
한 명은 마법사, 다른 한 명은 기사, 그리고 나는…… 한때하녀였고그보다더한과거에는군인이었으며이제는한가문의어엿한가주인 검사.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이후 라파엘로에게 탐색 예정지를 미리 설명한 나는 엄숙한 태도로 창고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아니, 데이지. 여기 말고 북쪽부터.”
루에게 보기 좋게 가로막혔다.
“왜?”
“땅의 힘이 모든 마법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건 너도 알 거다. 그 어떤 훌륭한 마도구도 땅 아래의 마는 탐지할 수 없어. 지하는 생체 실험과 같은 시끄럽고, 기괴하며, 요사스러운 행위를 숨기는 데 최적의 조건이야. 그러니 시간을 절약하려면 북쪽부터 살피는 게 좋아.”
논리적인 근거라 반박할 거리가 없다.
우리는 곧장 황성 뒤편 북쪽에 자리한 숲으로 향했다. 이 숲은 사냥제 때 사냥 대회가 열린 곳이기도 해서, 빗줄기를 뚫고 북상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가 황성에 주둔한 기사들의 이목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간단했다.
“이상 없나?”
“공작 각하! 예! 북쪽은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라파엘로가 주위를 끌고.
“숲으로 들어가십니까? 저희도 같이…….”
“아니, 혼자 다녀오겠다. 따라오지 말고 쉬어라.”
“예, 조심하십시오!”
그 틈을 타, 나와 루가 빠르게 거리를 벌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더는 기사들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우비를 둘러쓴 세 명의 그림자만이 빗소리 뒤에 숨어 빠르게 걸음을 옮겨 갔다.
길고 긴 적막이 깨진 건 가까운 수풀 너머로 우리의 목적지가 나타났을 때였다.
“저자는 누구지?”
불어난 계곡물 위, 낮은 절벽 지대에 우뚝 선 라파엘로가 문득 루를 턱짓하며 물었다.
‘……이제야 묻는 거야?’
타이밍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뭐, 조금 안심되는 구역에 도착했다는 뜻이겠지. 이 근방에 사람이라고는 우리 셋뿐이니까.
“이쪽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빗물에 젖어, 평소보다 배는 음산하고 우울한 기운을 내뿜는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돌연 말문이 턱 막힌 것이다.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불과 며칠 전에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은데. 같은 고민을 또 하고 자빠져야 하다니.
‘내 남편이라고 소개해야 하나? 아니면 내 애인?’
흠흠. 이것들과 대충 비슷한 관계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 입으로 밝히기에는 좀 낯부끄럽다.
‘칼레파? 반신? 세레니예 백작? 웨더우즈 가문의 요리사? 메피스토와 아는 사이?’
쉽게 밝힐 정보는 아니지. 아, 이것도 저번과 똑같은 결론이네.
‘그러면 역시 저번처럼 은인?’
루가 싫어할 것 같아.
‘역시 내 마법사가 가장 괜찮은 답변이야.’
하지만 이것도 너무 담백한 느낌이라 어쩐지 루의 눈치가 보인다. 이럴 때는 루의 의견에 따른다.
“루는 누구야?”
개떡 같은 질문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루가 곧장 받아쳤다.
“네 애인.”
“…….”
“아니, 남편?”
“…….”
“흠. 평생의 동반자도 나쁘지 않고, 영혼의 단짝도 괜찮겠어. 아니면 데이지의 주인님…….”
“흠흠! 대충 알아들었지? 그런 사람이야.”
크게 헛기침하며 은근슬쩍 눈길을 돌렸다.
삼십 평생 타인에게 연인 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의 이성을 소개하는 건 처음이었다. 음, 이런 기분이었구나. 쑥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든든한 그런 기분.
라파엘로는 고요했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호수 바닥에 침전된 어둠처럼 차가웠고, 어느 면으로는 텅 빈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가 쉰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알펜 세레니예 백작인가?”
차마 그렇다고 긍정할 수는 없어서,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으로 라파엘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조용히 날 응시하다가 계곡을 건너 목적지로 향했다. 이윽고 그 뒤를 루가 쫓았다. 오늘 본 움직임 중에 가장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보름달 성회전』
우리가 도착한 폐건물의 정식 명칭이다.
보름달 성회전은 한때 황성 예배당이었으나, 60여 년 전 두 명의 황자가 기도를 올리다 심장 마비로 사망한 이후 불길하다는 이유로 폐쇄된 장소였다.
다만 ‘모든 성회전은 인간의 손으로 부술 수 없다’는 법규에 의해 홀연히 버려진 공간이 되어 버렸다.
