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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56화 (156/195)

156화

그건 곤란한데.

안데르트 파거를 불러내라니. 불가능한 요구다.

“어째서 주저하지?”

그야, 내가 바로 안데르트 파거이니까.

“제 동생이 곤란해할 겁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폐하. 그 아이는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준비가…….”

“라파엘로 제나일의 손을 잡았기 때문인가?”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제나일 공작이 그러던가? 블라디에프 백작을 미끼로 나타샤 황녀를 끌어내라고? 그 때문에 영웅 안데르트 파거의 누이라 사방팔방 소문을 낸 것인가?”

짧게 기침한 황제가 거친 음성으로 경고했다.

“바라는 대로 나타샤와 만나게 해 주겠다. 하지만 웨더우즈 자작, 그대는 안 된다. 블라디에프 백작을 짐 앞에 데려와라.”

느릿느릿하게 일어선 황제는 하인의 부축을 받아 벽 안쪽 문 앞에 섰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이틀을 주지. 그동안 서신이 준비되지 않으면, 그대의 동생은 누이의 송장을 치우러 오게 될 것이다.”

싸늘한 경고를 끝으로, 황제는 다이닝 룸을 나갔다.

황제와 하인들이 떠난 방에는 차갑게 식은 양고기구이와 오도카니 앉은 버림받은 여인, 나만 남았다.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을까?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 룸의 문을 밀었다.

한데 문이 안 열린다.

쾅, 쾅!

황제가 사용하던 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법이 걸렸는지 꽤 강한 힘으로 후려쳐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권위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방에서 식사를 즐긴다 싶더라니.

‘처음부터 날 감금하기 위한 속셈이었구나.’

이를 어쩐담.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가기는 해야 하는데.’

황제는 믿을 수 없다.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날 협박하고 감금했다는 부분부터 조금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기실 감금당했다는 점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다음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것.

‘황성에 머물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건 좋은데. 밖을 못 나가서야 원.’

일단 기다리자. 황제가 잠들기 전에 한 번 들를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방 근처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체감상 1시간이 흐른 듯한데, 경험에 의하면 실제 시간은 3배에 준한다. 즉 3시간 정도 흘렀을 확률이 높았다.

슬슬 하녀장이 챙겨 준 서신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이 들기 시작한 순간.

덜컥.

내가 들어온 입구에서 문손잡이를 돌리는 소음이 들렸다.

‘황제?’

그 얍삽이, 보기보다 인내심이 짧구나! 적절한 기회다 싶었지만 정작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예상한 이가 아니었다.

“야심한 시각에 그리운 양고기 냄새가 풍겨서 왔더니.”

샹들리에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머리칼. 제집 침실에 머물듯 가벼운 검정색 실크 가운 차림에, 이질적일 정도로 느긋한 분위기까지.

“이 많은 요리를 혼자서 즐기려던 거야? 욕심이 많은데?”

루는 문을 닫고 들어와 내가 앉았던 의자에 자리했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던 포크를 쥔 채 싱긋 웃었다.

“오늘 예쁘네, 데이지. 다 죽어 가는 병자를 상대로는 너무 과분한 미모야.”

접시에 널브러진 식은 양고기를 콕, 찍어 맛본 루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이건 더럽게 맛없고.”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루는 나를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위기의 순간마다 왕자님처럼 등장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런 루가 나를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면 그건 필시 하늘의 실수일 테다.

하지만 실수여도 괜찮다. 그럼 우리의 인연은 운명을 거스른 만남이 되는 거니까. 원래 운명은 가치를 잃은 순간 가치가 생긴다. 부정한 힘을 얻어야 그 힘을 경계하게 된다는 황제의 말처럼.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 루의 옆에 앉아, 내 생에 가장 진중한 태도로 그를 치켜세웠다.

“루는 최고야.”

루는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긍정했다.

“알아.”

“황실 요리도 루가 만든 요리에는 비할 바 못 돼.”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 것치고는 거의 다 비운 것 같지만.”

나는 길게 기지개 켜며 다시 일어섰다.

“으으음! 좋아, 이제 가 볼까?”

“지도는 완벽하게 외웠겠지?”

“응. 내 특기거든.”

전선에서 정말 지겹도록 외웠었지. 덕분에 제국 남부 지리는 속속들이 꿰고 있다.

“작전명은?”

작전명? 그런 건 생각 안 해 뒀는데.

“<가니시에 당근이 너무 많아>.”

“그게 평균이야. 편식하면 안 돼.”

황제와의 만찬.

이제 와 설명하자면, 이 만찬은 부가적인 목표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볼일은 황성에 위치해 있을지 모를 생체 실험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메피스토의 심장을 갈취하는 것.

‘집 안을 휘저어 놓으면 결국 집주인인 나타샤도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나타샤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은 내 생명 유지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래야 검성이 소유한 디안 케트의 유산을 양도받을지, 훔쳐 낼지를 명확히 결정할 수 있을 터였다.

우리는 다이닝 룸을 벗어나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본성 뒤편 창고 쪽에 마련된 비밀 공간. 통로가 워낙 좁아서 둘이 들어가기에는 버거웠다.

나는 뒷문 옆, 그림자 안에 숨은 채로 속삭였다.

“루, 이쪽은 나 혼자 확인하고 나올 테니까…….”

