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나는 뇌리를 지배하던 의문을 단숨에 잠재웠다.
무려 황제와 대면하는 자리이다. 이번 기회로 중요한 실마리를 얻게 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기회가 주어진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식탁은 기가 찰 만큼 길었다. 소형 다이닝 룸 입구에서 안쪽 벽까지 쭈욱 이어진 식탁 양 끝에는 2인의 식사 자리만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의 손님이 오셨군.”
반대편 끝에 홀로 자리해 있던 황제가 나를 알은체했다. 곧장 고개를 숙이느라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훑은 안색은 가히 좋지 못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가문의 영광입니다.”
“영광 같은 따분한 소리는 그만하고 거기 앉게.”
소리 없이 다가온 하인이 의자를 빼 주었다. 준비된 자리에 앉고 보니 황제와의 거리가 더 멀게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이 앉으면 표정도 겨우 보이겠는걸?’
하인은 물을 따른 후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목이 마르실 때는 맨 왼쪽 잔에 담긴 물을 드시고, 입을 헹구실 때는 그 옆에 담긴 물을 드십시오.”
둘이 뭐가 다른 건데?
‘이게 그 황실 예법이라는 건가.’
듣자 하니 황실 예법은 귀족 예법과도 사뭇 다르다 했다. 하녀장이 손수 나에게 황실 예법을 가르쳐 준다 했으나,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누구에게 배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자칫 난감해질 수 있으므로.
첫 요리는 알 수 없는 초록색 무스가 올라간 생선찜이 나왔다. 옆에 선 하인이 요리에 대해 설명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최소 한 입. 많으면 두 입씩만.’
나는 하얀 생선 위에 적당한 양의 무스를 올린 후 천천히 씹어 삼켰다. 맛은…… 굉장히 안정적이야.
이는 동생 안데르트의 경고에 따른 대처였다.
『황제와의 만찬에서 음식을 조심할 것』
고마운 주의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퍽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일대일로 대면한 자리에서 어찌 요리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나는 두 개의 벽을 넘은, 강철 위장을 가진 무인이었다. 적절한 양의 독은 자력으로 회복할 수 있다. 외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한 입씩만 즐겨야 한다는 사실이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사냥제 우승상은 잘 전달받았나?”
식사가 시작된 후, 황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예.”
대답과 함께 따로 챙겨 왔던 황금 조각상들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주인님, 이것들은 만찬에 가져가시는 게 좋겠어요.”
“귀찮게 왜?”
“특별한 표식을 남겼다는 건 그만큼 신경 쓴 선물이라는 뜻이니까요. 가져가서 문장의 의미를 직접 여쭈면 힌트를 얻을 수도 있고요.”
“여기, 세 개의 조각상 모두 챙겨 왔습니다.”
“음? 왜 가져왔지?”
“황제 폐하께 보주가 지닌 의미를 여쭙고 싶었습니다.”
황제는 의외라는 눈치였다. 잠시 후 식기를 내려놓은 그는,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를 벗어 하인을 통해 내게 전달했다.
“그게 진짜 보주다. 부정한 악귀…… 정확히는 부정한 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황실의 보물이지.”
이게 황실의 진짜 보주라고?
하지만 이건…….
‘심장 결정석이잖아.’
틀림없었다. 보통 보주라고 하면 커다란 구슬 형상이기 마련인데, 황실의 보주는 진주와 유사한 크기였다. 그것도 심지어 반으로 쪼개진.
“원래 깨져 있던 물건인가요?”
“짐이 깨뜨렸다. 나머지 반쪽은 황태자가 지니고 있고, 내가 가진 반의 일부가 그 도금 안에 잠들어 있지.”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깨뜨렸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보물의 일부가 내 조각상에도 포함되어 있다니.
“보물의 가치가 떨어진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국의 미래를 나 몰라라 하고 짐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의미심장한 첨언이었다.
“정말 효험이 있습니까?”
“없다면 짐은 진작 관에 들어갔을 게다.”
그 말은 황성에 부정한 힘이 머문다는 뜻이었다. 곧바로 떠오르는 원천이 있었다.
메피스토의 심장.
“독선, 부도덕, 부정한 힘…… 모두 군주가 멀리해야 하는 삼악이지. 삼보주는 이 삼악으로부터 군주를 수호하는 보물로, 군주로 하여금 반드시 삼악을 멀리하란 경각심을 심어 주는 역할을 한다. 황제학에서 주야장천 강조하는 내용이야.”
“흥미롭군요.”