성회전 내로 거침없이 진입한 라파엘로가 황량한 내부를 쭈욱 훑으며 말했다.
“이 위쪽은 며칠 전 열이 넘는 기사가 샅샅이 훑었다. 마귀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어.”
그의 말대로 폐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하녀장의 설명을 떠올리며 기숙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긴 통로를 따라 걷다가,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벽 한구석을 더듬거렸다.
덜컥.
“아, 열렸다.”
벽 하단이 쑤욱 들어가면서 성인 한 명이 기어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힘겹게 진입해 확인한 내부는 평범한 창고에 가까웠다. 의자와 침구, 다량의 비상식량을 제외하면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평범한 벙커야. 퍼즐이랄 것도 없고.”
두 사람은 별다른 대답 없이 조용했다. 씹냐? 사이좋은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호응이라도 해 주라.
하녀장이 알려 준 비밀 통로 중, 야외 지하는 이곳뿐이다. 그 외는 모두 황성 본성 실내와 이어져 있거나, 지상에 자리했다.
한마디로 보름달 성회전에서 흔적을 찾지 못할 시 실험실은 황성 외부에 자리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별다른 소득이 없었군.”
라파엘로의 감상대로다. 성회전 뒤뜰로 나와 무덤 근처까지 샅샅이 뒤져 봤으나 먼지뿐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황성에는 없는 걸까?
“뭘 그렇게 봐, 루?”
느긋하게 성회전 주변을 둘러보던 루가 답했다.
“이 무덤. 로궤식이네.”
그는 무덤 한가운데 자리한 나무를 턱짓했다.
“느티나무의 위치.”
다음으로는 죽은 사제가 잠들어 있을 무덤가를.
“그리고 비석들의 구조.”
“우연 아닐까? 여긴 펜 로타 제국의 황성이야. 로궤의 방식을 따를 리가 없어.”
작게 웃은 루가 무덤가를 크게 돌아, 왼쪽 비석 앞에 섰다. 그리고 당당하게 비석 아래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로궤에 귀의한 귀족 가문은, 심장 결정석의 마지막 소유자마저 눈을 감으면 결정석을 지하에 묻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심장 결정석만 따로 챙겨 나올 수 있도록 입구를 숨겨 두는데…… 이 무덤의 구조는 그 입구의 위치를 알려 주는 힌트 역할을 하지.”
그 말에 자연스레 세레니예 성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세차게 비가 내리던 날 밤이었다. 분명, 늑대로 변신한 루가 비석 아래를 힘차게 파헤치자…….
쿠우웅.
……지금처럼 땅이 무너지더니 숨겨진 계단이 드러났었다.
맙소사. 탄식하기 무섭게, 선뜩한 기운이 성회전 일대를 뒤덮은 후 증발했다. 나는 마의 힘이 미약하게 남은 땅을 확인했다.
‘진흙에 박힌 발자국들이 사라졌어.’
방문자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마법.
‘이래서 마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던 건가.’
정말 감쪽같다. 우리 셋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일렬로 서서, 새까만 구렁 아래를 살폈다. 저 안에서 뇌리를 찌르는 역겨운 마가 진득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쿵, 쿵. 심장 박동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본능이 내게 경고했다.
저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것은 나의 천적. 나를 죽인 악마…….
“메피스토.”
믿기지 않았다. 이토록 강력한 힘이, 고작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니.
“메피스토의 신전이 품고 있던 기운과는 차원이 다르군.”
스릉. 검을 뽑은 라파엘로가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은 어느 순간 평지로 뒤바뀌었다. 그때, 환한 불빛이 켜지며 지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하곤 침음을 삼켰다.
“이런.”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었다.
볼품없이 깨진 대형 유리관. 서적과 서류로 빽빽한 책장. 바닥을 적신 알 수 없는 액체. 그런 액체와 뒤섞여 불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검은 피.
그 위에 즐비한 것은 마귀가 아닌 사람의 시체였다.
마치 병동처럼 길게 이어진 통로와 방들. 집무실, 회의실, 침실, 식당, 창고, 그리고 알 수 없는 고깃덩이가 흉측한 꼴로 뒤엉킨 활용 미상의 공간들까지 전부. 시체로 장식되어 있었다.
“……일단 우리가 찾던 실험실은 확실해 보여. 그렇지, 루?”
시신 한 구의 뒤통수를 끌어 올려, 얼굴을 확인한 루가 가볍게 답했다.
“그리고 이 시체들은 연구원들이었던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