“확인하고 나와?”

헉. 나는 반사적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들려선 안 되는 반문이 들린 까닭이다.

등 뒤로 짧은 소름이 일었고,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상대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까,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안녕?”

“안녕하지 못해.”

라파엘로.

“이상하군. 황제 폐하와 만찬을 즐기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왜 이곳에 나와 있지?”

냉랭한 눈초리가 피부 위에 화살처럼 푹 꽂혔다. 막무가내로 용건을 묻는 낯은 내 인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표정이었다.

난관이다.

하필이면 앞뒤 꽉 막힌 라파엘로와 맞닥뜨리다니? 고개를 돌려 루를 바라봤다. 태양처럼 화사한 미소에 눈이 다 멀 것 같았다. 허락만 떨어지면 언제든 상대를 도륙 낼 준비가 된 웃음이다.

“증거 인멸?”

그거 아니야.

‘……잠깐.’

이건 오히려 기회일 수 있지 않을까?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인간 병기와 함께 움직일 기회. 나는 재빨리 진상을 밝혔다.

“그 얍삽이가 나를 감금했어.”

라파엘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감금?”

“안데르트를 데려오면 나타샤를 보여 준다더니, 대뜸 나 혼자 다이닝 룸에 가둬 놓고 사라졌어. 거절하면 송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면서.”

라파엘로의 시선은 여전히 짙은 의심을 띠고 있었다. 이 자식, 전우의 말도 못 믿어?

“거짓말 아니야. 내 남은 수명을 걸고 맹세해.”

“…….”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봐? 진짜라니까 그러네?”

“……예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그런 중대한 이야기를 할 때 조금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언제나 진지해. 너도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황성에 머문 거잖아?”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라파엘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군. 일단…… 너는 미드윈트리로 돌아가라. 이번 일은 내 선에서 해결하겠…….”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마침 잘 만났어. 나 좀 도와줘, 라파엘로. 황성에서 생체 실험실을 찾아야 해.”

제안하기 무섭게, 두 사람의 반문이 동시에 들렸다.

“생체 실험실이라니.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거랑 우리가 왜?”

루와 라파엘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번 더 흘렀다. 다행히 둘의 눈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먼저 시선을 거둔 라파엘로가 내 제안을 나무랐기 때문이다.

“……어디서 이상한 정보를 얻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괜한 짓이야. 황성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냥제의 일을 빌미로 이 근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어. 외부에서 마법으로 이동시켰을 확률이 높아.”

나라고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녀장으로부터 황성의 구조를 강제 주입받았을 때, 나는 그녀의 논리에 미약한 의구심을 느꼈었다.

“라파엘로가 황성 부근을 전부 살펴봤을 텐데. 그런 그가 아직 실험실을 못 찾았다는 건, 실험실이 황성에 없다는 의미 아닐까?”

“외부인이 황성 전체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해요. 오직 황족만이 황성의 비밀 통로를 알고, 현세대 살아남은 황족이라고는 황제 폐하와 나타샤, 저, 황태자 전하가 전부니까요.”

“전부라니. 나머지는 죽은 거야?”

“네. 우리 세대에는 유독 형제가 많았어요. 좋지 않은 사정으로 황후 자리가 세 번 바뀌었거든요.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세력 싸움에 휘말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전시에 한바탕 피바람이 분 후에는 죽은 형제의 수가 산 형제의 수를 가뿐히 뛰어넘었죠. 사실 저와 아슈네이케 오라버니가 목숨을 부지한 것도 운에 가까워요. 황성에서 도망친 덕에 화를 피했으니.”

“…….”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제가 모습을 감춘 이후 황성의 비밀 통로를 아는 자는 라갈 내에 황제 폐하와 나타샤 외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 거죠.”

나는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하녀장이 챙겨 준 서신을 라파엘로에게 보여 줬다.

“확인해 봐.”

주저 없이 서신을 찢은 라파엘로가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나스타샤 밀리오르그 펜 로타? 설마 그 이나스타샤 황녀를 말하는 건가?”

“우리 하녀장이야.”

천천히 고개를 든 라파엘로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사정이 복잡하니까 대충 그러려니 받아들여. 요점은 황족에게서 얻은 정보이니 쓸데없는 거짓 정보가 아니고, 너도 뇌가 있다면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야. 알아들었어?”

다음은 한껏 언짢아진 우리 마법사를 설득할 차례다.

“그리고 루, 라파엘로와 함께 움직이려는 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야. 나처럼 나타샤를 찾는 입장인 데다 확실한 권력도 있지. 현재 황성 내에는 그와 뜻을 함께하는 기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여러모로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아하. 별로인데?”

“미안.”

편지를 구긴 라파엘로가 내게 일갈을 날렸다.

“누구 멋대로 그런 판단을 하는 거냐?”

한시 바쁜 상황에 발목이 붙잡혀서일까?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내 멋대로인데 꼽냐? 꼬우면 방해 말고 여기 얌전히 처박혀 별이나 세든가. 아니면 정정당당하게 한판 떠.”

발검할 자세를 잡자(그래 봤자 진주 귀걸이에 손을 가져다 댔을 뿐이다), 느리게 고개를 내저은 라파엘로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뭐가 됐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편하겠지. 네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 실험실로 안내해라, 안데르트. 아니…… 데이지 웨더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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