“흥미롭기는 하나, 진정한 깨달음은 수업이나 책을 통해 얻지 못한다.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어. 독선의 길을 걸어야 독선을 경계하고, 부도덕의 길을 걸어야 부도덕을 경계하며, 부정한 힘을 얻어야 그 힘을 경계하게 되지.”
황제는 다소 지친 얼굴로 물을 삼켰다.
“그 끝에 얻는 깨달음은 최후의 보상이나 마찬가지야. 아니, 벌이라는 표현이 명확하겠군. 후회조차 너무 늦었다는 사실만 자각하게 되니까.”
“…….”
“짐이 너무 어려운 말을 했나?”
“아니요, 인상 깊은 조언이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는 벽을 넘으셨습니까?”
“벽? 심신일체를 뜻하는가? 그런 것은 무인들만 얻는 깨달음이라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벽을 넘는 데 가장 큰 요소는 육체의 격이 아닌 영혼의 격이었다. 반신의 경지에 오른 디안 케트만 해도 무인보다는 치료사에 가깝지 않은가?
“폐하께서 무인이셨다면 분명 반신의 경지에 가까우셨을 겁니다.”
그 말에 황제가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보는 내 입 안이 다 텁텁해지는, 바짝 메마른 미소였다.
“짐의 얼굴에 과분한 금칠을 하는구나. 콜록, 콜록…… 듣고 있으니 호기심이 이는군. 신이 되면 영원히 죽지 않는 건가?”
“저도 잘 모릅니다만,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신의 세계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꿈같은 이야기로군.”
이후로 짧지 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가 다시금 입술을 연 것은 세 번째 요리가 준비될 때였다.
“식사량이 적구나, 웨더우즈 자작.”
“긴장해서 그런지 음식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잘 체하는가?”
“그런 편입니다.”
“안타깝군.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안데르트 파거는 살아 있나?”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운 본론이라, 나는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과거 황제와의 대면에서 안데르트를 언급할 때부터 기다려 온 순간이기도 하다. 그랬기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황제는 나타샤를 만나기 위한 관문이었으므로.
“아니요.”
부정하기 무섭게, 뒤에서 다가온 하인이 웬 상자를 하나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심상찮은 기운이 풍기는 물건이었다.
‘마도구.’
무슨 마도구지?
“황명이다. 다음 질문에는 사실만 고하라. 나타샤 황녀와 그대가 알고, 라파엘로 제나일과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이 알며, 14년 전 나타나 10년 동안 마도 전쟁에 참전해 연합군의 남하를 지휘하다가, 이후 퀸 섬에서 전사한 안데르트 파거. 웨더우즈 자작은 경우에 따라서 그자와 의사소통이 가능한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마도구로구나.’
황실 수준의 재력이 아니고서야 절대 구할 수 없을 진귀한 물건이었다.
한데 수상쩍다.
마도구가 수상한 게 아니라, 황제의 질문이 수상했다. 쓸데없이 장황하고 섬세한 것이, 마치 덫을 깔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황제의 질문을 하나하나 복기했다.
가볍게 ‘안데르트가 살아 있는가?’ 하면 나는 자신 있게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실제 내가 그리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맹세의 마법에서 나 자신을 데이지 파거로 정의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하지만 황제의 질문은 모호해.’
안데르트 파거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고, 무엇보다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물었다. 여기에 ‘아니요.’라고 답한다면 마도구는 거짓으로 판명할까?
“살아 있군. 그런가…… 안데르트 파거가 살아 있는가.”
……아.
염병. 나는 탄식을 삼켰다.
‘심리 싸움, 이었던 건가.’
고의로 요상한 마도구를 내 앞에 두고, 더 요상한 질문을 건네 사람을 동요시킨 거였어.
이런 제기랄. 나 당한 거야? 이 얍삽이가 내 불안을 미끼 삼아 답을 이끌어 냈구나!
무식하게 검만 휘두르고 살아온 인생이 이토록 부질없다. 사기는 힘만 세면 안 당할 줄 알았는데…….
황제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긴 상념에 빠졌다.
부정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가 당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물러설 자리는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앞만 보고 간다.
“그렇습니다, 폐하. 제 동생은 살아 있으며, 나타샤 황녀 전하를 뵙고 싶어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황제의 두 눈이 뜨였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하인이 내 앞에 반듯한 종이 한 장과 만년필을 준비했다. 서신을 작성하는 도구였다.
“이것은?”
“지금 당장 안데르트 파거, 아니, 블라디에프 백작을 황성으로 부르게. 바라던 대로 나타샤 황녀와 재회하게 해 주겠다.”